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남자의 로망
세레나가 눈보라를 일으키자 주변 공기가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냉해로 시들어 버리고 땅은 단단하게 얼어 굳어 버렸다.
“철남이, 갑자기 에베레스트가 됐는데.”
“이제 곧 단풍 구경 시즌인데 뭐 하는 짓이야!”
강철남은 눈보라를 뚫고 세레나에게 달려들었다.
[장벽]
그녀가 마법을 부리자 허공에 단단하고 투명한 막이 생성된다.
마치 방탄유리와 같은 벽이 생겨 달려드는 강철남을 가로막는다.
“야, 문 열어!”
“씨벌, 요술을 부리는구마잉.”
멍구는 ‘눈’으로 세레나의 상태창을 확인해 본다.
[세레나
레벨: 98
마력: SS
힘: CC
맷집: BB
속도: S]
“철남이, 저년 법사캐야! 유리 몸이라고! 적당히 살살 조져.”
세레나는 웬 개가 적당히 하라는 둥 자신을 얕잡아 보자 자존심이 상했다.
“감히 엘프를 뭐로 보고.”
[불길]
멍구를 향해 강한 불길을 내뿜는 세레나.
뜨거운 화염이 덮쳐 오자 강철남은,
“에잇!”
세레나가 만든 투명 장벽을 들고 와 불길을 막는다.
“어떻게 내 장벽을 들고 다니는 거지?”
“내가 산불 조심하라고 했지!”
산의 꼴은 엉망이었다.
나무는 얼어붙고 들풀들이 불길에 그을려 훼손이 심각했다.
강철남은 자연인으로서 이건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는 꼬라지였다.
쨍그랑!
분노에 찬 그의 악력에 투명 장벽이 깨지고 만다.
“세상에, 내 장벽을 한 손으로 깨뜨리다니!”
압도적인 힘에 멘탈이 흔들렸지만 세레나는 다시 손을 뻗어 마법을 부릴 준비를 한다.
하지만 선수를 치는 강철남.
[지진]
쿵!
땅이 흔들리며 세레나는 중심을 휘청이다 넘어지고 만다.
“말도 안 돼! 초상위 마법 지진을 쓴다고?”
지면의 에너지를 뒤흔들어 땅을 요동치게끔 하는 초상위 마법인 지진.
아직 세레나조차 쓸 수 없는 지진 마법을 어째서 인간이 쓴다는 건가.
“무슨 마법?”
그러나 사실 강철남이 일으킨 지진은 마법도 뭣도 아니다.
그저 땅을 세게 밟아 흔드는 것일 뿐.
힘으로 일으킨 눈속임일 뿐이다.
“꺄앗!”
세레나가 넘어지자 다른 엘프들이 그녀를 에워싼다.
기회를 엿보던 멍구는 엘프들을 뒷발로 뻥 걷어차 구멍 저편으로 날려 버린다.
“다시는 기어 나오지 마!”
필사적으로 구멍에서 나오려는 엘프들을 앞발로 뚝배기를 조지며 가둬 놓는 멍구.
와중에 강철남은 세레나에게 다가간다.
“당신, 인간이 아니군요.”
“인간이다. 자연‘인’ 강철남.”
강철남은 세레나의 손을 잡고 그녀를 조심스레 일으켜 준다.
“동정을 베푸는 건가요? 여자라고 배려받는 건 딱 질색…….”
“뭔 개소리냐?”
“네?”
“수플렉스 하려면 일어서야지.”
“수플… 뭐요?”
백문이 불여일견.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아니 한 번 당해 보면 금방 배운다.
강철남은 세레나의 허리를 끌어안아 허릿심을 이용해 그대로 뒤로 내던져 버린다.
눈보라로 얼어 딱딱하게 굳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세레나.
입에서 피를 뿜으며 기절하고 만다.
상황 종료.
북한산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런데 철남이.”
“왜?”
“우리 구들, 마법으로 바닥에 깔아야 하잖아.”
“아…….”
조져 놓으니 뒷일이 생각난다.
올겨울의 난방은 대자로 뻗어 누운 저 엘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 * *
간만에 집에서 맞이하는 상쾌한 아침이다.
집을 비운 사이 비료를 안 줬더니 농작물들이 풀이 죽어 있다.
“금방 주마.”
지퍼를 내리고 시원하게 물줄기를 쏘아 준다.
그러자 농작물들이 반갑다는 듯 고개를 든다.
뭔가 아침을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뭐라도 잡아먹으러 가 볼까. 멍구야, 사냥 가자.”
“푸짐하게 먹자. 생선도 먹고 사슴 구이도 먹고.”
둘은 저벅저벅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먼저 계곡으로 가 낚시를 한다.
이빨 달린 송사리들을 몇 마리 건져 내고 있으니 낯이 익은 붉은귀거북이 다가와 알은체를 한다.
“형님들. 오랜만이네요.”
“오, 너구나. 웬일이야? 우리 배부르게 해 주려고?”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그나저나 형님들 어디 다녀오셨어요?”
