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실시간으로 명동이 박살 나는 중
마계의 땅이 요동치고 굉음을 울리며 땅 밑에서 불쑥 솟아난 것은,
“시끄럽군. 단잠이 깨 버렸다.”
멍구는 ‘눈’을 통해 녀석의 상태창을 본다.
[철갑 두더지
레벨: 87
힘: SS
맷집: SS
속도: S]
“어이, 두더지 양반. 혹시 기괴한 소리를 내는 몬스터에 관한 소문 모르오? 인두겁을 쓰고서는 막 좋아요, 구독 요 지랄하고 다니는 놈인데.”
“그것과 내 단잠을 깨운 게 무슨 연관이지?”
“아 X나 진지충 새끼네. 철남이, 역시 예로부터 몽둥이가 약이라니까.”
멍구가 앞발을 쳐든다.
이에 강철남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미안 미안. 시간 많이 안 뺐을 테니까 이 개가 말한 몬스터에 관해 아는지, 모르는지만 좀 알려 줘.”
“으음. 들어 본 적은 있다. 구멍에서 돌아온 녀석들이 그런 말을 하는 기분 나쁜 녀석을 보았다고 말이지.”
“그래? 너는 역시 말이 통하는 녀석이구나. 혹시 그 몬스터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아?”
“내가 어떻게 알겠나. 인간이든 몬스터든 자유 의지에 따라 바람에 실려 흘러가는 법.”
철갑 두더지는 눈을 감은 채 나긋나긋하게 말한다.
“하, 철남이. 저 극한의 컨셉충 하고 무슨 얘기를 더 하겠어. 다른 애들이나 조져 보자.”
“아무튼 고맙다. 자는 거 깨워서 미안하다.”
강철남이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그 몬스터는 아마 산을 내려갔을 것이다.”
“뭐라고? 산으로 나온 몬스터는 산을 못 벗어나잖아?”
“산 바깥에서 온 인간을 먹으면 산을 나갈 수 있게 되지.”
철갑 두더지의 말을 듣는 순간 옳거니 싶었다.
산을 그토록 샅샅이 뒤졌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녀석은 산을 떠났을 것이다.
단서를 얻은 둘은 구멍을 통해 다시 북한산으로 돌아왔다.
“멍구야, 아무래도 녀석은 그냥 포기하자. 귀찮은데.”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몬스터한테는 왜 그렇게 친절했던 건데?”
“나쁜 녀석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뭐? 그걸 어떻게 알고?”
“나이가 50이면 지천명이라고 하늘의 뜻을 아는 때라고 했어. 상대의 깊은 속을 조금은 볼 줄 아는 거지.”
“철남이, 나도 50까지 살 수 있을까?”
그러자 웃어 보이는 강철남.
“산에 나는 거 편식 없이 잘 먹으면 100살까지 살지도 모르지.”
“끼잉.”
풀 반찬을 싫어하고 고기반찬만 좋아하는 멍구에게는 가혹한 조건이었다.
정상에서 곧장 집으로 내려온 둘.
그런데 누군가 와 있다.
“구구구! 오라버니들, 웬 인간이 와 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쓰러져 헐떡이는 인간.
그는 백진섭이었다.
“진섭 씨 아니요? 여긴 어쩐 일이요?”
“앗, 철남 씨! 다행입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는 백진섭.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왜 그러는 거요?”
“올라오는 길에 몬스터를 피하느라 기운을 무리하게 소모했습니다.”
멍구는 그의 상태창을 보았다.
예전보다 일취월장한 그의 어깨를 앞발로 톡톡 토닥여 준다.
“강해졌구나. 열심히 했어.”
멍구의 말에 울컥해서 눈물이 핑 도는 백진섭.
하지만 지금은 급한 임무가 우선이다.
“강철남 씨!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조아리는 백진섭.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인류의 현재와 미래가 달린 일.
그깟 머리쯤이야 수백 번, 수천 번 조아릴 수 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무슨 일이오?”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강합니다.”
레벨 100 이상의 SS랭크의 몬스터.
도저히 타개법이 보이지 않는 적이다.
하지만 강철남이라면 희망이 있다.
“나는 헌터가 아니오.”
강철남은 몸을 돌렸다.
백진섭은 사람으로서 괜찮은 사람이다.
의리도 있고 올곧은 신념도 있다.
하지만 바깥세상과 연관되는 것은 사양이다.
소란이 싫고 자연이 좋아서 산에 올라와 산다.
세상의 사정에 휩쓸려 살면 결국 내 삶의 주도권을 잃게 된다.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강철남의 신념이다.
“인류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존망? 이대로 가다간 X망인데?”
