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104화 (103/105)

104. 당신의 시간을 소유하고 싶다

104.

세란의 집에서 나온 후 소민은 백화점을 백 바퀴 돌 기세로 돌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필요한 것만 딱 사서 나왔을 텐데 오늘은 그게 쉽지가 않았다.

“대체 뭐가 좋을지 알 수가 없네.”

종알거리며 소민이 아까도 들어갔던 남성복 매장에 세 번째로 쏙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에이. 아무래도 옷은 아닌 것 같아. 늘 하고 다닐 수 있는 게 뭐가 있으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시선에 맞은편 매장에 진열되어 있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오? 괜찮은데?”

그렇게 외친 그녀가 쪼르르 시계를 향해 달려갔다. 시계를 보고 선유가 바로 떠오를 만큼 근사하면서도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듯 한 시계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거 좀 보여주세요.”

“아, 잠시만요.”

점원이 제품을 꺼내 내어놓고는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남성 시계인데 남자 분께 선물하실 건가 봐요?”

“네.”

“보통 여자 분이 남자 분한테 시계를 선물하는 것은 당신의 시간을 소유하고 싶다는 뜻도 있고 혹은 근면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젊은 분들이 조금 연세 있는 분들께 드리는 선물로는 맞지 않거든요.”

“괜찮아요. 남자친구 줄 거거든요. 의미도 좋고, 디자인도 마음에 드네요. 그거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소민이 점원에게서 건네받은 작은 쇼핑백을 흔들며 마침내 백화점을 벗어났다. 백화점을 벗어나면서 소민이 핸드폰을 들었다.

“어디예요?”

“집.”

간단명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단한 한 마디에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깐 볼 수 있어요?”

“지금?”

“바로는 아니고 한 30분 걸릴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와.”

“그래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보조석 좌석에 놓인 쇼핑백을 한 번 보고는 씩 웃었다. 기뻐할 선유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새어나왔다.

“아흥. 난 어쩜 이렇게 기특한가 몰라.”

콧소리를 내며 스스로에게 셀프칭찬도 아끼지 않은 소민이 선유의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무렵이었다. 선유의 집 벨을 눌렀을 무렵에는 소민의 배에서 공복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려 하고 있었다.

“아, 배고파. 한선유씨랑 집에서 뭐라도 시켜먹자고 하든가 해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벨을 누르자 마치 문 앞에서 기다리기라도 한 듯 문이 열렸다.

“왔어?”

“기다렸어요?”

“뭐...”

쑥스러운 듯 그렇게 말한 선유가 소민을 안으로 이끌었다.

“뭐 만들었어요? 무슨 냄새 나는데?”

“저년 먹을 시간이라서.”

“설마... 밥 했어요?”

“그 설마는 뭐야?”

“한선유씨가 밥을 한다구요?”

거듭되는 질문에 선유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장이 오디션 합격 기념으로 쏜다는 저녁도 작파하고 왔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와서 앉기나 해.”

거듭되는 의심에 약간은 토라진 듯 선유가 그렇게 소민을 식탁으로 잡아끌었고 식탁 앞에 선 소민은 두 눈을 의심했다. 식탁에는 호화찬란까지는 아니어도 평범하다 생각되고 이상적이다 생각 될 만한 차림에 밑반찬들과 방금 막 한 것인지 김이 솔솔 오르는 계란말이, 된장찌개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설마 이거 다 한선유씨가 한 거예요?”

“아 그러니까 왜 자꾸 설마가 붙는 건데?”

“아니. 생긴 건 요리에 요자도 모르게 생겼잖아요.”

“그럼 차주머니씨는 요리에 요자를 알게 생겼냐?”

그의 말에 수긍한 소민이 고개를 끄덕이다 숟가락을 들었다.

“어쨌든 이거 나 주려고 한 거 맞죠?”

“아닌데?”

실컷 구경시켜놓고는 주려고 한 게 아니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지려다 뒤에 붙는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같이 먹으려고 한 건데?”

그리고는 소민과 맞은편에 선유가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소민이 수저를 들어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떠먹고는 물었다.

“한선유씨.”

“왜?”

“하루세끼 출연할 생각 없어요? 내가 한 번 부탁해 볼게요.”

“됐거든?”

내심 소민이 맛없다 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선유가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소민의 태도에 한시름을 놓고는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에이. 나 왔을 때 요리하지.”

“왜?”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가 많은 여자들의 로망이거든요.”

“그럼 하루세끼 봐.”

“에이. 그건 또 다르죠.”

“왜?”

“나는 요리하는 섹시한 내 남자를 보고 싶은 거니까.”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는 소민의 말에 선유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파묻고는 열심히 수저와 젓가락을 놀렸다.

“부끄러워요?”

“......”

“부끄럽구나?”

“......”

“세상에. 내가 한선유씨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보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녀의 놀림에도 아무 말 없이 밥을 먹던 선유가 그 말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탁 소리와 함께 너무 놀린 건가 싶어 눈을 댕그랗게 뜨고 선유를 보는데 선유가 입 안 가득 있는 음식을 겨우 삼키고 말했다.

“채소민 계란말이 더 먹을래?”

뜬금없는 그의 말에 소민이 계란말이가 담겨있던 접시를 보자 그 많던 계란말이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아, 아까부터 그 놈의 설마는 왜?”

“나 요리하는 모습 보여주려고 지금 그걸 다 먹은 거예요?”

“먹어? 안 먹어?”

“먹을게요.”

