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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강 자연인이다-52화 (52/175)

52화 마왕성에서 깽판

* * *

도시 가이아는 마왕성의 재건 이후 모든 것이 순탄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지구는 제철 나물과 제철 과일을 풍족하게 생산해 냈고,

거리에는 상점가들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빵집에는 다시 빵 냄새가 솔솔 풍겼고,

카페에는 신선한 과일을 진열하였으며 곧바로 착즙한 시원한 주스를 손님에게 대접했다.

도시는 크레톤의 군대가 완전히 철수하면서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마왕 가이아는 원만히 굴러가는 국정을 보며 감사의 마음을 품었다.

한때는 정말 멸망 위기까지 갈 뻔했던 가이아.

이 도시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건 한 인간과 한 마리의 개 덕분이다.

“강철남.”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그가 남기고 간 이 풍작의 도시 가이아.

이곳을 앞으로 두 번 다시 지난 시절과 같은 수모에 빠뜨릴 수는 없다.

이 땅을 지키는 일은 마왕인 자기 몫이다.

“지금부터 국정 회의를 시작하겠다.”

마왕성의 대신들을 모아 국정 회의를 연 가이아.

절차대로 보고 받을 내용들을 보고 받고 허락을 요구하는 내용은 검토 후 답변했다.

모든 안건이 마무리되자 마지막으로 준비된 말을 꺼낸다.

“지금부터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가이아의 무거운 음성에 대신들이 귀를 기울인다.

“크레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폐하, 그것은 그저 샘물 마을에서 들려오는 낭설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크레톤이 사천왕을 세 명이나 잃고 가만히 있을 마왕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건…….”

“마음은 이해한다. 나도 믿고 싶지 않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소문을 그저 소문으로 넘겨 버리고 싶은 한 대신이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크레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곧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것은 이때까지의 역사일 뿐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충분히 맞설 수 있다.”

“마왕님, 군세의 차이가 많이 납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사실임을 인정한다. 아마 우리 가이아의 병력만으로는 이겨 낼 수 없을 테지.”

군세의 차이는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단언에 대신들이 웅성웅성한다.

“중요한 건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안을 찾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마 투항이라는 말은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대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군.”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이 아니다. 당연한 감정이니라. 그런 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공감도 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기에 백성들을 다스리는 나랏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부드러운 말로 대신들을 다독이는 가이아.

누구보다 크레톤의 무서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마계의 모든 이들은 크레톤을 두려워하지. 그런데 만약.”

가이아는 대신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본다.

그리고 마음을 담아 속내를 터놓는다.

“그 두려움들을 하나하나 모아 새로운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떠한가?”

“두려움을 용기로… 말입니까?”

“그렇다. 나르딘, 샘물 마을, 요르, 도하, 길라, 수르단, 세틸, 모돈, 주크, 리졸. 이 국가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는가?”

“모두 한때, 아니면 현재 진행형으로 크레톤의 지배를 겪은 마을과 국가들입니다.”

“그렇다. 모두 크레톤이라는 한 국가에 패배해 노예로 전락한 민족들이지.”

크레톤에게 수탈의 대상이 된 민족들.

한 마디로 식민지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그런 마을, 그런 국가들이 마계에는 많은 것이다.

“그들은 크레톤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다. 두려움에 굴복한 것이다. 그들 각자의 마음속의 적에게 말이다. 이제 그 두려움과 싸워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우리 가이아가 설 것이다.”

“마왕님.”

“마왕 가이아. 여기서 선언한다. 크레톤에 맞서 대항할 연합군을 궐기하겠노라.”

대신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크레톤과 맞서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간신히 되찾은 가이아 국민들의 미소를 다시 크레톤에게 짓밟히는 악몽이었다.

자연과 조화로이 살아가는 가이아가 민족성이 유린당한 채 오로지 크레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이상 그건 더 이상 가이아가 아니다.

여기서 물러난다는 것은 가이아를 잃는 것이다.

가이아를 지킨다.

