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엘프와의 작별
“역시 내 목이냐? 원한다면 가져가 봐라!”
“등신.”
강철남이 말을 하기도 전에 김성남이 또 혼자 급발진을 하고 멍구가 비웃는다.
홍태진이 말리고 강철남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없는 동안 북한산을 맡아 주시오. 구멍은 막지 말고.”
“네? 갑자기 무슨…….”
“여행을 다녀올 거요.”
예상 밖의 제안을 하는 강철남.
그때 그 말을 듣고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뒤늦게 도착한 엘프 세레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구멍을 막지 않겠다니.”
“말 그대로요. 우리가 돌아왔을 때 구멍이 막혀 있으면 안 되잖소.”
“구멍은 당신들이 편의로 이용하는 시설이 아니에요. 몬스터가 드나드는 혼돈의 원천이라고요.”
“그래? 그렇다면 결정은 이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강철남은 홍태진을 가리키고 고기를 더 굽는다.
난감한 입장에 처한 홍태진.
북한산의 구멍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인류의 장기적인 입장을 고려해 봤을 때 지금으로서는 드래곤의 소재를 얻어 힘을 키우는 것이 유리하다.
“좋습니다. 북한산을 관리해 드리죠. 구멍은 막지 않고요.”
“이봐요!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요?”
“잘 압니다! 하지만 역으로 구멍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헌터들의 수련 장소로써 활용도가 높을 겁니다.”
“궤변이군요.”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 인간들이 논의하고 결정할 문제입니다.”
홍태진은 조금 모진 말을 해야만 했다.
인간을 도와주러 온 엘프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 말이 맞는걸요. 딱히 당신들에게 감사받으려고 온 것도 아니니까.”
세레나는 한숨을 쉬고 툭툭 털어 냈다.
“이렇게 강한 인간이 있는데도 인간계는 왜 이렇게 내버려 두기 불안한지 몰라.”
“그 점은 확실히 동감입니다.”
둘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철남은 열심히 고기를 굽는다.
“세레나, 이제 가는 거요?”
“어머. 배웅이라도 해 주시려구요?”
“가지 마요.”
“네?!”
순간 당황한 세레나.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한지영이 그 광경을 노려보며 긴장감을 키운다.
무슨 영문일까.
조마조마했는데.
“구들 원위치시켜 놓고 가야지.”
“어휴, 증말!”
세레나는 마법으로 구들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 탓에 머쓱해져 구멍으로 바삐 걸어가는 그녀.
마계로 돌아가기 전에 강철남을 향해 한마디 해 준다.
“우리 엘프가 왜 인간을 도와주는지 알아요?”
“내 알 바요?”
“그냥 들어요. 마물들보다 얘기가 잘 통하기 때문이에요. 우린 자연과 생명들을 사랑하죠. 그런 마음은 인간도 우리랑 닮은 구석이 있죠. 많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만 선한 인간들도 아직 많다는 걸 믿고 있어요. 그래서 우린 인간계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하고픈 말이 뭐요.”
“인간계를 지켜 주세요. 그리고 혹시나 우리 엘프들이 위급해지면 손이나 거들어 줘요.”
“보상에 따라서.”
“그게 당신이 승낙하는 말투라고 이해할게요.”
구멍으로 사라지는 세레나.
헌터들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신화 속의 엘프를 직접 본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홍태진은 헌터들을 부려 드래곤의 소재를 챙기도록 했다.
강철남은 인간계를 떠날 것이다.
그가 없는 인간계는 헌터들이 지켜 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연습은 없다.
앞으로는 실전이다.
헌터가 무너지면 인류는 끝장이다.
“김 팀장, 황 팀장. 우리는 강해져야 해.”
“우리가 단련을 게을리하는 거 봤어?”
“그 말이 아니야. 인격적으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야.”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홍태진.
김성남과 황기민에게 이토록 진지하게 꾸짖은 것은 처음이다.
그들이 좀 더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성장한다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지영, 백진섭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실력보다 정의감이 앞선 터라 걱정이 되던 둘이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실력도 뒷받침되고 있다.
계속 성장해 나가자.
이제 인류는 헌터들의 손에 달렸다.