“마계에 잠깐. 왜?”
“역시. 형님들 안 계신 동안 여기 좀 X 됐었거든요.”
“뭐가 어떻게 X돼?”
“웬 커다란 몬스터가 나타나 깽판 쳤어요. 지금은 산 아래 인간들 땅으로 내려간 것 같지만.”
“그럼 됐네. 우리랑 상관없으니 패스.”
“…형님 인간 아니었어요?”
산 아래 사정이 어떠하건 강철남은 한가로이 자연인 라이프를 즐기고 싶을 뿐이다.
넉넉히 잡은 송사리를 양동이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즐겨 먹던 엘크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강철남은 반응도 못 할 만큼 빠른 속도로 가까이 접근해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짚었다.
두개골을 넘어 전해지는 파동에 엘크는 그대로 즉사했다.
“고기도 구했다.”
오늘의 수확을 한 아름 안고 집에 돌아온 강철남.
불을 지피고 요리 준비를 하려는데,
“당신들!”
방문객이 와 있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
남아 있는 적개심.
그녀다.
강철남은 그녀가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왔소? 식사는 하셨고?”
“지금 그런 거나 물어볼 때예요?”
버럭 소리를 지르는 세레나.
어젯밤 패배에 분하기도 하고, 또 태연한 그의 태도가 황당하기도 하다.
“다른 친구들은 어디 갔어?”
“네가 두들겨 팬 엘프들? 돌아갔어. 인간계에 이렇게 강한 인간과 동물이 있다면 괜히 관여할 필요가 없다면서.”
멍구는 왠지 자기가 쫓아낸 것 같아 머쓱한 듯 뒷발로 턱을 벅벅 긁는다.
“그러는 당신은 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남아 있지?”
“확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마물들을 물리치고 인간계를 지켜 낼 사람으로 충분한 자격이 있는지.”
“나는 인간계고 뭐고 지킬 생각이 없는데?”
“네? 무슨 인간이 그래요?”
“내 알 바냐? 인간계 따위 몰락해도 상관없어.”
“대체 뭐예요, 당신?”
기가 막힌 세레나.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다.
거짓이나 허세로도 보이지 않는다.
“당신들 인간의 땅이라고요, 마왕들의 손에 넘어가도 상관없단 말이에요?”
“귀찮거든, 전쟁이라는 거. 전쟁은 젊었을 때 돈을 벌기 위해 사회생활 하면서 질릴 만큼 겪어 봤어. 이제는 쉬고 싶을 뿐이야.”
강철남은 불을 지핀 화덕에 무쇠 팬을 올린다.
고기 손질을 위해 엘크의 배를 칼로 그어 가죽을 벗겨 낸다.
뿔은 잘라 따로 빼 두고 장기를 손질하여 고기를 도려낸다.
세레나는 그 광경이 역겨운 듯 고개를 돌린다.
“이해가 안 가요. 당신처럼 강한 사람이 어째서.”
“너도 네 욕심대로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
“네?”
“인간을 위하는 마음도 결국 네 개인적인 욕망에 불과하다는 거야.”
“이타적인 마음이 어째서 욕망이라는 거죠?”
“인간계가 멸망하면 네 마음이 불편하지?”
“당연하죠.”
“그렇다면 인간계를 돕는다는 건 네 마음이 편하자고 벌이는 일 아닌가?”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결국 네 양심과 이타심도 네 욕망일 뿐이야.”
강철남은 손질한 고기에 밑간을 하고 달궈진 팬에 얹는다.
치이익, 소리를 내면서 고기가 익기 시작한다.
“내가 힘이 없었더라도 나에게 의지했을까?”
“그게 무슨 소리죠?”
“내가 자연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걸 방해받는 이유가 단지 내가 강해서라면 결국 내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일 뿐이야.”
“…….”
“너희가 필요한 건 단지 내 힘일 뿐이야. 거기에 내 인생이 휩쓸리고 싶진 않아.”
강철남은 분명히 말했다.
‘너희’라고.
“하아… 눈치 못 챈 사람도 없는 것 같으니 그만 나오시죠.”
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세레나의 말에 숲이 부스럭거렸다.
“이런, 들켰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있던 건 백진섭과 한지영이었다.
강철남의 감각과 세레나의 엘프의 눈과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철남 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계셨소?”
백진섭이 밝게 웃으며 인사한다.
“오랜만이에요, 철남 씨!”
“오랜만이오.”
한지영은 세상 기쁜 얼굴로 반가움을 표현한다.
인사를 나눈 뒤 백진섭은 흘긋 세레나를 보는데 그 미모에 가슴이 쿵쾅 흔들린다.
가정을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시선 처리가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한지영은 위아래로 그녀를 스캔해 보는데 보통내기가 아니다.
자기도 제법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눈앞의 여자한테는 얼굴, 몸매, 피부, 뭐 하나 이길 수 있는 면이 없었다.
왠지 분했다.
“덕분에 잘 있습니다. 그날 명동 사건에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인류는 없었을 테니까요.”
