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개 난장판
소하 선생은 또 다른 술을 내밀었다.
잔에 가득 담긴 것은 하늘색 빛깔을 띠는 고운 빛깔의 술.
코끝으로 전해지는 향기가 그야말로 예술이다.
“천상주네.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에 붙인 이름이지.”
다소 허세와 과장이 섞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하 선생이 담근 술이라면 어떤 이름을 붙여도 아깝지 않다.
믿고 마셔 본다.
잔 가까이 얼굴을 대는 순간 마치 푸른 하늘과 마주하는 느낌이다.
훌륭한 술은 보는 맛도 즐겁다는 말이 이런 거로구나.
강철남은 천상주를 입에 털어 넣는다.
그러자 이가 구름이 되고 혀가 하늘이 되는 기이한 감각에 휩싸인다.
이것이 정녕 술인가, 아니면 도사의 술법인가.
어떤 마법도 이보다 신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취하지도 않았건만 비틀대며 손을 짚을 곳을 찾는 강철남.
뭔가에 홀린 듯 정신을 가다듬기 힘들다.
“자네, 괜찮은가?”
“네. 잠시 놀란 것뿐입니다. 대단하군요. 술이 사람을 가지고 놀고 희롱하는 듯합니다.”
“하하하. 본디 술이란 그런 것 아니겠나. 자신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 마시는 것.”
마찬가지로 천상주를 마신 멍구는 혀를 축 늘어뜨리고 환상 속에 보이는 구름을 좇고 있다.
“멍구야, 이놈. 정신 차리거라.”
찰싹—
엉덩이를 찰싹 때려 주자 정신이 번쩍 드는 멍구.
마음 같아선 퍼질러 앉아 종일 술이나 마시고 싶을 지경이다.
정신을 차리고 할 일을 한다.
“선생님. 지금 당장 식량 창고로 가십시오. 그리로 가시면 선생님을 모시고 갈 이동 수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자네들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소하 선생은 술병들을 달그락 뒤적이며 깊숙한 곳에서 뭔가를 끄집어낸다.
그가 손에 쥔 것은 검은색 술병.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함을 넘어 설레기까지 한다.
“이것은 공표주. 마음에 두려움이 클수록 쓰디쓴 맛이 나지만 반대로 두려움이 없다면 그 어떤 술보다 달고 단아한 맛이 난다네.”
“마법 같은 술이군요.”
소하 선생은 이들을 시험해 볼 생각이다.
크레톤을 쳐부수겠다는 게 근거 없는 큰소리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이 있는 담대함인지.
검은 술병에서 따른 술은 투명한 황금빛을 띠었다.
향은 무향에 가까웠고 묽기는 물과 같았다.
강철남과 멍구는 잔을 부딪치며 한입에 술을 털어 넣는다.
술맛이 어떠한지는 그들의 표정이 말해 준다.
소하 선생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여태 공표주를 마신 자들을 많이 봐 왔지만 자네들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는 자들은 보지 못했군.”
소하 선생이 뭐라고 말하건 말건 안중에도 없다.
한 잔 더 마시고 싶어지는 맛이다.
“앗, 자중해야지. 아무튼 선생님. 저희를 믿고 식량 창고로 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좋네. 자네들을 믿지. 내 술을 믿으니까 자네들 역시 믿을 수밖에.”
결심을 굳힌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소하 선생.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가는데,
빈손?
“선생님, 짐은 안 챙기십니까?”
“부랴부랴 챙길 건 또 뭔가? 크레톤을 위해 빚은 술이네. 맛은 보장하지만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 그대로 두고 떠날 것이네.”
신념이 너무나도 굳셌다.
그런 점이 소하 선생을 최고의 자리로 이끈 것이겠지.
다만 이 술들이 너무나 아까운 강철남과 멍구.
결국…….
* * *
마왕성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고작 서른 칸도 되지 않는 계단을 휘청거리며 걷는 한심한 인간과 개가 있다.
“워매, X불. 호구와트여? 계단이 좌우로 움직이네.”
멍구는 네 발을 문어발처럼 꼬며 엉망진창으로 걷는다.
“바보냐? 계단이 어떻게 좌우로 움직이냐. 정신 똑바로 차려.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잖아.”
강철남은 어릴 때 유행하던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으며 제자리걸음 중이다.
이들은 인사불성 취해 있다.
소하 선생이 남기고 간 술이 아까워 잔뜩 부어라 마셔라 뱃속에 가득 챙겨 두고 나선 것이다.
그 덕에 1분이면 뛰어갈 거리를 10분째 빙빙 돌며 헤매고 있다.
“키야, 그나저나 술맛 끝내주네. 국가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야.”
“멍구. 키켈 녀석이 마왕이 있는 방은 어디랬지?”
“3층, 가운데 커다란 문.”
“여기가 몇 층이야?”
“나도 몰라.”
“끄윽. 일단 가 보자.”
인사불성 취해서 비틀대는 둘.
2층을 무작정 휘적이다가 아무 방문을 벌컥벌컥 연다.
