56화 마왕 강철남
건물 잔해가 들썩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이 먼지를 걷어 준다.
와르르—
강철 더미를 헤치고 일어선 것은 강철남.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던 멍구와 달리 병사들은 입이 쩍 벌어진다.
“시원하군. 술이 다 깨는 상쾌한 비야.”
강철남은 고개를 들고 비를 만끽한다.
그를 올려다보며 병사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는다.
그의 손에는 크레톤의 멱살이 붙들려 있었으니까.
“새로운 마왕이 탄생했다!!”
병사 중 하나가 크게 소리친다.
그 소리에 하나 같이 고개를 조아린다.
“마왕이시여!”
도시 크레톤의 법에 따르면 마왕에게 도전하여 승리한 자는 마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강자와 계속 대련하고팠던 마왕 크레톤이 만든 이 법은 그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없었기에 있으나 마나 한 법이었다.
그러나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새로운 마왕이 도래한 것이다.
“마왕 강철남. 축하해.”
“지랄하지 마. 안 할 거야.”
강철남과 멍구는 빗물에 더러워진 얼굴을 씻어 내며 숙취에 골골댔다.
마법의 효력이 끝나자 비구름이 걷혔다.
하늘에서는 햇살이 내리쬐었고 둘은 그 볕에 몸을 말렸다.
“귀 아퍼.”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데.”
군대의 함성 소리.
폭탄이 터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등.
산속에서 새들의 지저귐을 듣던 자연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소음들이었다.
“철남이, 이제 그만 돌아갈까.”
“그래. 소하 선생네로 가자.”
강철남과 멍구가 일어서서 가려고 하자 그들 앞을 막아서는 이들이 있었으니.
“마왕이시여! 어디 가십니까?”
“어디 가긴? 집에 가야지.”
“이제 마왕님의 집은 이곳입니다.”
“X까. 난 마왕 안 해.”
“아니, 그럼. 저희는 어떡합니까?”
황당해하는 용족 병사들.
어이가 없는 건 너희들 사정이다.
“야, 너하고 너. 가위바위보 해.”
“네?”
“새끼가 들어 놓고 못 들은 척하고 있어. 자, 안 내면 뒤진다, 가위바위보.”
얼떨결에 가위바위보를 하는 두 병사.
한쪽이 이기자 강철남이 그를 지목한다.
“네가 이제부터 마왕 해.”
“다, 당치도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왕을 정하다니요.”
“아 씨, 그럼 내가 마왕 하리? 난 니들이 그렇게 무시하던 인간인데?”
“실력만 있다면 종족이야 어떻습니까. 마왕을 이기는 자가 무조건 다음 마왕을 해야 합니다.”
그 소리에 멍구가 발끈한다.
“이 가증스러운 새끼들이 태세 전환하는 거 보소. 그럼 X바, 마왕 새끼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으면 모기 새끼가 마왕이냐? 아주 그냥 아가리에서 똥을 뱉어내고 있어.”
“히익!”
앞발을 쳐든 멍구에게 쫄아 후다닥 뒷걸음질 치는 병사.
막무가내 둘을 이길 순 없었다.
이대로라면 이 도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때였다.
하늘에서 뭔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말처럼 생겼는데?”
“뭐? 말이 하늘을 나는 게 말이 되냐?”
“그러니까 말처럼 생겼다고 했지 누가 말이랬냐.”
“그게 그거잖아.”
“아니, 직유법이잖아. 하여간 초등학교도 안 나온 개하고 무슨 말을 해.”
“가방끈으로 놀리지 마, 이 비겁한 새끼야.”
둘이 투닥투닥 하는 사이 하늘을 나는 말은 지상에 내려왔다.
보통 말이 아니었다.
하얀 깃털이 달린 날개를 단 말.
환상 속의 페가수스의 현신과도 같은 말이었다.
“철남!”
말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애정, 걱정과 호기심.
무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가이아? 네가 어떻게 여길.”
순간 하늘이 어두워진다.
마치 먹구름이 드리운 듯.
올려다본 하늘엔 빼곡히 덮은 페가수스의 군단이 벌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듯 지상의 군대가 마왕성을 향해 오고 있었다.
“철남. 설마 이 마왕성을 이렇게 만든 것이 그대인가?”
