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몬스터 새끼들, 대가리 박아
“크으. 이거 진짜 용도 잡겠는데. 철남이, 다음에 용을 잡을 땐 아가리에 이걸 처넣으면 되겠어.”
멍구가 고개를 부르르 떨면서도 술에서 입을 떼지 못한다.
“다음에 용을 잡을 때라니, 혹시 두 분께서는 용을 잡으신 적이 있습니까?”
“요 며칠 전에 인간계에 나타난 녀석을 잡아먹긴 했었지.”
“녀석의 특징이랄 게 있었습니까?”
“비늘이 붉은 레드 드래곤. 아, 그러고 보니 녀석이 마왕 크레톤과 승부를 벌이겠다나 뭐라나.”
기억을 더듬는 강철남의 말을 잠자코 듣던 카르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마 녀석은 마왕에게 도전하려던 녀석이었던 모양입니다. 크레톤에서는 마왕에게 대결을 신청하고 만에 하나 이길 경우 마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어 있죠.”
“제법 혁신적이군.”
“다만, 여태 아무도 권력 교체를 이뤄 낸 자가 없을 뿐이죠.”
“뺏을 수 있으면 뺏어 보라는 건가. 크레톤 녀석, 화끈한 면이 있군.”
강철남은 용살주를 홀짝인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 따끔따끔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술이다.
“그나저나 마왕에게 도전하겠다는 드래곤을 쓰러뜨리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강철남 님.”
“말만 번지르르했지 약한 녀석일 뿐이었소.”
“마왕에게 도전하겠다는 말은 허세로라도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강철남 님은 이미 저보다 강한 존재라는 걸.”
조금 뜨끔한 강철남이었다.
그 강함의 원천에 카르텔의 꼬리로 뱀술을 담가 마신 내역이 있으니까 말이다.
조용히 닥치고 술이나 마시자.
“강철남 님. 크레톤은 정말 강합니다. 저는 마왕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축에 속하니 비할 바가 아닙니다. 녀석의 힘은 가늠이 안 될 정도입니다.”
카르텔은 겸손이 아니라 정말 강철남이 걱정된다는 듯 일러 주었다.
“그저 맛집 탐방일 뿐이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강철남, 카르텔, 멍구는 술잔을 부딪치고 건배했다.
어느새 용살주 한 병을 다 비우자 카르텔은 다른 술을 주문했다.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신라주가 있습니다. 한 모금 마시면 온갖 꽃향기와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은은한 솔 내음이 온몸에 스며든다는 평이 있죠.”
“오호. 이건 크레톤의 술 장인이 빚은 술이 아닌가?”
“역시 카르텔 님이십니다. 어렵게 공수한 술이죠.”
살쾡이가 알아주어서 기쁘다는 듯 웃는다.
“주인장, 대체 이런 건 어떻게 구하는 거요?”
“흐흐. 그건 영업 비밀이지.”
강철남이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는다.
살쾡이의 수완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잔을 채워 볼까요? 오늘은 내가 전부 살 테니 마음 놓고 마셔 봅시다.”
“그럼 거절하지 않지.”
강철남은 잔 속에 담긴 술의 빛깔을 보았다.
투명한 듯하나 그 안에는 은은한 황금빛 노을이 잠들어 있는 듯한 빛깔이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잔을 들어 코를 가져다 대니 숲을 담가 놓은 듯 푸릇푸릇한 향이 올라왔다.
조심스레 입술을 담그고 한 모금 맛을 보는데,
들판의 꽃향기가 입과 코로 밀려오는 듯한 황홀한 감각이었다.
“어떠십니까?”
“이거다.”
“네?”
“역시 크레톤으로 가서 이 술 장인을 만나 봐야겠어.”
“하하하. 무척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멍구, 어때? 끝내주지 않냐?”
강철남이 멍구를 돌아다봤을 때 멍구는 이미 눈을 뒤집고 해롱해롱 술 향기에 취해 있었다.
“완전 개가 되었군.”
그야말로 개도 개로 만들어 버리는 극상의 맛이었다.
“카르텔. 혹시 훌륭한 술에 어울리는 안주는 마계 어디로 가야 구할 수 있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인 강철남.
여유롭게 술을 음미하는 카르텔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그야 당연히 가이아 아니겠습니까.”
“가이아?”
들어 본 적이 있다.
카르텔의 3지구에서 가이아에서 공수해 왔다며 과일을 파는 상인이 있었다.
“가이아는 농업 도시입니다. 극상의 곡식과 과일이 자라는 축복의 도시죠.”
“축복의 도시라.”
“하지만 과거의 영광일 뿐이죠.”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르텔은 술잔을 비우며 말을 이었다.
“크레톤이 가이아를 침공했기 때문이죠.”
“독차지할 만큼 존맛이었나?”
“그 이유도 있습니다. 상품성이 높은 가이아의 곡식과 과일은 수요가 많으니까요.”
“그렇다면 가장 큰 이유는 뭐지?”
“마왕 가이아입니다.”
마왕 가이아.
