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번호 따인 자연인, 근데 폰이 없수다
예로부터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격언이 있다.
한국의 모든 산업과 문화 인프라가 서울에 갖춰져 있기에 나온 말이다.
대한민국은 서울민국이라 불릴 만큼 수도권 집중지역이며,
이 현상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날 이후 더욱 심해졌다.
“뭐여, 여기가 서울이여?”
자다가 눈을 뜬 멍구.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견생 처음으로 한 서울 구경에 깜짝 놀란다.
높은 건물에 넓은 도로.
빽빽한 자동차에 붐벼 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오랜만에 와 보는데 많이 달라졌군.”
강철남의 기억 속 서울과 지금의 서울은 사뭇 달랐다.
몬스터들과의 전투로 여기저기 깨진 건물 벽,
그리고 길 곳곳에 설치된 긴급 버튼.
헌터로 보이는 행인들.
헌터들을 위한 상점.
경찰들과 헌터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서울의 모든 행정이 헌터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마 서울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순 없을 겁니다. 서울은 이제 국방을 위한 헌터의 도시가 되었으니까요.”
백진섭이 드라이브 스루로 음료를 주문해 받는다.
시원한 스무디를 한 잔을 강철남에게 건넨다.
그에 강철남은 빨대를 꽂아 멍구에게 한 입 준다.
“오! 이건 뭐야!”
“딸기 스무디라는 거야.”
눈이 번쩍 뜨인 멍구.
결국 스무디 한 잔을 전부 쪽 빨아 마시고는,
꺼억, 달달한 트림을 뱉으며 행복해한다.
“그런데 헌터들로 방어가 되는 거요? 실력이 많이 부족해 보이던데.”
강철남은 대한산에서 보여 준 경북 헌터 연합의 추태를 떠올렸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백진섭도 부끄러웠다.
명색이 몬스터를 토벌하고 시민을 지킨다는 헌터들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으니.
“그 점에 있어서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뭐요?”
“먼저, 대한산의 몬스터 수준이 비상식적으로 높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도심지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수준은 레벨 1부터 레벨 10까지, 랭크는 F와 E 수준입니다.”
“서울에도 산이 있을 거 아니요? 작은 구멍에서 나온 몬스터들이 도심을 습격하지는 않소?”
“그게 저희도 그게 의문입니다. 산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나온 몬스터들이 그 산을 벗어나진 않더군요.”
“으음. 그렇다면 산에 직접 가야만 먹을 수 있겠구먼.”
“…네?”
산에서 나는 몬스터들은 외부로 반출될 수 없는 지역 특산물 같은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진섭은 이 양반이 또 무슨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을 하나 싶었다.
“두 번째는 바로 헌터들의 상향 평준화입니다.”
“호오.”
“몬스터와 전투가 거듭되면서 몬스터의 신체 일부 샘플을 다량 확보했습니다. 연구 끝에 수준 높은 무기를 만들 수 있었고 그 덕에 헌터들의 레벨 상승도 다소 쉬워진 것이죠.”
“전쟁과 혼란은 과학의 발전을 이루는 법이니까.”
“그 말 그대로입니다.”
인간들은 쉽게 지지 않는다.
위기가 생기면 뭉쳐서 함께 싸우는 것이 대한민국의 근성이었다.
국가 부채를 극복하기 위해 금을 모으고,
기름이 흐르는 바다를 닦기 위해 주말을 반납하는 민족.
힘들 때일수록 팔을 걷고 나서는 이들이 대한민국의 국민 아니었던가.
“자, 곧 서울 헌터 연합에 도착할 거에요. 그 전에 강철남 씨.”
“뭐요?”
“그리고 멍구!”
“왜?”
장혜리가 굉장히 아니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흙 묻은 작업화, 낡은 등산 바지, 목 늘어진 카라티.
샴푸 한 번 한 적 없는 푸석푸석한 털.
이대로는 무시당하기 딱 좋은 꼬라지다.
“에효… 먼저 어디 좀 들리죠.”
장혜리는 차마 둘을 더 째려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거둬 버린다.
강철남과 멍구는 우리가 뭘 어쨌다고 하는 눈치다.
* * *
장혜리는 강철남을 데리고 옷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 옷을 가져다 대어 봤다.
편한 옷차림, 캐쥬얼, 세미 정장 중에 고민하다가 심플한 세미 정장을 골라 준다.
구두에 검은 슬랙스, 하얀 티셔츠에 재킷을 걸치고 나오는 강철남.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모델이 따로 없다.
점원도 알바 하면서 본 남자 중 가장 옷 태가 훌륭하다고 말했다.
“흐음. 그 좋은 옷걸이 놔두고 왜 그러고 다녔어요?”
“산에 사는 사람이 좋은 옷 입어서 뭐 하겠소.”
“이제는 겉모습에도 신경을 쓰셔야 해요.”
“왜요?”
