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마왕도 갑질을 한다
“맛있는 과일과 곡식! 딸기도 있으려나? 빵도 맛있을 거야.”
멍구는 잔뜩 기대해 본다.
방금 구워낸 갈색 빛깔이 반짝반짝하는 식빵.
쭉 찢으면 하얀 결 따라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나는 호밀빵.
겉은 바삭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한 바게트 빵.
달콤한 앙금을 듬뿍 넣은 단팥빵.
“넌 개가 왜 그렇게 빵을 좋아해?”
“맛있으니까!”
과일도 기대된다.
가이아는 독특하게도 네 개의 지구로 나뉘어 있는데 각 지구마다 또렷이 계절 차이가 난다.
1지구는 봄, 2지구는 여름, 3지구는 가을, 4지구는 겨울.
즉, 한 국가 안에 사계절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곧 모든 제철 과일을 한 상에 올릴 수 있다는 것.
“히히, 딸기와 멜론. 자두와 복숭아, 귤과 머스캣.”
멍구가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며 촐랑댄다.
저리도 좋을까 싶다.
멍구가 저토록 좋아하니 강철남도 가슴속에 은근히 기대감이 피어오른다.
가 보자, 가이아로!
* * *
마왕 크레톤의 성.
키켈은 성문 앞에서 나뭇잎을 말아 만든 잎담배를 피우며 서 있다.
차마 들어갈 수가 없다.
뭐라고 보고를 올려야 할까.
“앗, 키켈 님 아니십니까? 안 들어가십니까?”
용족 경비병 하나가 알은체하며 말을 걸어온다.
키켈은 깜짝 놀라 입술에 손가락을 얹는다.
“쉿! 조용히 해.”
“왜 그러십니까?”
“지금 마왕님 기분 어때?”
“음, 그게 사실 별로 안 좋으십니다.”
“왜?”
“얼마 전에 나르딘에서 수납하러 갔던 애들이 웬 인간이랑 개 한 마리한테 당하고 왔잖아요. 그날 이후로 사소한 일 하나에도 트집 잡고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하아, 조졌네.”
불이 꺼진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하나 더 꺼내 무는 키켈.
“그나저나 혹시 뭐 실수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그래, 인마. 넌 눈치 없이 꼭 일일이 캐묻고 확답을 받아야 속이 시원하겠냐?”
“앗, 죄송합니다. 너무 표정이 어두우셔서. 고민이 있으면 털어놓는 게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겁니다.”
“고민은 무슨, 짜샤.”
담배를 쪽 빨아들이며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는 키켈.
어찌하나 싶다.
“그러고 보니 피부 색깔 때문에 잘 안 보였는데 혹시 그거 멍이에요?”
“아, 새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촉이 좋아?”
“맞으셨어요?”
“그래, 새끼야! 네가 말한 그 인간한테 개 처맞고 돌아오는 길이다.”
“네에? 키켈 님이요? 농담하지 마세요. 마왕님 직속 부관인 사천왕 중 한 분이시잖아요.”
“그러니까 내 멘탈은 어떻겠냐고.”
황당함을 넘어서 어이가 없는 일이다.
여태 패배라고는 마왕 크레톤을 상대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원래 인간이라면 마물이나 엘프보다도 훨씬 약한 존재 아닌가요?”
“나도 알아! 아니까 아픈 데 쑤시지 마.”
“정말 인간 맞아요? 인간의 탈을 쓴 변태 마물일 수도 있잖아요.”
“분명 인간의 기운이었어. 확실히 인간은 맞아. 설명이 안 되는 건 그 말도 안 되는 강함이야.”
허공을 응시하며 담배를 태우는 키켈.
대체 어떤 존재일까.
인간이면서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
남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혹시, 그 전설이 사실 아닐까요?”
“무슨 전설?”
“왜 있잖아요. 초대 마황제님이 무언가로 환생하여 돌아오신다는 전설.”
“그게 말이 되냐. 헛소리하지 마 인마.”
마계에 떠도는 소문이 있다.
4마왕을 임명한 마황제는 자기가 사라진 뒤 인간계와 이어질 구멍이 열릴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남기고 정말 종적을 감춘 마황제.
그런 마황제가 마왕들에게 남긴 말이 있었다.
바로 자기는 모든 혼돈을 뒤로한 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것이라고.