마계에서 가장 강한 여성으로 알려진 그녀는 본디 엘프의 핏줄로 태어났으나 초대 마황제의 눈에 들어 마왕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엘프들에게 미움 받겠군. 그런데 가이아와 크레톤이 무슨 관계길래?”
“크레톤은 가이아를 신부로 맞아들이고자 합니다.”
“뭐? 여자 하나 차지하겠다고 전쟁을 벌여?”
“하하하. 인간의 역사에도 그런 사례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클레오파트라라는 한 여성 때문이었죠?”
카르텔은 이해한다는 듯 말했지만,
강철남은 달랐다.
“등신이군.”
“네? 하하. 그렇죠. 여성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아니, 그 말이 아니야.”
“그럼 무슨 말씀이신지.”
강철남은 신라주의 향을 음미하면서 혀를 입안에서 굴렸다.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등신이라는 거야.”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은 카르텔.
그러나 강철남의 굳은 의지가 서린 목소리에 따지고 물을 수가 없었다.
다만, 취기가 잔뜩 오른 멍구만이,
“결혼하고 이혼까지 한 너는 상등신이네, 킬킬.”
이런 소리를 지껄여 대판 싸움을 벌인다.
역시 술판은 깽판으로 마무리되는 법.
카르텔은 마왕 체면이고 뭐고 졸지에 만취자 둘을 데리고 시장을 부랴부랴 빠져나가야 했다.
* * *
다음 날 아침.
뜨끈한 구들에서 등을 지지며 멍구와 강철남이 퍼질러져 있다.
소변이 마려워 방광이 터질 것 같지만 훈훈한 방의 온기가 따뜻하게 감싸 주니 일어날 수가 없다.
결국 한계에 임박했을 때 문을 여는 강철남.
벌컥—
“우왁 씨! 놀래라!”
문을 여니 텃밭에 철갑 두더지가 감자 몇 알을 캐고 있었다.
겨울이지만 강철남과 멍구의 비료를 받으며 씩씩하게 자란 작물들.
농사에 도가 튼 손길로 강철 두더지가 정성스레 수확한다.
“두더지 양반. 당신이 왜 여기에?”
“카르텔 님이 돌아가는 길에 부탁하셨지. 당신들에게 남길 메시지가 있다고.”
“메시지? 뭐요?”
“술 장인을 만나러 간다면서? 저기, 카르텔 님이 추천서를 써 주셨네.”
철갑 두더지가 가리킨 마루에는 종이 한 장이 돌멩이에 깔려 있었다.
강철남이 종이를 읽어 보니 강철남은 카르텔의 보증하에 신의가 두터운 인물로 거래를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것 참 고맙군. 그런데 자네는 어째서 여기서 밭일을 하고 있나?”
“약속을 지키러.”
“약속?”
“차 한 잔 대접해 주기로 했잖나.”
그제야 생각난 듯 머쓱히 웃는 강철남.
급한 소변을 해결하고 개울가로 가 세수부터 한다.
그사이 철갑 두더지는 감자를 삶고 강철남은 백도라지를 꿀에 재워 만든 도라지청을 푹 떠 뜨거운 물에 우려낸다.
“멍구야, 좀 일어나라!”
찰싹—
게으르게 빈둥대는 멍구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그제야 침을 질질 흘리며 일어나는 멍구는 머리를 감싸 쥔다.
“철남이, 꿀물 좀.”
“이놈의 개가 가지가지 한다.”
따뜻한 구들의 온기를 누리며 셋은 백도라지 차를 마셨다.
“참 좋군. 기관지가 뻥 뚫리는 느낌이야.”
“산에서 나는 게 제일이지.”
“으아! 이제야 술이 좀 깨는구만.”
각자 자기 방식대로 차의 맛을 표현하는 셋.
“가이아로 갈 셈인가?”
“그렇다네.”
“그렇다면 나르딘이라는 작은 도시도 한 번 둘러보게.”
“나르딘?”
“차가 유명한 곳이지. 이렇게 좋은 차를 즐기는 자네라면 필히 좋아할 만한 곳이네.”
철갑 두더지가 추천한 나르딘이라는 작은 도시는 가이아로 가는 도중에 들릴 수 있다.
차 도시로 유명한 그곳은 마계에서 으뜸가는 차 수출국이다.
“꼭 들리지.”
여행을 떠나기 전날 고요한 외풍을 피해 차를 마시며 한적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강철남이 거대한 무쇠 팬을 등에 짊어지고 길을 떠나려 한다.
마침 헌터 연합회에서 백진섭과 한지영이 배웅을 해 주러 왔다.
“강철남 씨, 모쪼록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전쟁 나가나? 그냥 놀러 가는 거야.”
“요즘 같은 시대에 강한 힘을 가진 자는 항상 사건에 휘말리는 법입니다.”
“듣던 중 가장 섬뜩한 말이로군.”
백진섭은 강철남으로부터 북한산의 권한을 인계받았다.
악수로 그를 배웅하며 그의 안전을 빌었다.
“철남 씨, 잘 다녀오고 선물 사 와요.”