멍구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개드립을 날리자 강철남이 멍구를 향해 개밥그릇을 집어 던진다.
멍구가 깨갱 대며 가드를 올렸다.
“그렇다면 여기까지가 인류의 한계인 거요.”
“이대로 인류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만 보시겠습니까?”
“삶은 내게 가혹했소. 지친 내게 수고했다며 물 한 잔 건네주지 않았지.”
강철남은 말을 이었다.
“세상에 구겨지고 버려지고 얻은 결론이 있다면 우리는 게임판 위의 말이라는 거요. 여태껏 주사위는 운명이 던졌소. 쭉 그렇게 살아온 것이오. 그런데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주사위를 내가 거머쥘 수 있게 된 거요. 비로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 것이오.”
강철남은 용케 찾아 보관해 둔 깨끗한 물을 떠 백진섭에게 건넨다.
“내가 베풀 수 있는 친절은 지친 당신에게 물 한 잔 건네는 정도라오.”
백진섭은 물을 받았다.
손이 떨렸다.
그래, 우리는 헌터 연합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늘 강철남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
헌터의 길 역시 우리가 스스로 정한 길.
우리가 해내야 한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정신을 가다듬는 백진섭.
가서 싸우자.
해 보는 데 까지는 해 보는 거야.
“그런데 혹시 산에 오는 길에 인두겁을 쓴 몬스터 못 봤소?”
“네? 그런 몬스터가 있나요?”
“으음.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라는 헛소리를 내뱉으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는 몬스터요.”
“기분 나쁜 녀석이군요. 그런데 녀석은 왜요?”
“밥상머리 교육을 해 줄 필요가 있어서요.”
“하핫. 강철남 씨에게 1:1 수업을 받다니. 녀석도 참 운이 나쁘군요.”
백진섭은 다리에 힘을 넣고 벌떡 일어났다.
손바닥으로 뺨을 찰싹 때리고 기합을 넣는다.
“철남 씨. 물 잘 마셨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슈.”
“잘 가!”
강철남과 멍구의 배웅을 받고 산에서 내려오는 백진섭.
복귀를 서두른다.
동료들이 싸우고 있을 테니까.
따르릉— 따르릉—
“네, 부협회장님.”
- 어떻게 됐나.
“데려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자네가 최선을 다했다고 믿겠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생각 이상으로 상황이 심각하네.
역시.
레벨 100 이상의 SS랭크 몬스터.
인류 최대의 재앙일 것이다.
“녀석은 어떤 몬스터죠? 분석해 보겠습니다.”
- 특징을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야. 움직임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힘은 무쇠 창을 수수깡처럼 가뿐히 부러뜨릴 만큼 강하네.
“젠장, 무지막지한 놈이군요.”
- 게다가 외양조차 기분 나쁜 녀석이야.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탈을 쓰고 계속 이상한 말과 웃음소리를 중얼거려.
계시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늘에서 내린 유성이 내 머리 위로 딱 떨어지는 듯한 계시.
“부협회장님! 녀석이 지껄이는 이상한 말이 뭔가요?”
- 별 의미 없는 말이네.
“뭔가요?!”
-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는 말일세. 그리고 끼득끼득 웃는다네. 정말이지 소름 끼치지.
“그겁니다!”
- 깜짝이야! 뭐가 말인가?
“조, 조금만 버티라고 하십시오! 곧 데려가겠습니다.”
- 뭘 데려간다는 말인가?
“인류의 희망을요!”
백진섭은 전화를 끊고 왔던 길을 달려 올라갔다.
아까보다 몸은 더 지치는데 어쩐지 다리에 힘이 솟구친다.
* * *
투두두두—
상공에서 헬기가 명동을 내려다본다.
건물과 도로는 텅 비어 있다.
오로지 인간의 형태를 한 무언가만이 서 있을 뿐이다.
“낙하!”
헌터 공수 부대가 헬기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온다.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와 그 끔찍한 존재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다.
“우라얍!”
키가 2m는 되는 장정이 커다란 도끼를 휘두른다.
그 순간 번쩍하는 빛과 함께 도끼날이 하늘로 솟구쳤다.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가는 도끼날은 헬기를 그대로 두 동강 내 버렸다.
“세상에…….”
공격을 퍼붓던 헌터들이 그 광경에 뒷걸음질 쳤다.
그 와중에 도끼를 휘두른 장정의 상반신이 몬스터에게 먹히고 있었다.
“활, 활을 쏴!”
쇠뇌 부대가 화살을 쏘아 댔다.
그러나 녀석의 피부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입에 가득 머금은 인간을 꿀떡 삼킨 녀석은 트림을 꺼억, 한다.