“왜긴요. 본격적으로 헌터가 되실 건데요.”
“나는 산만 다니면 되오.”
강철남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도시 사람들의 조직 생활에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이참에 도시에 내려와 살아 보는 게 어때요?”
장혜리가 말을 마치자 강철남의 눈빛에는 회의와 쓸쓸함이 비쳤다.
스물다섯의 자기보다 젊어 보이는 그.
하지만 훨씬 더 깊은 인생의 암흑을 겪어 본 듯한 눈을 하고 있다.
“흠흠. 일단 그건 차차 생각하도록 하죠. 다음은 멍구 차례네요.”
“멍구도 뭘 합니까?”
“당연하죠. 누가 보면 젖은 수건이 걸어 다니는 줄 알겠어요.”
장혜리는 멍구를 데리고 애견 미용실로 향했다.
그때 멍구는 개 샴푸라는 걸 처음 보았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냄새를 맡아 보니 향긋한 꽃 냄새가 난다.
하지만 진가는 몸에 닿을 때 발휘되었다.
거품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라 몸의 가려운 곳을 벅벅 씻어 주는 게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총으로 몸을 말리고 빗질로 깔끔하게 털을 정리하니 윤기가 좔좔 흘렀다.
“어머, 이렇게 예쁜 개를 이때까지 왜 그렇게 막 관리하신 거예요?”
장혜리는 환골탈태한 멍구를 보며 강철남을 꾸짖는다.
“산에 살다 보면 금방 흙투성이가 되는 법이오.”
“이제부터는 멍구도 깔끔하게 다녀야 해요.”
“철남이, 내 견생 중에 이런 호강은 처음이야.”
“이것 봐요. 멍구도 좋아하잖아요.”
장혜리의 활약으로 깔끔하게 변신한 강철남과 멍구.
차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걸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이보게 철남이.”
“왜.”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데. 아무래도 산골 촌놈들이라는 게 뽀록났나 봐.”
“자연스럽게 행동해. 산골 촌놈들도 인권은 있어. 당당하게 행동해.”
“나는 인(人)권이 없잖아.”
강철남과 멍구는 불안감 속에 인파를 헤치고 걷는다.
여자들이 눈웃음을 지으며 강철남을 흘긋 쳐다보곤 지나친다.
그리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빙글 돌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자기들끼리 좋아서 꺄르르 댄다.
“미친 여자들인가.”
“조심해라, 철남이. 서울 놈들이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고 있어.”
긴장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강철남과 멍구.
갑자기 그 앞에 웬 여자가 대뜸 다가와 길을 막는다.
“어머! 귀여워라. 얘 이름이 뭐예요?”
여자는 멍구를 마구 쓰다듬으며 강철남을 올려다본다.
“멍구요.”
“멍구구나. 안녕? 예뻐, 예뻐.”
웬 처음 보는 처자가 자기 턱을 문질러 댄다.
무엇보다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에 머리가 띵했다.
“몇 살이에요?”
“멍구야, 너 몇 살이었니?”
“그것도 모르냐? 열여섯 살이잖아.”
“엄마야!!”
멍구가 입을 열자 여자는 깜짝 놀라 도망가 버린다.
장혜리가 달려와서 꿀밤을 콕 때린다.
“멍구야. 세상 어디에도 말하는 개는 없어!”
“여기 있잖아.”
“그래, 말을 잘못했네. 너만 닥치고 있으면 세상 어디에도 말하는 개는 없단다.”
그러자 멍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눈치를 챈 듯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다.
얼른 가자고 장혜리가 앞장선다.
그런데 또 나타나는 한 여자.
자연스럽게 멍구를 만지는 척 강철남에게 말을 건다.
“귀여워라, 이름이 뭐예요?”
“멍구요.”
“아니요, 그쪽 이름이요.”
여자는 한층 도발적으로 강철남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댄다.
“강철남인뎁쇼.”
“어머, 말투 너무 재밌다.”
이게 재밌나 싶은 강철남.
사실 재밌는 건 그의 얼굴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
“저도 강아지 키우거든요. 언제 다음에 같이 산책해요.”
“그러시든가.”
“어머, 정말요? 그럼 번호 주세요.”
순도 100%의 쌩 자연인 강철남.
그에겐 전화기가 없었다.
“없는데요.”
“어머, 이 타이밍에서 튕기기에요? 완전 선수시네.”
달라는 여자와 줄 게 없다는 남자.
둘이 아옹다옹하고 있자 한심해 죽겠다는 듯 장혜리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철남 씨, 안 갈 거예요?”
“가요, 가.”
강철남은 멍구를 데리고 장혜리의 곁으로 갔다.
여자의 표정이 기막힘을 넘어 허탈함으로 변했다.
“뭐야, 여친 있으면서.”
흥, 하며 사라지는 여자.
여친이라는 말에 장혜리가 반응한다.
“철남 씨, 오해하지 마요.”