* * *
강철남과 멍구는 살쾡이 식당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마침 점심을 먹으러 나온 약재상의 비둘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천수 산삼을 사들였던 그때 그 비둘기다.
약방을 운영하는 비둘기답게 옛이야기에 빠삭했는데 흥미로우면서도 정보력이 상당한 이야기들이었다.
“크레톤은 애초에 무장 국가라 특산품이 없어.”
“그러면 뭘 먹고 살아?”
“용병 일을 하거나 전쟁을 하지. 특히 침략으로 인한 전리품이 끝내주게 많거든.”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상업을 하는 것도 아닌 나라 크레톤.
그들이 먹고사는 방식은 주변의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는 것이다.
“완전 개양아치 새끼들이네. 그런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둬?”
멍구가 매화주를 찹찹 핥으며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게 마계의 법칙이야. 어떤 식으로 살아남는 자가 정답이라는 거.”
“그럼 걔네들이 마계에서 제일 센가?”
“무력으로 따지자면 그렇지. 애초에 용족이니까.”
“용족이라면 드래곤?”
“일반적인 사족 보행 드래곤도 있지만 수인형 드래곤도 있어. 걔네들이 체구는 작아도 덩치 큰 드래곤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졌지.”
“그런 녀석들도 마계를 정복 못 하는 거야?”
“힘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천하통일이 아니니까.”
카르텔은 상업, 크레톤은 무력을 장점으로 내세워 각자 마계에서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주먹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제법 화끈해서 마음에 든다.
그러나 문제점은,
“거기서 드래곤을 잡아먹으면 불법인가?”
“극형에 처해질 거야.”
비둘기가 세상에 뭔 또라이 같은 질문을 하고 앉았냐는 눈으로 흘겨본다.
“그곳에 다른 별미는 없나? 전설의 술 장인이 있다고 들었네만.”
“유명하지. 그분의 술은. 워낙 그 솜씨를 탐내는 놈들이 많아 크레톤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들었어.”
“가장 안전한 곳이긴 하겠군. 문제는 그 술에 어울리는 안주를 찾는 일인데.”
강철남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했다.
드래곤 사냥이 불법이라면 대체할 반찬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때,
“뭐야, 어디서 구린내가 난다 했더니 인간이 한 마리 있구만.”
웬 처음 보는 호랑이 수인이 얌전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강철남에게 시비를 건다.
이제는 자연스레 몬스터 시장에 녹아든 강철남을 수상히 여기는 걸 보니 구멍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주인장! 왜 인간이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는 거지? 장사가 그렇게 어렵나?”
“하하하. 저야 돈만 내면 누구나 손님이죠. 이쪽에 안쪽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퉤! 필요 없어. 나는 인간이랑 한 공간에서 산소를 나눠 마시는 게 불편한 거라구.”
호랑이 수인은 땅에 침을 뱉으며 강철남을 노려본다.
“저, 저기. 이 인간은 헤쳐 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습니다요. 방해가 된다면 당장 자리를 떠나겠습니다.”
비둘기가 이 상황을 무마해 보려고 안절부절못하며 중재하려 했다.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그걸 왜 네가 판단하지?”
“히익!”
호랑이 수인이 노려보자 비둘기의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나는 호세 산적단의 차기 두목이다. 요즘 두목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이 아마 인간을 먹고 이 산을 내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쯤 인간계를 지배하고 계시겠지. 그렇다면 나도 그 뒤를 따라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선 강철남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쥔다.
“내 먹이가 되어 줘야겠다.”
살쾡이도 비둘기도 두 손만 꽉 모은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저, 저기!”
살쾡이가 뭐라고 말리려고 해 보지만,
“다음은 네 녀석 머리통을 터뜨려 주지.”
“아이고!”
녀석은 심기가 몹시 불편한 모양이다.
시장 몬스터들은 구경만 할 뿐이다.
드디어 성질 고약한 놈에게 걸려 저 인간이 죽는구나 싶었다.
“골수부터 마셔 주마.”
호랑이 수인이 손에 힘을 주는 그 순간이었다.
“제법 주목받고 계시는군요. 강철남 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목소린.
목소리의 주인이 다가오자 몬스터들의 입이 벌어지며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리는가 하면 곧바로 엎드려 이마를 땅에 부딪치는 몬스터도 있다.