“성을 부순 건 멍구야.”
“떠넘기기냐? 크레톤을 조진 건 너잖아.”
“뭐라? 크레톤을?”
그제야 강철남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는 가이아.
머리가 으깨어진 채 쓰러진 크레톤을 발견한다.
“정말이지 그대는…….”
“뭐, 어찌어찌 그렇게 되었어. 그나저나 이 군대는 다 뭐야?”
“크레톤에게 수탈당하던 자들이다.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르러 왔지.”
“어이구, 잔뜩 마음먹고 왔을 텐데 맥 빠지게 해서 미안하네.”
“당치도 않은 소리! 우리들의 전력이었다면 승산을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셀 수 없이 많은 용감한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겠지.”
가이아 역시 마왕이다.
전장을 돌며 전투 경험을 쌓아 왔지만 함께 싸우는 동료들의 죽음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번 전쟁은 다른 어떤 전쟁보다 많은 전우들의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비극을 강철남 덕분에 겪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철남. 그대에게 또 감사할 일이 생겼구나.”
“그럴 필요 없어.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었을 뿐이니까.”
“여전히 둘러대는 게 서툴구나.”
눈웃음을 지으며 방긋 웃는 가이아.
강철남은 머쓱한 듯 말을 돌린다.
“그나저나 이제 이 도시는 어떡하지? 나는 맡아 줄 생각이 없는데.”
“그대의 신하가 될 병사들 앞에서 공공연히 크레톤을 쓰러뜨렸다. 아마 발을 뺄 수가 없는 상황 같구나.”
난감한 상황.
하지만 결정이 달라지지 않는다.
마왕 강철남 VS 자연인 강철남.
답은 정해져 있지 않는가.
“병사들은 들어라!”
갑자기 큰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호령을 하는 강철남.
새로운 마왕의 첫 명령에 병사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대기한다.
“지금부터 이 쓰레기 더미들 좀 치워 봐라.”
“네! 명 받들겠습니다!”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왕성의 잔해를 치우기 시작한다.
전부 쇳덩이라 무거웠지만 헬창 용족들은 근성장의 기쁨을 만끽하며 작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해 나간다.
“가이아. 난 지금부터 갈 데가 있어.”
“그대는 왜 그렇게 바쁜가. 격렬한 전투가 막 끝난 참이지 않는가. 조금 쉬어도 좋을 텐데.”
“미안. 꼭 가야만 해.”
진지한 강철남의 눈빛.
가이아는 차마 잡을 수 없다.
분명 중요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깊이 캐묻지 않겠다.
“기다리겠다. 각 나라의 대표들과 임시 마왕성을 지어 두고 기다릴 테니 꼭 와야 한다.”
“그래, 금방 오지.”
강철남과 멍구는 광속으로 땅을 차고 내달렸다.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가이아는 가슴 속에 간절한 기원을 담았다.
부디 저들이 무사하길.
* * *
소하의 집.
강철남과 멍구는 안주를 두고 다투고 있다.
“마!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지 마라.”
“개는 뼈다귀나 뜯으시지.”
마왕성 주방장의 요리는 일품이었다.
둘의 기세나 워낙 사나워 키켈은 포크를 갖다 대지도 못했다.
“자, 오래 기다렸네. 제자 녀석이 만든 술을 조금씩 섞어 맛을 배합해 봤네. 그럭저럭 마셔 줄 수준은 될 게야.”
소하 선생은 큼직한 대접에 술을 잔뜩 담아 왔다.
색깔은 탁한 우윳빛이었고 냄새는 살짝 바닐라 향이 풍겨 왔다.
제자 도깨비의 쓰레기 같은 술을 스승이 친히 개량한 것이다.
꿀꺽—
“오오!”
“이건!”
끝내줬다.
누가 마셔도 소하 선생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단번에 들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그 쓰레기 매립지에서 흘러나온 구정물보다 못한 침전물을 이렇게 재탄생 시킬 수가 있지? 연금술사세요?”
멍구의 팩트 폭력에 제자 도깨비는 조용히 눈물만 훔칠 뿐이다.
“술도 들어갔겠다, 이제 슬슬 이야기를 나눠 볼까 하는데.”
키켈이 입을 연다.
어째 묵직한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다.
“마왕님.”
“푸흡!”