크레톤에 대항할 작은 두려움들을 모아 용기라는 힘으로 새롭게 일어서는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대신들은 머리를 조아려 가이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크레톤을 향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 * *

한편 크레톤.

동전은 앞면이 나왔다.

그래서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좀 팍팍 좀 뚫어 봐.”

강철남은 중지를 뾰족이 세운 주먹으로 강철 벽을 소리가 나지 않게 콩콩 갉아 부순다.

“재촉하지 마. 애초에 잠입을 벽 뚫어서 처들어가는 게 말이나 되냐. 정말 등신 같은 아이디어야.”

“뭐? 그럼 동전 던지기 전에 말하지 그랬냐. 너도 그 등신 같은 아이디어에 동의한 거잖아, 이 등신 머절탱아.”

“벽보다 네 마빡에 먼저 구멍 뚫어 주리?”

어김없이 투닥투닥하는 둘.

그사이 벽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데.

“오오. 뭔가 보여.”

“뭐가 보이는데?”

아직은 잘 안 보인다.

깨작깨작 파는 꼴이 답답했던 멍구.

냅다 앞발로 금 간 벽을 후려갈겨 버린다.

쿠왕!

와르르!

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강철 벽.

그나마 떨어지는 조각이 자잘해서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꼭 끝에 와서 깽판을 쳐야 속이 시원하겠냐?”

“속 터져 죽겠다. 역시 자객 같은 짓거리는 우리랑 안 어울려. 화끈하게 쿵, 쾅, 파팡! 소란 피우는 게 체질에 맞아.”

부정할 순 없는 말이다.

마음 같아선 성을 통째로 날려 버리고 싶었으니.

어찌 됐건 마왕성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들어온 방은,

“여긴?”

살짝 싸늘하다.

방 전체에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

이 정도로 냉온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지.

“식량 창고구만.”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마침 배가 고팠던 강철남과 멍구.

이건 신의 계시가 틀림없다.

“철남이, 판 깔어.”

강철남은 등에 멘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무쇠 팬.

무너진 강철 벽의 잔해를 모아 받침대를 만들고 그 가운데에 손을 뻗는다.

[점화]

크레톤의 사천왕 미로가 부리는 잔재주를 모방해 불을 지핀다.

장작 없이도 타오르는 불덩이가 금방 무쇠 팬을 뜨겁게 달궜다.

“워매, 수랏간이여, 뭐여?”

창고 이곳저곳을 들쑤시던 멍구는 입이 쩍 벌어졌다.

무슨 고기인지는 몰라도 한눈에 보기에도 훌륭한 마블링이 최상급 품질임을 뽐내고 있다.

과일과 채소는 가이아에서 가져온 듯 푸릇푸릇하고 신선했으며,

온갖 소스는 마치 대형 마트 진열대처럼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여긴 천국이야.”

멍구는 우적우적 과일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잠시 목적을 잊고 아예 눌러살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재료를 두고 술이 빠지다니. 이거, 한시라도 빨리 소하 선생을 찾아야겠군.”

“그 전에 배에 기름칠부터 하자!”

무쇠 팬이 충분히 달궈지자 그 위에 고기를 얹는다.

그러자 치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고기가 맛있게 익어 간다.

언제 들어도 황홀한 고기 굽는 소리.

멍구의 쩍 벌린 턱주가리에서는 폭포수가 멈추질 않는다.

가이아산 햇감자를 잘게 썰어 팬 가장자리에 놓는다.

노릇노릇 굽히는 감자가 곧 바삭하게 익었다.

고기를 잘라 속까지 익히는 동안 과자처럼 익은 감자를 한 입 먹는데,

바삭—

그 식감과 고소함이 일품이었다.

“지렸다.”

“지리고 또 지렸다.”

혀에 감칠맛이 돌자 얼른 메인 메뉴가 절실해진 둘.

고기가 익어 가는 그 몇 분이 영겁의 시간 같다.

“철남이, 여기 버터가 있어.”

“뭐? 정말이야?”

버터.

우유 속 지방을 모아 만든 것으로 고기 요리에 풍미를 더해 주는 재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바퀴가 아니라 버터라는 생각마저 든다.

