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차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이 개새들아!
생각과는 다른 이미지였다.
차의 도시라면 푸릇푸릇한 차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일 줄 알았건만.
뭔가 잿빛에 침울한 분위기다.
일단 가까운 찻집에 들어가 보자.
딸랑 방울 소리를 울리며 문을 들어서니 생쥐 수인인 주인장 할머니가 맥없이 반겨 준다.
“어서들 오시구랴. 이방인인가?”
“그렇소. 차를 좀 마시고 싶소만.”
“아이고, 이걸 어째.”
“무슨 일이죠?”
“지금 차를 대접해 줄 형편이 아니라서.”
할머니가 쭈뼛쭈뼛 대답한다.
그 소리에 멍구가 급발진을 하는데,
“아니, 할망! 찻집에 차가 없다니 무슨 소리요? 미친개 환장하는 꼴 보고 싶어?!”
조용히 꿀밤을 먹여 주는 강철남.
“무슨 사정이 있소?”
“그게, 오늘이 수납일이라 모조리 가져가 버렸수다.”
“수납일? 누구한테 갖다 바친다는 말이오?”
“우리 도시는 기일에 맞춰 크레톤에게 차를 상납해야 한다우.”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크레톤의 마수가 여기까지 퍼지다니.
마왕 놈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그건 상관없다.
식후에 맛있는 차를 마실 생각에 한껏 기대에 부풀어 왔건만 그 꿈을 짓밟아?
이건 못 참지.
“그 크레톤 놈들은 언제 오는 거요?”
“응? 아, 도망가게? 잘 생각했수. 그렇지 않아도 지금 중앙 광장에 모여 있을 거라우. 조용히 나가면 아무도 모를 거유.”
마음씨 착한 생쥐 수인 할머니는 사탕을 강철남에게 쥐여 주며 바깥으로 안내했다.
“먼 길 오셨을 텐데 차 한 잔 대접 못 해 드려서 미안하우.”
사나이 강철남.
이토록 뜨거운 마음은 오랜만이다.
이 불 끓는 마음을 저 파충류 새끼들의 간악한 대가리를 잘라 바쳐 보답하리.
“멍구, 가자.”
“오케이!”
강철남과 멍구는 중앙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만류하는 할머니는 끝까지 따라왔고 결국 광장까지 함께 오고야 말았다.
“아이구, 난 몰라. 녀석들이야.”
중앙 광장에 도착하니 어마어마한 물량의 찻잎이 나무 상자에 잔뜩 실려 있었다.
거대한 드래곤들이 그것을 수송하기 위해 몸에 하네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아주 꾼이네 쌉새끼들.”
“말이 수납이지 그냥 약탈이잖아. 철남이, 쳐들어가기 전에 멋진 대사 없어?”
“있지, 왜 없어.”
강철남은 그들 앞에 섰다.
그리고 큰 소리로 부르는데,
“야! 동작 그만.”
그 소리에 드래곤들이 눈을 부라리며 째려본다.
총괄 관리자로 보이는 용족 수인이 나타난다.
키는 2m 조금 넘으며 근육 덩어리의 몸매.
머리는 용, 몸은 사람이고 피부는 녹색 비늘로 덮여 있었다.
돋아난 날개는 비늘이 날카로워 칼날과도 같았으며 손톱은 말 그대로 톱 그 자체였다.
[용족 수인
레벨: 198
마력: SSS++
힘: SSS++
맷집: SSS++
속도: SSS++]
“오올, 새끼 좀 치는데? 트리플 S 투플이야.”
“상관없어. 조진다.”
강철남이 가까이 다가오자 용족 수인도 마주 다가온다.
“인간 아니냐?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 거지?”
발톱을 강철남의 턱 밑에 들이밀면서 위협한다.
하지만 전혀 동요가 없다.
“누구, 인간이 먹고 싶으면 먹도록 해라.”
녀석이 선심 쓰듯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러자 거대한 드래곤이 침을 흘리며 달려온다.
“에구머니나, 어떡해!”
“도, 도망쳐!”
“안 돼!”
생쥐 할머니와 시민들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끔찍한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현실이 되었다.
드래곤의 머리가 토마토처럼 으깨어졌으니까.
“끼에엑!!”
인간의 비명이 아닌 드래곤의 비명.
용족 수인이 설마 하는 눈으로 돌아본다.
“넌 대체 정체가 뭐냐?”
“자연인 강철남이다.”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인간.
박치기로 용족 수인의 마빡을 날려 버린다.
“크악!”
쓰러진 녀석의 싸대기를 수차례 갈겨 준다.
“그, 그만! 그만!”
“말이 짧다?”