“괜히 오버 마시구려.”
그 말에 세레나는 머릿속에 전구가 번뜩한다.
“도와주다뇨? 인간계를 도와줬다는 건가요?”
세레나가 말을 꺼내자 백진섭이 마침 잘됐다는 듯 묻는다.
“철남 씨, 여기 이분은 누구죠?”
백진섭은 인간치고는 너무 아름답고, 몬스터라기엔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이 신비로운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엘프인데, 날 쫓아온 모양이야.”
“크아. 역시 남자는 잘생기고 봐야 해요. 산에 히키코모리처럼 틀어박혀 살아도 이런 미인이 줄줄 따라다니고.”
“진섭 씨, 저기 끓는 솥 보이오? 들어가시면 돼요.”
“누가 누굴 쫓아다녀요?!”
세레나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한지영은 조금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백진섭이요. 엘프는 처음 뵙네요.”
“한지영이에요.”
두 사람은 세레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세레나는 눈을 살포시 감고 우아하게 묵례를 건넨다.
백진섭은 인사마저도 우아하구나 생각했지만 한지영은 싸가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진지했던 대화 분위기가 깨져 버렸다.
다시 말을 이어 가 보려는 세레나.
“지난번 인간을 도와줬다는 건 왜였죠?”
“쓰러트린 놈한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으니까.”
“겨우 그런 일로 인류를 구해요?”
“구할 생각 없었어. 어쩌다 보니 인류가 구사일생한 결과가 따랐을 뿐이야.”
강철남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는 세레나였다.
대체 이 인간은 뭐란 말인가.
“두 분, 그나저나 무슨 일이오?”
“얼굴이나 뵈려고 왔죠.”
한지영이 말 걸어 주길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이젠 둘이서도 여기까지 잘 올라오는 모양이군.”
“하하. 매일매일 단련하니까 말입니다. 원래는 혼자 올 수도 있었는데 지영 씨가 꼭 같이 가자고…….”
순간 백진섭의 옆구리에 팔꿈치가 쑥 들어온다.
갑작스러운 타격에 기침을 켈록켈록 하는 백진섭의 말을 가로채고 한지영이 이어 말한다.
“그나저나 철남 씨, 혹시 요 며칠 새에 산 비우셨어요?”
한지영은 진짜 의도를 감추고 살살 돌려 말하는 듯 보였다.
할 말이 있구나.
눈치는 챘지만 강철남은 순순히 걸려 주기로 한다.
“마계에 다녀왔소.”
“마계에요? 그런 곳을 마실 다녀오듯이 드나드시다니. 역시 대단하셔요.”
“나 없는 새에 무슨 일 있었소?”
“있다마다요, 엄청난 몬스터가 산을 내려와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거든요.”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한지영.
세레나는 이 인간들이 하는 말에 얼탱이가 없었다.
도시가 박살 나고 있는데 여기서 한가하게 노가리나 까고 있을 때인가.
“그래? 그럼 가서 욕들 보시오. 이래저래 직장인들이란 고생이 많겠구만.”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 몬스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그렇죠, 진섭 씨?”
“정말입니다. 영화에서나 봤지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쩐지 자꾸 덫만 놓고 뒤로 물러나 걸려들길 바라는 모양새다.
빨리 덥석, 걸려 줘야 돌아갈 것 같으니 함정에 걸려 주자.
“무슨 몬스터인데 그러오?”
“히히, 궁금하시죠?”
한지영이 개구쟁이처럼 군다.
나름 필살의 애교였는데 강철남은 무덤덤하기만 하다.
살짝 서운해진 한지영 대신 백진섭이 말을 받는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드.래.곤.’이라니.”
순간 엘크 고기를 뒤집던 강철남의 손이 멈칫한다.
“뭐라 그러셨소?”
“드래곤입니다.”
백진섭은 먹혔다는 표정으로 세레머니를 지었다.
강철남은 벌떡 일어났다.
지금 엘크 고기 따위나 굽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자, 멍구야.”
“X벌, 군침이 도는구만.”
드디어 버킷 리스트의 한 줄을 그을 때다.
먹자, 드래곤 고기를!
남자들에겐 로망이 있다.
정의의 사도, 축구 선수, 우주 비행사, 변신 로봇.
그리고 드래곤.
드래곤이란 얼마나 신비로운 존재인가.
거친 가죽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노란 눈동자에 일자로 그어진 검은 동공.
하늘 날아다니며 불을 뿜어 대며 영화나 만화에서 항상 보스몹으로 묘사되던 드래곤.
남자라면 모름지기 드래곤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강철남 역시 어릴 적부터 드래곤이 좋았다.
다른 어떤 생물보다도 멋있었으니까.
어른이 되어 살다 보니 잊고 지냈을 뿐, 드래곤은 강철남의 로망 그 자체였다.
자연인으로 살아가면서 강철남은 지난 로망을 다시 떠올렸다.
다만 그 로망의 형태가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달라졌나고?
드래곤이 실존한다면,
꼭 한번 먹어 보고 싶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