“크레톤, 이 새끼. 대가리에 깡통만 들어찬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제법인걸.”

“빨리 투입해! 못 참겠어.”

마침 고기도 다 익었을 무렵이다.

버터를 얹자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녹아든다.

기름진 고소한 냄새가 꽃향기처럼 피어오르며 고기를 감싸 안는다.

버터를 고기 위에 끼얹는 베이스팅 작업으로 맛을 입혀 준다.

그렇게 맛있게 익은 고기.

냄새만 맡아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철남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뭐 또 병신 같은 말을 하려고.”

“지금 우리는 이미 죽어서 극락에 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불교 세계에서 미쳤다고 고기를 대접하겠냐.”

잡설은 그만하고 식사 타임이다.

고기를 한 점 집어 들고 먹으려 한다.

입을 쩍 벌리고 허기진 뱃가죽에 축복을 선사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그 찰나를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벌컥—

“이게 무슨 냄새야?”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 들이닥친다.

하얀 옷을 입고 높이 솟은 요리사 모자를 쓴 용족.

딱 봐도 주방장이다.

주방장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얼탱이가 나갔다.

구멍이 뻥 뚫린 강철 벽.

식량 창고에서 불을 때고 고기를 구워 먹는 미친 인간과 개.

이게 꿈인가 싶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녀석들은 크레톤에서 수배가 걸려 있는 인간과 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뜩 든다.

“너, 너 설마! 가, 강철남?”

“내 이름은 어떻게 알지?”

“잘됐다. 네 목에 걸린 현상금이 얼만지 알아? 이참에 나도 출세 좀 해 보자.”

주방장은 허리춤에서 거대한 중식도를 꺼내 든다.

이건 또 무슨 똥 멍청인가 싶다.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상대를 주방장 주제에 2:1로 상대하겠다고?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걸 친히 알려 주자.’

“멍구, 도마 좀 깔아 봐.”

착—

멍구가 앞발로 도마를 깔자 그 위에 주방장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는 강철남.

쿠앙!

“아이구야! 내 허리!”

“자, 어디부터 다져 줄까? 꼬리? 다리?”

“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주방장은 강철남의 손아귀에 잡히자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깨닫고, 이러다가 구워 먹히겠구나 싶은 생각에 눈물이 줄줄 흐른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네!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술을 담그는 장인이 이 성에 잡혀 있지?”

“네네! 맞습니다!”

“그는 어디 있지?”

발설했다간 밀고자로 몰려 몰매를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닥치고 있다가는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 주방장.

“이 새끼가. 목숨이 걸렸는데 내적 갈등을 해? 꼬랑지 한 뼘 잘려 나가 볼래? 아직 팬도 뜨겁겠다 확 구워 버릴라.”

멍구가 험상궂은 표정을 들이대며 주방장을 위협한다.

“흐흐흑! 실토하겠습니다! 술 장인은 동쪽 복도 끝에 있는 작업장에 갇혀 있습니다.”

“신변에 이상은 없겠지?”

“그럼요! 마왕님을 위해 술을 빚고 있습니다!”

눈을 보니 거짓은 없는 모양이다.

더는 물어볼 말 따윈 없다.

이제…….

“너는 중요한 일을 해 줘야겠어.”

“네? 중요한 일이라뇨?”

“지금부터 두 시간. 우리는 두 시간 안에 여기 다시 올 것이다. 그때까지 최고의 술안주를 만들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끔뻑끔뻑하는 주방장.

“아니 이 새끼가 그냥 까라면 까야지 말이 많아.”

멍구의 앞발에 관자놀이를 처맞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예, 옙! 대령하겠습니다!”

“여기 무쇠 팬 놓고 갈 테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꼼짝 말고 여기서 작업해. 허튼짓하면 내일 아침은 지옥에서 먹게 될 거야.”

“히익! 명심하겠습니다!”

강철남과 멍구는 식량 창고 문을 열고 나온다.

본격적으로 성안 깊숙이 들어갈 때가 왔다.

목표는 동쪽 끝 복도.

그런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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