“그, 그만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녀석이 애걸복걸하고서야 마침내 강철남의 손찌검이 멈췄다.
나머지 드래곤들은 이미 멍구에게 두들겨 맞아 무릎을 꿇고 찌그러져 있다.
“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마실 차를 너네가 다 뺏어 갔잖아.”
“그, 그럼 차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매듭지으면 안 되겠습니까?”
강철남은 싸대기를 한 대 더 날려 준다.
쫙—
“끄악!”
“양아치 새끼네 이거. 꼴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 그리고 다신 여기 오지 마.”
“그, 그치만…….”
“꺼지라는 말 못 들었어? 삼, 이, 일!”
“다, 당장 꺼지겠습니다!”
용족 수인은 헐레벌떡 드래곤들을 이끌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멀리 사라져가는 용족을 보면서 나르딘의 시민들은 안도했다.
“저기 어르신의 존함을 여쭈어봐도 되는지요?”
고양이 수인 한 마리가 와서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묻는다.
“어르신 아니야. 나는 강철남이다.”
“나는 멍구.”
“강철남 님과 멍구 님. 저는 나르딘의 대표 7대 나르딘입니다.”
“7대?”
“네 맞습니다. 저희 나르딘은 민주주의로 100년에 한 번씩 투표로 도시의 대표를 정하지요. 선출된 자는 나르딘으로서의 새 이름을 부여받게 됩니다.”
“100년이라. 인간들 기준에서는 X나 심각한 독재구만.”
“저희를 구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르딘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자 다른 시민들도 함께 고개를 숙인다.
“고개들 드시오! 나는 이런 거 딱 질색이니까 편하게들 대해 줘요.”
“실례가 안 된다면 강철남 님께서는 어디에서 오신 분이신지요?”
“나? 나 북한산에서 왔는데.”
“그렇다면 오늘부로 우리 나르딘은 북한산의 산하에 속하는 셈이로군요.”
뜬금없이 북한산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나르딘.
“아니, 잠깐만. 왜 또 누구 밑으로 들어갈 생각인 건데? 자립할 생각은 없어?”
“보시다시피 저희는 차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비전투 마물들입니다. 크레톤과 같은 무력 국가들이 쳐들어오면 홀로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뒤를 봐줄 세력이 필요한 것이죠.”
“그러니 이제 나한테 뒤를 봐 달라?”
“원하시는 상납 조건을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맞춰 보겠습니다.”
강철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지고 들어가려는 그들의 마음이.
“싸워나 봤어?”
“피해만 커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강해지면 되지.”
“네? 저희가 어떻게.”
강철남은 조용히 드래곤을 가리켰다.
“오늘은 저 녀석으로 잔치를 벌이지.”
“네? 하지만 저건 강철남 님의 전리품이지 않습니까. 마계의 규칙상 전리품은 함부로 가로채는 게 아닙니다.”
“내 거 내가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말이 많아. 닥치고 처먹어.”
“예, 예엡!”
나르딘은 도시의 경비를 담당하는 전사들을 모아 드래곤의 고기로 잔치를 베풀었다.
생전 처음 맛보는 드래곤의 고기에 전사들은 눈이 뒤집히며 환장했다.
그리고 그들로서는 꿈에도 못 꿀 가공할만한 힘을 얻게 되었다.
“철남이, 얘네들 아직 약한데.”
“당연하지. 드래곤 고기 좀 먹은 것뿐이니까.”
멍구의 냉철한 평가에 시무룩해진 전사들.
“조만간 크레톤 녀석들이 다시 올 거야. 그동안 머리털 빠지도록 수련해.”
“탈모라니 스읍, 그건 좀.”
“뒤질래?”
“아닙니다. 그깟 머리털쯤이야. 대머리가 될 정도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전사들은 성실했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는 나르딘의 전사들.
도시를 지키기 위해 힘을 키운다.
그사이 드디어 고대하던 나르딘의 차를 맛볼 수 있게 된 강철남과 멍구.
“차를 대접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우.”
생쥐 할머니는 정성스레 차를 우려 둘에게 대접한다.
사시사철이 뚜렷한 나라 나르딘.
봄기운을 잔뜩 받은 찻잎을 수확해 장인이 덖은 우전 녹차.
섭씨 70도의 물로 천천히 우려내어 고운 연두색 빛깔이 은은히 감돈다.
“그럼 잘 마시겠소.”
강철남과 멍구는 주변의 고요함을 느끼며 차를 한 잔 홀짝인다.
따뜻한 봄기운이 몸에 퍼져 나간다.
구수하고 은은한 녹차 향이 코를 맴돌고 산뜻한 풀 맛이 혀 뒤를 어루만지며 넘어간다.