그러자 혈관이 부풀어 오르면서 근육이 펌핑된다.
“키히히… 크그긋… 우라얍! 우라얍!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키히히힛.”
기분 나쁜 음성과 압도적인 힘의 차이.
무기를 쥔 헌터들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진다.
그 순간,
“다시!”
커다란 트럭이 돌진하더니 몬스터를 들이박는다.
범퍼가 완전히 찌그러지도록 강한 충돌이었으나 몬스터는 1cm도 밀려나지 않았다.
부딪치는 순간 차에서 뛰어 내린 건 장혜리.
“공격을 멈추지 마! 녀석이 서울을 마음대로 휘젓게 놔두지 마!”
장혜리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헌터들이 달려든다.
칼로 긋고 창으로 찌르고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나,
콰직—
“으아악!”
“크악!”
“아, 안 돼에에!!”
물에 젖은 휴지처럼 녹아내리는 헌터들.
장혜리 역시 큰 부상을 입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다.
녀석이 명동을 벗어나는 순간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여기서 막아야만 한다.
장혜리가 검을 들고 일어선다.
“적어도 상처 하나라도…….”
남은 힘을 쥐어짜 내 목덜미를 노린다.
하지만 몬스터는 웃으며 입을 쩍 벌린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장혜리의 머리가 앞니에 닿을 타이밍에,
카앙!!
“정신 차려라, 장혜리!”
홍태진의 무쇠 창이 몬스터의 관자놀이를 찌른다.
“너냐? 레벨 100이 넘는다는 녀석이? 실력을 보여 봐라.”
김성남이 무쇠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녀석을 난도질한다.
상처는 없다.
다만 그의 기세에 뒤로 밀려난다.
“키히히…….”
쾅!
“크학!”
몬스터가 손바닥을 휘둘러 김성남의 복부를 후려친다.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김성남.
“약해 빠졌군.”
편곤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황기민.
“앗, X발…….”
그러나 한 대도 못 맞추고 몬스터의 발길질에 늑골이 부러지고 만다.
“감별사님! 녀석의 상태창은요?”
최형권은 집중해서 상태창을 확인한다.
녀석은,
[박준범
레벨: 107
힘: SSS
맷집: SS
속도: SSS]
“이럴 수가.”
터무니없이 높은 수치에 말문이 막혀 버린 최형권.
휘청하며 쓰러지고 만다.
“정신 차리세요.”
한지영이 그를 부축한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각오는 다들 하고 왔습니다. 현실을 직시할 각오 말이에요.”
고민하던 최형권은 마침내 결심을 다진다.
“녀석의 레벨은 107, SSS랭크입니다!”
그 소리를 듣자 헌터들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두려움.
범접할 수 없는 적을 마주쳤을 때의 공포.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오만한 생각 따윈 사라졌다.
대신, 우리가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라는 간절한 소망만이 생길 뿐이었다.
“어머니…….”
“여보…….”
다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음은 꺾이고 의지는 사그라들었다.
인간이기에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레벨 107에 SSS랭크? 그래, 그 정도는 돼야지! 야 이 새끼들아! 어차피 여기서 못 막으면 우리나라는 끝장이야.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똑같아! 적어도 여기서 장렬히 전사하는 편이 폼 나지 않냐?”
김성남이 칼을 휘두르며 소리친다.
“나는 뒤질 땐 뒤지더라도 저 눈깔 하나는 뽑아 먹고 뒤진다. 혹시 아냐? 앞이 안 보여서 네놈들 토끼 같은 자식새끼 잡아먹을 때 실수로 헛손질이라도 할지.”
무턱대고 돌진하는 김성남.
하지만 싸대기 한 대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다시 일어서는 김성남.
그의 기세에 2팀의 팀원들이 고무되어 일제히 달려든다.
“분하지만 맞는 말이군.”
“그래, 오늘 죽어 보자!”
“우리 가족을 위해!”
헌터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아직 인간이 패배할 때가 아니라는 듯 당당한 함성을 내지르며.
* * *
여기에 달랑 무쇠 숟가락 하나만을 들고 산을 내려가는 사람이 있다.
“강철남 씨! 조심하십시오! 이 앞에는 엄청 강한 수인 염소가…….”
우드득.
그 수인 염소는 강철남이 걸레 물 짜듯 모가지를 비틀어 버렸다.
한 번은 봐줬지만 두 번은 못 봐준다.
꿀꺽.
한여름인데도 백진섭은 새삼 그의 강함에 오한이 올라왔다.
멍구에게 산을 맡긴 채 강철남은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명동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