그러다 엉뚱한 방문을 열어 엄한 용족들과 시비가 붙는데,
“뭐야?!”
“인간?”
“개도 있잖아. 설마 이 녀석들?”
방에서 각자 업무를 보던 용족들 눈앞에 수배범이 나타났다.
이 녀석들만 잡으면 진급은 물론 돈벼락에 앉는 건 떼어 놓은 당상.
“이 녀석들은 내 거야!”
“개는 내가 차지한다.”
웬 도마뱀 대가리들이 달려드는가.
여름밤에 앵앵대는 모기처럼 귀찮게 느껴질 뿐이다.
“징그럽게 왜 달라붙어.”
콩—
“끄악!”
콰앙!
“케엑!”
팔을 휘저어 용족들의 뚝배기를 깨는 강철남.
이따금 벽을 후려쳐 건물이 흔들린다.
“우왁! 마왕성이 흔들린다!”
“지, 지진인가?”
“아니야, 이 인간 녀석이 마왕성을 부수고 있어.”
“말도 안 돼. 무슨 힘이.”
와중에 멍구는 돌격 박치기를 엉뚱한 곳에 날리고 만다.
와장창!
힘껏 몸을 날린 곳은 창밖.
멍구가 허공을 가르며 공중에 붕 뜬다.
“으아아!!”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멍구.
그 소란에 마왕성에 비상종이 울려 퍼진다.
“잠입은 니X. 역시 우리 스타일은 난동이지.”
그제야 강철남은 가슴에 응어리진 억압을 벗어던진 기분이다.
이제 적당히 힘 조절하는 건 여기까지다.
“죽여!”
방으로 들이닥친 용족들이 칼과 도끼를 들고 맞선다.
리미트를 풀어 버린 강철남이 주먹을 쥐고 그대로 풀스윙으로 휘두르니,
콰앙!
마왕성의 강철 벽을 찢으며 용족들이 날아다닌다.
그사이 멍구는 1층에 집결한 크레톤의 군대와 맞선다.
“이야, 이거 멋진데. 개 한 마리 잡으려고 군대가 동원됐어. 나 좀 쩌는 듯.”
“저 개놈을 잡으면 단번에 출셋길에 오른다. 모두 돌격!”
뭐지? 경험치 두 배 이벤트인가?
자기를 이벤트 몬스터 취급하는 게 영 기분이 불쾌하다.
기분은 더러울수록 전투력이 상승하는 법.
멍구는 용족들의 철 갑옷을 박치기로 박살 내 버린다.
그러고는 군대의 가운데로 파고들어 다리 사이로 재빠르게 헤집고 다닌다.
혼란 속에 녀석들이 서로의 정강이에 칼질을 하고 마는데,
“아악!”
“이 새끼가 지금 내 다리에 칼빵 놨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X까! 너는 뒤졌어!”
급기야 서로 편 갈라 먹고 패싸움이 일어난다.
가뜩이나 평소 마음에 안 들었던 녀석의 죽빵을 후려갈기며 분풀이를 하기 시작한다.
의도치 않게 혈기 왕성한 녀석들을 교묘하게 와해시키는 작전이 되어 버렸다.
“역시 싸움은 개 난장판이어야 재밌지.”
군중 속에서 멍구는 신나게 용족들의 꼬리를 물어뜯으며 후드려 팬다.
마왕성에서 한바탕 전쟁이 시작되자 키켈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소하 선생이 도착했고 요리도 완성되었다.
이제 강철남이 시키는 대로 목적지까지 수송하면 되는 일이다.
“오호, 자네는 키켈 아닌가? 어째서 자네가 철남이를 돕는 거지?”
“나도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등에 업혀라. 여기를 빠져나갈 거다.”
“지금 당장?”
“혼란을 틈타 도망치기 딱이야.”
키켈은 음식을 싼 보자기를 손에 쥐고 소하 선생을 등에 업었다.
저공비행으로 눈에 띄지 않게 건물 사이를 빠르게 지나갈 셈이다.
강철남에게 호되게 당하느라 실력 발휘하는 모습을 못 보여 줬지만,
그래도 명색이 크레톤의 사천왕.
이 정도 수송 임무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럼, 출발한다. 꽉 잡아.”
키켈이 땅을 차고 날아오른다.
한 번의 날갯짓으로 총알처럼 전진 비행하는 키켈.
이대로 순탄히 나아가면 된다.
그러나,
피잉—
누군가 키켈의 날개를 노려 화살을 쏜다.
화살에는 마법이 실려 있었다.
어중간한 실력자는 아닌 모양이다.
하마터면 소하 선생이 다칠 뻔했다.
“어떤 놈이냐?”
“반역자 키켈. 소하 선생을 데리고 어디로 가려 하느냐!”
화살을 쏜 것은 가른.
언제나 사천왕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R랭크의 막강한 용족이었다.
“겁쟁이 가른이냐. 마왕성이 공격받고 있는데 어째서 외곽에 나와 있지?”