그리하여 평온한 안락을 추구하리라고.
“그 소문이 사실이래도 하필 환생을 해도 인간으로 환생을 하겠냐.”
“그렇죠? 히히.”
그렇게 키켈과 경비병이 실없는 소리로 농담 따먹기를 나누는데,
덜컹—
성문이 열리면서 비서가 나타난다.
“키켈 님. 마왕님께서 지금 당장 들어오라 하십니다!”
“아오, 젠장. 들켰군. 나 먼저 간다.”
“꼭 살아 돌아오십시오.”
굳은 표정의 키켈.
차마 꼭 그러리라 확답을 못 한다.
성안으로 들어가 마왕이 운동을 하고 있는 단련실로 향한다.
복도를 걸으며 변명 거리를 생각해 봤지만 다 소용없을 것 같다.
남자답게 당당히 머리를 숙이자.
사과하면 봐주실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단련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크레톤 님! 이번 일은 정말 죄송하게…….”
카앙!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벨 플레이트가 날아온다.
무게는 10t.
정통으로 맞은 키켈의 이마빡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누가 말을 해도 된다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곧바로 자세를 고쳐 잡고 무릎을 꿇는 키켈.
그 앞에 키가 3m, 비늘이 검은 흑룡 용족이 서 있다.
코에 날카로운 뿔이 달려 있으며 접은 날개에는 가시가 박혀 있다.
우락부락하지 않아도 슬림한 근육 안에는 압축된 근섬유들이 가득 차 있듯 탄탄한 몸매다.
“나는 사과를 바라지 않는다. 결과, 결과를 바란다.”
“결과는…….”
“키켈.”
“죄송합니다…….”
처참한 표정의 키켈.
분위기가 무겁다.
크레톤은 10t짜리 덤벨을 양손에 들고 어깨 운동을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사천왕이 무어라 생각하나.”
“그게, 크레톤에서 마왕님 다음으로 강한 네 명의 부관입니다.”
“대답은 그걸로 끝이냐?”
“시, 실패란 걸 모르는 자들입니다.”
“틀렸다.”
덤벨을 내려놓고 후우, 거친 숨을 내쉬며 거울에 비친 근육을 확인하는 크레톤.
“실패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이지. 그것과는 아무 상관 없다.”
“그렇다면 실패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화색이 도는 키켈.
그러자 다시 플레이트가 날아와 이마빡을 가격한다.
“네가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크레톤은 부들부들 떨며 거품을 물고 있는 키켈에게 한마디 해 준다.
“내 이름을 걸고 쪽팔린 짓을 했다는 것.”
인간에게 패배했다는 치욕스러운 불명예.
크레톤이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 단 하나였다.
“비서.”
“옙!”
“인간의 행방은?”
“가이아로 간 듯합니다.”
“잘 됐군.”
“네. 마침 사천왕 중 한 분인 고르 님이 임무 수행 중이시니까요.”
“나머지 사천왕들을 모두 보내라.”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크레톤은 바벨을 들고 스쿼트를 시작한다.
사천왕 네 명이 모이면 인간과 개 한 마리 가루를 내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다만 크레톤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가이아.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겠어.”
사천왕이 뭉치면 자기를 제외한 어떤 마왕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라면 가이아를 데려올 것이다.
곧 가이아를 차지할 생각에 크레톤은 아드레날린이 폭발한다.
“끄하하하!!”
미친 듯이 스쿼트를 조지는 크레톤.
그 박력에 마왕성이 들썩들썩한다.
* * *
가이아에 도착한 강철남과 멍구.
“철남이, 이건.”
“그래. 상상 이상으로 황량하구만.”
풍요의 땅 가이아.
기대했던 싱그러운 과일 향 따윈 없었다.
맛있는 빵 굽는 냄새도 개나 줘 버렸다.
상점가는 휑했다.
좌판에 내놓을 물건이 없으니 상인들은 장사를 하지도 못했다.
대신 모조리 밭에 나가 상납할 작물들을 캐느라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거 뭐 하나 사 먹을 분위기가 아닌걸.”
멍구는 기대가 바사삭 부서지는 기분에 끼잉, 대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멍구를 질질 끌고 따스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무작정 걸었다.
새순이 푸릇푸릇 돋아나는 곳을 보니 계절이 봄인 1지구인 모양이다.