“뭔 오해요?”
“아무튼 하지 마요.”
“아니 무슨.”
아무튼 여자들이랑 엮이면 피곤해진다.
강철남은 차라리 스톤 골렘 100마리를 때려잡는 게 더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 * *
마침내 도착한 서울 헌터 연합의 건물.
건물이 제법 크다.
유리창이 있지만 불투명해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다.
정문에는 경비 여럿이 입구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우리 경북 연합과는 스케일이 다르군요.”
“뭐, 그렇죠. 대통령이 공들여 투자한 곳이니까요.”
“멋지군요.”
백진섭은 섭섭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헌터들에게 관심을 갖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정책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만큼 백진섭이란 남자는 사사로움보다 대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들어가요. 강철남 씨는 남한테 함부로 말 걸거나 누가 먼저 말 걸거든 섣불리 대답하지 마요. 멍구는 아예 말 자체를 하지 말고.”
강철남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멍구는 앞발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다.
정문에서 회원증을 찍고 앞장서는 장혜리.
그녀를 따라 두 사람과 한 마리의 개가 경비들의 매서운 눈빛을 받으며 들어간다.
“거 참, 분위기 엄청 잡네.”
“멍구야, 쉿.”
“아뿔싸.”
그들은 긴 복도를 요리조리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장혜리가 50층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답답한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멍구가 입을 연다.
“엄청 높네. 63빌딩인 줄.”
“맞아, 여기는 원래 63빌딩이었어. 지하 3층, 지상 60층. 합해서 63빌딩.”
“진짜? 여기가 63빌딩이야?”
“응,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건물을 헌터 협회로 개조한 거지.”
“세상일이라는 게 참 묘하군요. 관광지가 군사 기관으로 변하다니요.”
백진섭은 서울에 오니 변해 버린 세상이 더 피부로 와 닿았다.
그러곤 다시 예전처럼 인간들이 발 뻗고 살아가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나저나 강철남 씨. 서울 협회에 할 얘기라는 게 뭡니까?”
“그건 대가리를 만나서 할 거요.”
“대가리라뇨? 협회장님이라고 제대로 불러야 해요!”
장혜리가 발끈한다.
“그리고 오늘 협회장님은 안 계셔서 부협회장님을 만날 거예요.”
“얘기가 다르군.”
“어쩔 수 없잖아요. 서울 헌터 협회의 장이에요. 민간인 신분으로 원하는 아무 때에 만날 수 있을 리 없죠.”
“철남이, 수틀리면 다 뒤엎어 버리자구.”
“아니, 제발…….”
백진섭은 멍구가 진짜로 날뛰어 버릴까 봐 쩔쩔맸다.
멍구의 힘을 알 리 없는 장혜리는 할 테면 해 보셔, 라며 멍구를 노려본다.
띵—
50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복도를 따라 걷다 부협회장실이 나온다.
똑— 똑—
“들어오세요.”
장혜리가 문을 열고 그들이 함께 들어온다.
“오, 장비서. 그분들인가?”
“네. 모시고 왔습니다.”
업무 모드로 돌입한 장혜리는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경북 헌터 연합회장 백진섭이라고 합니다.”
백진섭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강철남에게 눈치를 준다.
“아, 강철남이요. 이쪽은 멍구.”
“멍멍.”
멍구가 아주 능청스럽게 개 같은 연기를 보여 준다.
“어서 오십시오. 서울 헌터 연합 부협회장 서필도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둘이서 대한산을 장악했다지요?”
서필도는 그들을 자리에 앉혔다.
장혜리는 커피를 내려 대접했다.
약간의 아이스 브레이킹 대화가 오가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으음. 인재가 있다는 건 저희 인류에게 무척 기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증명도 없이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한 마디로 근본도 없는 자연인과 개라는 거로군.”
“철남 씨.”
장혜리가 말로 한 대 쥐어박는다.
“하하하. 아니네. 시원시원해서 좋구만. 그래서 말인데요, 저희에게 그 능력을 증명해 주실 수 없습니까?”
“어떻게요?”
“상태창을 확인하면 증명이 바로 되겠지만 마침 저희 쪽에 ‘눈’을 가진 유일한 헌터가 북한산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왜 거기 있소?”
“북한산에도 작은 구멍이 났었습니다. 그걸 막으러 갔다가 돌파구가 막힌 모양입니다.”
“그 사람을 구해 주면 되는 건가?”
“그 사람뿐만 아니라 생존자는 모두 구해 주시면 됩니다.”
“알았소.”
“그럼 강철남 씨 조건도 들어 봐야겠지요?”
서필도는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먼저 운을 뗐다.
이야기가 빠른 남자였다.
강철남이 서울 헌터 협회를 찾은 이유.
그것은 바로,
“북한산의 소유권을 주십쇼.”
푸흡—
백진섭이 커피를 뿜는다.
그리고 장혜리가 미친놈 보듯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