그리고 이내,
모든 몬스터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다.
살쾡이도 쟁반을 집어 던지고 엎드려 조아리고 비둘기도 자리를 물러나 엎드린다.
“흐이잇?!”
뒤늦게 그를 알아본 호랑이 수인도 바닥에 엎드려 예를 갖춘다.
“하하하. 강철남 님. 아이들이랑 놀아 주고 계셨습니까?”
“놀아 주긴 개뿔. 방금 머리통이 아작 날 뻔한 거 못 봤어?”
“농담도. 저보다도 강한 분이 그렇게 약한 척하는 건 가끔 악취미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랑이 수인은 무릎이 떨렸다.
이 인간이 그렇게 강하다고?
아냐, 허풍일 거야.
그도 그럴 게 눈앞에 있는 자는,
마왕 카르텔이니까!
“그나저나 여긴 왜 왔수?”
“강철남 님을 뵈러 왔죠.”
“마왕이라는 양반이 한가하게 이런 곳까지 놀러 와도 되는 거야?”
“지도자도 가끔은 휴가가 필요합니다.”
카르텔은 강철남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오, 여행인가? 우연이군. 우리도 여행 얘기를 하고 있었어!”
“멍구 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그새 살이 붙으신 것 같군요.”
“개가 하는 일이 뭐 있겠어. 맨날 놀고 먹는 거지.”
멍구는 매화주에 알딸딸하게 취해 엎드려 풍류를 즐긴다.
“주인장, 여기서 제일 좋은 술로 한 잔 주게나.”
“네, 네!!”
살쾡이가 후다닥 가게 안으로 들어가 우당탕 소리를 낸다.
“여기 애들 좀 어떻게 해 봐. 체하겠어.”
강철남은 엎드려 있는 몬스터들이 거슬렸다.
“훗. 그러죠. 모든 마물들은 각자 볼일 보도록 해라. 이쪽은 신경도 쓰지 말고.”
그 말에 몬스터들이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장보기에 집중한다.
그렇게 굳은 얼굴들로 쇼핑하는 몬스터들은 처음 봤다.
“강철남 님에게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무슨?”
“구들을 3지구 시민들에게 설치해 줬더니 아주 반응들이 좋습니다. 뭐랄까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의 기운이 느껴진다랄까.”
“그건 네가 잘한 거야. 꿀팁을 말해 줘도 안 들어 처먹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하하. 여전히 겸손하시군요.”
살쾡이가 눈치를 보며 술을 내온다.
함을 열어 천에 친친 감긴 호리병이 드러나는데, 어째 불안하다.
“이, 이건 용살주라고 200도가 넘는 독주입니다. 하지만 그 맛은 다른 어떤 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미가 있죠.”
“음, 좋네. 주인장의 안목이 훌륭해.”
“감사합니다!”
살쾡이는 인사를 꾸벅하고 물러난다.
뒷걸음질 치면서 강철남에게 눈짓으로 ‘이게 대체 뭔 일이야?’라고 신호를 쏘아 보낸다.
강철남은 ‘이따 설명해 줄게.’라는 신호로 답한다.
“그나저나 여행이라뇨?”
“크레톤에 갈 생각이다.”
“크레톤이요…….”
카르텔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강철남 님. 죽을지도 모릅니다.”
는 개뿔.
강철남은 쥐뿔도 신경 안 쓴다.
“사람이 죽음을 피하려고 심심하게 살면 그게 곧 죽음이요.”
“하하하. 말씀 한번 잘하시는군요. 제가 이래서 강철남 님을 좋아합니다.”
도수 200도의 용살주를 잔 가득히 채우는 카르텔.
주당답게 호방하게 술을 쭉 들이켠다.
강철남은 자기 앞에 채워진 잔을 바라만 보다가 큰맘 먹고 원샷을 때린다.
꼴딱—
“키야아! 이거 진짜 사람 잡겄네.”
“하하. 그런 맛으로 마시는 술이죠. 어떠십니까? 더 당기지 않습니까?”
“확실히 부정할 수 없군. 더 마시세.”
그들은 다시 잔을 채웠다.
멍구도 잔에 용살주를 가득 채워 혀로 할짝 맛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