강철남에게 진지한 얼굴로 존칭을 쓰자 멍구가 빵 터진다.
수치심에 키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살다 살다 철남이가 왕 소리 듣는 꼴을 다 보네. 너도 참, 몇 시간 전만 해도 반말하다가 갑자기 태도 돌변하니 안 어색하냐?”
꼭 정곡을 찌르고 또 찌르는 멍구.
‘그거 다 알고 서로 민망하니까 좀 닥치자.’
“이제 강철남은 마왕이시다. 내가 섬겨야 할 분이지.”
“너 마왕군에서 쫓겨난 거 아니었나?”
“가능하다면 다시 마왕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술을 홀짝이는 강철남.
키켈은 전직 사천왕이었다.
회사로 따지자면 임원인 셈이다.
도시 크레톤과 마왕성의 행정을 가장 잘 알 것이다.
“키켈.”
“네!”
“나 대신에 네가 마왕 대타 좀 뛰어라.”
“네에?”
화들짝 놀라는 키켈.
강철남은 차분하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네가 있을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냐?”
“마왕성입니다.”
“마찬가지다. 나도 내가 있을 곳 정도는 알아.”
“진심이십니까?”
“그래.”
도무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보인다.
“키켈. 너는 크레톤이 어떤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나?”
“…자립할 수 있는 국가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
“이제껏 약탈과 용병 일 같이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일만 했습니다. 말이 좋아야 공생이지 사실상 기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카르텔처럼 지식을 공부하고 신뢰를 구축한 거래를 트고 싶습니다. 가이아처럼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경 지혜를 갖추고 싶습니다. 나르딘처럼 이방인들에게 편안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국가로 가꾸고 싶습니다.”
“욕심이 많구나.”
“꿈이니까요.”
키켈의 눈을 바라보며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읽은 강철남.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왕성으로 돌아가자. 인수인계를 진행하지.”
강철남은 결심을 굳혔다.
섭정은 키켈이다.
* * *
“자, 그런고로 나 대신 키켈이 크레톤의 정치를 맡아 줄 거요.”
원탁 회의.
크레톤을 몰아내기 위해 모인 연합국의 대표들이 모였다.
강철남의 발언에 다들 심기가 불편한 듯하다.
“반대합니다.”
“반대를 반대하지.”
“아니, 적어도 이유라도 들어 보고…….”
한 대표가 이의를 제기하자 칼같이 끊어 버리는 강철남.
귀찮지만 계속해 보라는 손짓을 휘적휘적한다.
“키켈은 용족이자 크레톤입니다. 그의 정책은 전 마왕 크레톤의 사상과 상당 부분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또 한 번 무력 국가로서 성장한다면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출신 국가랑 종족 때문에 찝찝하다는 거 아냐?”
“아니,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게 그 말 아니야? 하여간 정치하는 놈들은 뭔 말을 죄다 관람차처럼 빙빙 돌려 말하고 있어.”
“철남이, 저 새끼 인종 차별주의자야? KKK단 뭐 그런 건가?”
“마왕 강철남 님, 그리고 멍구 님. 거친 언행은 삼가 주십시오.”
사회자가 회의 분위기를 되돌린다.
다음 발언권을 얻은 대표가 침착하게 자기 의사를 표한다.
“크레톤의 현 마왕은 강철남 님입니다. 키켈은 전 마왕의 사천왕 중 한 명이지만 과연 그가 마왕을 대신해 국정을 수행할 능력이 되는지 의심됩니다.”
“오히려 인간계에서 막 올라온 나보다 이 나라 굴러가는 꼴은 더 잘 알지 않을까?”
“크흠. 그리고 임명 과정이 너무 독단적입니다. 전형적인 독재 국가의 행정 처리법 아닙니까?”
“아니, X바 꼬우면 쳐들어오던가. 야, 멍구야! 군대 모아! 맞짱이다.”
“오예! 개 난장판!”
“저, 정숙! 정수욱!!”
회의는 개판이었다.
강철남은 결국 참지 못하고 깽판을 쳐 놨고 각국의 대표는 그의 발언에 기가 막혔다.
가이아만이 그런 그의 태도를 예상하였고 강철남과 멍구의 깽판이 어찌나 웃긴지 배꼽을 잡고 깔깔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