“이보슈, 잠깐 말 좀 물읍시다.”
강철남은 부단히 움직이다 잠시 휴식 중인 한 농부에게 다가간다.
가까이서 보니 염소 수인이다.
그는 인간인 강철남을 보자 놀란다.
“당신은 무슨 종이요? 처음 보는 종이구만.”
“나는 인간입니다.”
“인간? 말로만 듣던 그 인간? 이 마계까지는 어쩐 일이요?”
“가이아의 곡물과 과일의 맛이 훌륭하다고 해서 머나먼 길을 왔소. 혹시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데가 있소?”
염소 농부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먼 길 오셨는데 참으로 유감이오. 지금은 시기가 적절치 않구랴.”
“크레톤 때문이오?”
“쉿! 그 이름을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되오!”
“그 녀석이 그렇게 많이 가져가는 거요?”
“손님에게 대접도 못 할 정도니 말 다 한 거 아니겠소.”
힘 빠진 어깨가 축 늘어져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같다.
“크레톤 놈들에게 이런 식으로 수탈당하는 나라는 얼마나 많소?”
“당신은 손가락이 참 많구려. 불행히도 그 손가락으로도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라오.”
마왕의 통치하에 있는 가이아마저 이 정도라니.
나르딘과 마찬가지로 크레톤에게 맞서 싸울 힘이 없다는 것이로군.
하물며 다른 국가들은 오죽하겠나.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여기 마왕 가이아는 뭐 하는 거요?”
“어허! 마계 물정 모르는 인간은 이래서 무섭다니까. 말조심하시오. 누가 들을까 무섭소.”
염소 수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연다.
“크레톤의 사천왕. 그놈들이 어찌나 강한지 가이아 님 혼자선 당해 낼 수 없을 정도라 하오. 이 도시를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항쟁했지만 크레톤의 대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오. 심지어 정작 마왕 크레톤은 나서지도 않았는데 말이오. 가이아 님은 백성들을 생각해서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항복을 하고 곡식과 과일을 상납하기로 결정하신 거요.”
“듣기로는 크레톤이 가이아를 데려가겠다고 하던데.”
“아니, 대체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거요?”
마왕 카르텔한테 들었다고 하면 믿어 주려나.
그냥 입 다물고 있자.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라고 하오.”
“뭐가 말이오?”
“기일의 마지막 날. 오늘 사천왕이 총출동해서 가이아 님을 끌고 갈 것이오.”
“그래서 이렇게 초상집 분위기로구만.”
딸기를 수확하고 봄나물을 캐는 농부들의 낯빛이 어둡다.
다들 곧 사천왕이 들이닥쳐 그들의 지도자를 납치해 간다는 근심과 걱정에 떨고 있는 것이다.
“마왕이 없으면 농사가 안 되나?”
“두말하면 입 아프지! 이 풍작의 땅 가이아는 마왕님의 힘으로 풍요의 결실을 맺는단 말이오.”
“가이아의 힘?”
“그렇소. 마왕 가이아 님의 힘은 그야말로 대지의 힘. 땅 밑에 고이 묻혀 있는 대지의 힘을 그분만의 마력으로 이끌어 내 풍요로운 농작물을 일으킨단 말이오. 그 힘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점지해 준 특별하고도 신성한 힘이지.”
“그런 양반이 왜 납치를 당하오?”
“그만큼 강한 놈이라오, ‘그놈’은.”
이 땅의 작물들은 마왕 가이아가 대지와 힘을 주고받아 상생하며 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흉폭하고 사악한 크레톤의 손아귀에 풍작의 땅이 유린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가이아가 사라진다면 이곳은 곧 흉작의 대지가 될 터이다.
“멍구야, 일어나라.”
퍼질러져 있는 멍구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강철남.
뭔가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움냐… 왜, 밥 있대?”
“지금은 없대.”
“그럼 어딨대?”
“밥그릇, 빼앗으러 가자.”
강철남은 마왕성으로 향한다.
핍박받는 농민들을 위해?
천만에!
맛있는 한 끼를 위해.
내 밥그릇은 내가 지킨다.
가자, 강철남. 최고의 빵과 과일을 처먹기 위해 사천왕을 무너뜨리자.
필요하다면 크레톤이라는 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