여태 맛본 어떠한 차와 비교할 수가 없다.
최고의 차 맛이다.
“여기까지 오길 잘했군.”
“아이구, 고마워라.”
좋은 차와 친절한 미소.
이보다 더 좋은 휴가가 있을까.
강철남은 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쿠콰쾅!!
굉음과 함께 땅이 울리며 차가 다 엎어진다.
그리고 바깥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당장 나와라, 인간! 있는 거 다 알고 왔다! 나는 크레톤에서 온 용족 키켈. 비겁하게 숨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키켈은 창을 휘두르며 중앙 광장에서 힘을 과시했다.
그가 타고 온 드래곤은 입에서 화염 구슬을 모으며 한 번 더 소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
“한 방 더 쏴 주지.”
“크아앙!”
드래곤이 화염 구슬을 발사하려는 찰나,
“이 썅노무새끼!”
멍구가 달려와 드래곤의 턱주가리를 들이받아 버린다.
[키켈
레벨: 284
마력: R
힘: R
맷집: SSS+++
속도: SSS+++]
“오올. 새끼 R랭크가 두 개네. 좀 치는데?”
뒤이어 강철남이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가랑이가 흥건히 젖어 있다.
“훗. 드디어 납셨나. 바지가 축축한 걸 보니 지렸나 보지?”
“네놈 덕분에 차를 빤스로도 다 마셔 보는군.”
좋은 차는 또 마실 수 있다.
그러나 차를 즐기는 좋은 분위기는 쉽게 오지 않는다.
강철남이 용서할 수 없는 부류,
바로 식사를 방해하는 새끼.
차 한 잔의 여유를 방해한 것도 마찬가지다.
“내 평화를 깬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네가 크레톤에게 대항한 죄도 혹독할 것이다.”
[화염창]
키켈의 창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강철남을 향해 창을 휘두르자 어마어마하게 뜨거운 화염 기둥이 치솟았다.
“어떠냐, 인간. 용족의 타고난 마력을 인간 주제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승리를 확신하는 키켈.
그러나,
“이게 최고온이냐? 지금 내 속은 더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다, 새꺄.”
“뭣? 아니, 어떻게 그걸 견디는 거지?”
당황한 키켈.
정신을 가다듬고 창끝을 세운다.
“죽을 때까지 태워 주마.”
다시 화염창을 발동하여 깊게 창을 찔러 넣는 키켈.
하지만 강철남은 창을 맨손으로 잡는다.
“말했지. 너 때문에 속에서 불이 난다고.”
“젠장!”
강철남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손에 쥔 창이 뜨겁게 달궈진다.
이내 창 손잡이를 잡고 있는 키켈의 손이 녹아 버리고 만다.
“크아악!”
뒤로 발라당 넘어져 버리고 강철남이 그 앞으로 우뚝 다가섰다.
“이, 이 괴물 녀석.”
“가서 크레톤에게 전해라.”
“뭐, 뭐?”
“내가 곧 갈 테니 이쪽으로 올 필요는 없다고.”
흠씬 두들겨 맞은 키켈이 돌아가고 나르딘은 다시 평화를 맞이했다.
“내가 방문할 거라 했으니 이제 녀석들이 여기로 오는 일은 없을 거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철남 님. 저희를 위해서.”
“무슨 헛소리야?”
“네? 저희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크레톤에 간다고…….”
“물론 크레톤으로 갈 거다. 그 전에 가이아도 들릴 거고.”
“어째서요?”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
“그렇다면 저희 나르딘을 구한 것도.”
“그래, 내가 마실 차를 지키기 위해서다.”
강철남은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어조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말을 하건 나르딘의 시민들은 상관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악랄한 크레톤의 마수로부터 벗어났으니까.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말씀은 차갑게 하시지만 사실은 따뜻한 마음으로 저희를 구해 주셨다는 걸.”
“아니래두.”
손을 내젓는 강철남.
그때, 찻집의 생쥐 할머니가 다가와 감사를 표한다.
“고맙수, 정말 고맙수.”
“뭐. 좋은 차 마신 답례를 한 것뿐이오.”
이런 분위기는 별로 안 좋아한다.
그만들 돌아가라고 실랑이를 한 끝에 시민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나르딘을 떠나기 전 선물용으로 차를 구입하려 했다.
한사코 돈을 안 받으려는 상인들과 옥신각신했고 결국 그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기쁩니다. 나르딘을 구해 주신 은인을 위해 보답을 해 드릴 수 있어서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상인들로부터 받은 소중한 찻잎은 멍구가 멘 가방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나르딘의 몬스터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강철남과 멍구는 그곳을 떠났다.
“이제는 가이아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