귀가 붉어져 그렇게 말하는 모습에 절로 먹겠다는 말이 나왔다. 배고픈 와중인터라 사와서 밥을 차려주기만 해도 기특하다 생각할 텐데 이 남자 요리를 해놓고 기다리지를 않나,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니까 보여주려고 자기가 만든 음식을 순식간에 해치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그가 반소매를 입어 적당히 잡힌 잔근육을 자랑하는 팔로 당근과 양파 햄을 순식간에 썰고는 기름을 달궈 계란말이를 척척 해냈다. 그 모습이 섹시하다 못해 너무 근사해서 소민이 그에게 반하지 않은 상황이었더라도 지금 저 모습을 보고는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미 반해 있는 그녀에게는 더더욱 근사해보일 수밖에. 선유가 다시 만든 계란말이를 사이좋게 나눠 먹고 후식으로 포도를 먹으며 소민이 물었다.

“요리는 언제부터 했어요?”

“몰라. 기억 안 나. 아마 혼자 나와 살면서부터일 걸? 어쨌든 그 여자랑 살 때는 그 여자가 밥을 해줬거든.”

어쩔 수 없는 가족이었다. 그가 좋든 싫든 그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그는 모르는 듯 했지만.

“처음에는 사 먹었는데 사먹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고. 나가 먹자니 사람들 눈이 있고, 배달 시키자니 메뉴에 한계가 있고.”

어찌 보면 그럴싸하지 못한 허무한 이유였지만 소민은 그 말이 안타까웠다.

“혼자 먹는 건 안 외로워요?”

“먹고 살려고 먹는 건데 외로운 걸 따질 시간이 어디 있어. 그리고 요 몇 년 간은 그렇게 집에서 많이 해먹지도 않았는데 뭐.”

하긴 그가 바쁘게 일한 몇 년간은 집에 들어올 시간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 오면 허전하니까 집에 들어올 시간도 없게 스케줄을 잡기도 했고.”

“그랬구나.”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민의 모습에 평상시처럼 모노톤이던 집이 환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채소민이 내 집에 있으니까 집이 꽉 찬 느낌이네. 허전하지도 않고.”

소민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소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무릎을 쳤다.

“맞다. 한선유씨 잠깐 눈 감고 있어요.”

“왜? 나 해외 촬영 나가면 볼 시간 없는데 1분 1초라도 더 봐야 해.”

“잠깐 못 봐도 곁에는 있잖아요. 그러니까 잠깐 눈 감아요.”

단호한 소민의 말에 선유가 스륵 눈을 감았고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짤그랑 거리는 소리가 번갈아 났다.

“손 줘요.”

“뭔데?”

“손!”

여전히 단호한 목소리에 선유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소민의 따뜻한 손이 손 언저리를 조물조물 하더니 무언가 차가운 것이 팔목에 끼워졌다.

“수갑이라도 채우는 거야?”

“뭐, 그 비슷한 거예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조금 더 조물딱 조물딱 움직이고는 말했다.

“됐다. 눈떠도 돼요.”

그 말에 눈을 뜬 선유가 여전히 소민에게 붙들려 있는 자신의 손을 봤다. 마치 소민의 팔찌와 한 쌍인 듯 한 시계가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시계를 선물하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알아요?”

“뭔데?”

“당신의 시간을 소유하고 싶다.”

그 말에 선유가 소민을 쳐다봤다.

“예전에 지유씨가 한 말이 있어요.”

“뭔데?”

“소심하다고 놀리면 안돼요?”

“안 놀려.”

“과거의 선유씨를 아는 것도, 미래의 선유씨를 아는 것도 자기 일거라고.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근데요.”

이제는 자신과 같은 온도의 눈동자와 눈빛을 하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소민을 선유가 바라봤다.

“나는 내 남자의 미래, 과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 않아요. 한선유씨의 시간을 내가 소유하고 싶어요.”

아까부터 소민의 입에서 나오는 내 남자라는 말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소민의 말에 심장이 런닝머신을 달리는 것처럼 벅차왔다. 이어지는 말은 소민 앞에 그의 시간을 다 주어버린다 해도 아깝지 않을 말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했던 그 약속처럼 다시금 도장을 찍듯이 선유는 소민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맞댔다가 떼고는 말했다.

“기꺼이.”

원했던 답에 소민이 싱긋 웃으며 선유의 손을 잡았다. 그의 어머니인 유세란 여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걱정 많이 했어요? 나 보내놓고?”

“네가 상처받을까봐.”

“그래서 안 하던 전화도 하구요?”

“얘기가 통할 지는 모르지만 일단 얘기는 해놔야지. 네가 나한테는 나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란 거.”

그 말에 소민이 선유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왜? 그 여자가 뭐라고 그랬어?”

“예단비는 이렇게 갖고 오는 거 아니래요.”

그 말에 선유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소민의 손에 잡히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명백히 불만이 가득 느껴지는 그 행동에 소민이 선유의 얼굴을 살피는데 선유는 소민의 시선을 피하더니 중얼거렸다.

“아, 진짜 일생에 도움이 안 돼.”

“왜요?”

소민의 물음에도 한참이나 머리를 긁던 선유가 잔뜩 불안한 표정인 소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프러포즈 하기도 전에 그렇게 선수를 치면... 아... 진짜.”

그제야 불만이 어디에서 생긴 건지를 안 소민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한선유씨는 이미 프러포즈 한 거나 마찬가지죠, 뭐. 우리아빠까지 한 서방이라고 부르는 마당에. 그러니까 받아줄게요. 한선유씨 프러포즈.”

선유의 말에 소민이 그의 입술 사이로 속삭이는 은밀한 약속을 불어넣었다. 마주잡은 두 손 위 손목에 사이좋게 걸린 팔찌와 시계가 무한대를 그리는 인피니트 모양을 하고는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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