“네가 감금되어 있는 방에 가 봤더니 모습이 보이지 않더군. 쥐새끼처럼 도망칠 거란 걸 눈치채고 쫓아온 것이다.”
“넌 내게 너무 집착해.”
“난 언제나 너를 죽이고 싶었다. 사천왕의 자리는 네가 아니라 내가 들어갔어야 해.”
“바보냐? 지금 사천왕 자리 모조리 공석이잖아. 이제 들어가면 되겠네.”
“그런 문제가 아니다. 너까지 깔끔히 죽어야 구세대 사천왕의 시대가 깔끔히 정리되거든. 네가 죽어야 비로소 신세대 사천왕이 완벽히 탄생할 수 있는 것이야.”
가른은 억지를 부리며 활에 살을 먹였다.
마법을 담은 화살은 공기를 때려 폭발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어정쩡하게 피했다가는 소하 선생이 폭발에 휘말려 다칠지도 모른다.
그랬다간 강철남에게 무슨 꾸지람을 들을지 모른다.
“젠장. 크레톤한테도 이렇게 쫄아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강철남이라는 인간의 비위를 거스르는 건 죽기보다 싫구만.”
[화염창]
키켈은 화염창을 던져 화살을 맞받아친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데,
“네 놈은 화염창 말고는 내세울 수 있는 기술이 없지. 그게 네 한계다.”
“그야 화염창 다음 기술을 본 녀석들은 모조리 죽었으니까.”
“뭐?”
어느새 가른의 수직선 위에 떠 있는 키켈.
아래를 향해 손을 뻗는다.
[연옥]
그러자 갑자기 엄청난 불길이 바닥 전체를 뒤덮는다.
일대는 모조리 불바다가 되었고 가른은 화염에 휩싸여 괴로워한다.
마력을 전부 쏟아붓는 대발화 스킬, 연옥.
키켈의 필살기인 이 스킬은 살을 내어주고 뼈를 깎는 기술이다.
엄청난 고온에 휩싸인 가른은 마침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마무리는 역시 이거지.”
[화염창]
키켈은 화염창을 쓰러진 가른의 심장에 박아 넣어 확실히 사살했다.
그러자 심장이 불타면서 가른은 숨을 거둔다.
“끝났군. 이제 그만 가지. 소하 선생.”
“자네도 엄청 강하구만.”
“글쎄. 나도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어. 그 인간을 만나고 나서는 강함에 대한 척도 자체가 뒤틀려 버렸지만.”
소하 선생과 음식을 챙기고 마왕성 일대를 유유히 벗어나는 키켈이었다.
한편 강철남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구석에 오바이트나 쳐 하고 있다.
“우웨엑!”
역시 소하 선생의 술이다.
토사물에서도 꽃향기가 난다.
“간만에 과음하니 죽을 맛이구만.”
비틀대며 가장 커다란 문 앞에 서는 강철남.
‘이곳에 크레톤이 있다는 건가.’
쿠앙!!
문을 발로 세게 걷어차며 들이닥친다.
“당장 나와!”
이상하게 조용하다.
씩씩하게 돌격했는데 아무도 없다.
수상할 정도로 잠잠하다면 이유는 단 하나,
기습이다!
[쇠 기차]
강철남의 예상과 동시에 왼쪽에서 달려오는 크레톤.
어깨를 쇳덩이로 만들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온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공격이다.
하지만,
“우욱!”
너무 취했다.
때엥!!
강렬한 충돌음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강철남.
강철 벽에 머리를 처박히면서 타종 소리가 난다.
“너는 너무 기어올랐어. 그거 알아? 인간은 대대로 약한 존재였지. 힘도 약해, 지혜롭지도 않아, 마력도 없어. 무가치한 존재였단 말이야. 그런데 반대로 용족은 어때? 힘도 강하지, 현명하지, 마력도 출중해. 가장 우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아?”
크레톤은 방을 빙빙 돌며 씩씩대더니, 흥분해서 미친 듯이 말을 토하듯 뿜어낸다.
“인간이, 용족에게 반기를 들었어. 이건 역사적 오류야. 비유를 들어 줄까? 돼지가 인간을 도축하는 일이 있나? 물고기가 인간을 낚는 일은? 그것과 같은 거야. 인간이 용족에게 주먹을 들어? 그건 잘못된 거야. 신이 설계를 잘못하지 않는 이상 그런 오류는 발생해서는 안 돼.”
크레톤의 흥분이 점점 더 거세어진다.
심장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온몸이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열이 오른다.
“나는 신의 대리인이다. 오늘 그 오류를 바로잡아 주겠다.”
광기 어린 전투 모드로 돌입한 크레톤.
그는 강철남을 묵사발을 내 주려 한다.
그러나 정작 강철남은,
“야, 너 뭐라 했냐? 잠시 잠들어서 못 들었네. 어유, 다 늙어서 술 처먹고 길바닥에서 퍼질러 자고. 주책이야 증말.”
“이, 이 새끼!!”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크레톤이 이를 빠득 갈며 달려든다.
[용광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