“대왕 지네의 머리통에 흥미 있나?”
“됐거든요.”
“다녀오지, 그리고.”
“네?”
“많이 강해졌어. 이 산을 잘 부탁해.”
“네에.”
얼굴을 붉히는 한지영.
쑥쓰러워 괜시리 멍구만 쓰다듬는다.
다름 아닌 강철남으로부터의 인정이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헌터들에게 북한산을 맡기고 본격적으로 여행길에 오르는 강철남.
구멍이 있는 정상으로 오르니 몬스터들이 북적인다.
“뭐야?”
“아이고, 강철남 님 오셨습니까?”
마왕 카르텔의 방문으로 그의 입지와 힘은 이미 북한산에 널리 알려졌다.
그 탓에 몬스터들이 굽신거리는 것도 당연지사.
“아침부터 왜 버글버글 몰려 있어?”
“그게 웬 스켈레톤 녀석이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그 소리를 듣고 구멍으로 가까이 가 보니 웬 뼈다귀 새끼가 몬스터들을 줘 패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내가 이 산의 주인이 될 것이다! 방해 마라!”
“이 미친놈아! 지금 이 산의 주인은 네가 상대할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지금이라도 조용히 돌아가.”
난동을 부리는 해골바가지와 그를 만류하는 몬스터들.
사람 사는 꼬라지와 다를 바가 없다.
“기분 좋게 떠나는 여행길에 소란이라니. X나 거슬리는구나.”
“인간? 푸하하. 인간 주제에 지금 몬스터들의 싸움에 끼어드는 거냐?”
강철남의 등장에 비웃는 녀석은 오로지 스켈레톤뿐.
나머지 몬스터들은 X됐다 싶은 생각에 뒷걸음질을 친다.
이 북한산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삼 초 준다. 얌전히 구멍으로 꺼져라.”
“나는 이 초 주지. 얌전히 바닥에 기어라.”
“삼.”
“커헉!”
빠각—
스켈레톤의 두개골이 박살 난다.
가루가 된 머리통은 바람에 날려 유유히 흩어졌다.
“앗싸, 개껌 득템!”
멍구가 스켈레톤의 정강이뼈를 콱 물고 발발거린다.
“너희들 얌전히 지내라.”
“예, 예!”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몬스터들을 향해 경고를 날리는 강철남.
그 포스에 눌려 얼떨결에 약속을 해 버리고 마는 몬스터들.
“앞으로 어떡하지?”
“뭘 어떡해. 얌전히 시장에서 게임이나 하면서 지내자.”
“하, 시바 하필 산을 잘못 골라 가지고.”
몬스터들은 아쉬움에 투덜댔다.
강철남과 멍구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 마계로 도착했다.
“이 칙칙한 곳은 몇 번을 와도 적응이 안 되는군.”
“철남이, 그럼 철갑 두더지가 말한 나르딘부터 가 볼까?”
“그래, 우선 이 황무지부터 벗어나자고.”
[광속]
[광속]
폭발하는 스피드로 나르딘을 향해 달리는 둘.
하지만 그들의 여행길이 순조로운 것은 딱 여기까지 였으니,
“인간과 개가 마계에 있다니. 건방지구나!”
웬 드래곤 한 마리가 나타나 입을 쩍 벌리고 막아섰다.
“멍구, 우리는 숨만 쉬어도 잘못한 거냐.”
“아니, 개빡치네. 철남이. 여기서 점심 한 끼 해결하자.”
“무슨 헛소리를…….”
쿠왕!!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강철남이 발뒤꿈치로 드래곤의 목뼈를 박살 낸다.
눈이 뒤집히며 즉사하는 드래곤.
바로 드래곤의 목살을 잘라 커다란 무쇠 팬에 올리는 강철남.
마력을 끌어 올려 불을 지핀다.
“우와, 너 이제 불도 지필 줄 아는 거야?”
“넌 안 되냐?”
“있어 봐. 한번 해 볼게.”
멍구는 입을 쩍 벌리고 하악 하악, 소리를 내 본다.
“X불, 왜 나는 안 돼?”
“연습하고 있어.”
강철남이 고기를 구울 동안 멍구는 옆에서 열심히 헤엑, 헤엑 대면서 불을 뿜는 연습을 한다.
멍구가 개지랄을 떠는 동안 마침 고기가 미디엄 레어로 맛있게 익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식사 시간이다.
드래곤 스테이크는 다른 어떤 고기보다 최상의 맛을 선사했다.
적당한 기름기에 터지는 육즙.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
부드럽게 이 사이로 녹아 들어가는 식감.
뭐 하나 빠질 맛 없이 훌륭했다.
“기름진 거 먹으니 개운한 차 한 잔이 당기는데.”
“얼른 나르딘으로 가자. 멍멍!”
식후 차의 여운을 잃기 전에 둘은 서둘러 차의 도시 나르딘으로 향했다.
철갑 두더지가 알려 준 방향으로 나아갔더니 예상대로 한 도시가 나왔다.
그런데,
“여기가 차의 도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