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저 주세요
103
얼마나 기절해 있었을까 머리가 깨지다 못해 온 몸이 깨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선유가 눈을 떴다. 사위가 깜깜해진 게 대낮부터 마신 술로 밤이 되어서야 정신이 든 것 같았다.
“어? 일어났어요?”
방문을 나서자마자 소민이 눈에 들어왔고 소파에 앉아있던 소민은 선유가 나오는 걸 보자 분주히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에게 미리 타둔 시원한 꿀물은 내밀었다.
“감독님은?”
“누가 감독님이야?”
뒤에서 호령소리와 함께 화장실에서 나오는 채종환 감독이 그렇게 말했다.
“아버님이라고 불러야지.”
꽤나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려 하고 있었지만 벌써 딸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그리고 그걸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에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속 풀고 가게.”
그렇게 말한 채감독이 주방으로 향했고 주방에는 언제 차려 놓은 것인지 단정한 가정식 차림과 함께 콩나물을 넣고 끓인 북엇국이 대기 중이었다.
“그래,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건가?”
조용히 앉아서 밥을 먹다가 채감독이 던진 말이 그랬다.
“예?”
두 눈이 휘둥그레진 선유가 그렇게 묻자 채감독은 물기가 어린 눈을 하고는 소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소민이를 보내 놓고 나면 쓸쓸하기 그지 없을테니 결혼하거든 우리 소민이 빼닮은 딸 하나 낳아주게. 그럼 내 길러주지.”
“싫습니다.”
“뭣이?”
단칼에 싫다고 말하는 선유의 말에 채감독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선유를 향했다. 기특하게도 기절할 때까지도 포기 못한다 해서 저 정도면 죽기까지 붙어있겠거니 하고 허락을 한 채감독은 결혼은 싫다 말하는 듯 한 선유의 발언에 곧 폭발이라도 할 듯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선유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막연히 상상해 보던 소민마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하고, 우중충해지고, 소민의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차오를 무렵 선유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민이랑 제 사이에 소민이 닮은 딸이 나오면 그건 저랑 소민이 딸인데 저희 딸을 왜 아버님이 키우시는 겁니까? 제가 키울 겁니다.”
소민도, 소민과 닮은 그 딸도 어느 누구에게도 내어주고 싶지 않은 그의 욕심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소민의 얼굴을 홍시마냥 붉어져 아래로 툭 떨어졌고 채감독과 선유는 한참이나 아직 나오지도 않은, 아니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가지고 옥신각신했다.
한참이나 옥신각신하던 그들의 논쟁은 결국 민규가
“아, 애나 있으면 내가 이해라도 하지!!”
라고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수그러들었다.
꿀물과 콩나물북엇국으로 해장을 하고서야 선유는 소민의 집에서 나설 채비를 했다. 배웅을 하러 나서는 소민을 향해 채감독이 으름장을 놨다.
“따라가거나 10분 안에 안 들어오기만 해 봐.”
그 으름장을 등 뒤로 맞으며 선유가 나서면서 투덜거렸다.
“10분이라니 너무 짧은 거 아니야?”
“10분이면 한선유씨가 엄청 마음에 든 거거든요?”
“그래? 싫어하시는 거 아니고?”
“그래요. 마음에 안 들었으면 아까 같은 얘기 절대 안 하실 분이란 말이에요.”
“아까?”
사실은 거의 혼이 나간 채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그는 긴장해 있었기에 자기가 채감독과 나눈 대화도 기억을 못하는 선유의 모습에 소민이 다시 얼굴이 붉어져서는 외쳤다.
“아까 그... 그... 아 있잖아요!! 애기!!”
“어.”
“그 정도를 생각하실 정도면 엄청 마음에 드신 거라구요.”
“다행이네.”
그렇게 말한 선유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채소민네는 얼추 허락을 맡은 건데... 내 쪽이 문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소민이 그제야 머리에 떠오른 생각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한선유씨... 있잖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겨우 겨우 꺼내서 선유에게 선유의 어머니 세란과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마쳤을 때 선유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미안해요. 괜한 일 벌인 거죠?”
소민의 말에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선유가 핸드폰을 들었다. 소민을 앞에 두고 핸드폰 액정을 몇 번 만지던 그가 소민에게 물었다.
“채소민, 채소민 계좌번호 하나만 불러.”
“에?”
“빨리.”
“어. 대박은행 34520383959요.”
그리고 잠시 후, 소민의 핸드폰에 문자가 한 통 들어왔다.
“확인해 봐.”
“에?”
“확인해 보라고.”
선유의 말에 소민이 핸드폰을 확인하자 그 안에는 그녀가 방금 선유에게 불러준 계좌에 1억이 입금됐다는 어마어마한 문자가 찍혀 있었다.
“이... 이게 지금...”
“가서 그 돈으로 나 사와.”
“싫어요. 내 돈으로 할 거라니까요?”
“내가 채소민하고 결혼하면 내 돈이 곧 채소민 돈이야. 미리 땡겨주는 거니까 가서 그걸로 나 사오라고.”
“그래도 이건...”
“나 사오기 싫어?”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의미 아니면 빨리 나 사와.”
마치 천 원 한 장 주고 마트 가서 과자나 한 봉지 사오라는 것처럼 선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참을 옥신각신 하던 소민이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내가 살 거라구요. 시간이 걸려도 내가 한다는데 왜 그래요?”
“빨리 사달라니까? 내가 미국까지 왜 갔는데.”
“미국까지 왜 간 건데요? 꼭 나 때문에 간 것처럼 그래요? 한선유씨 유명해지려고 간 거잖아요.”
“그래.”
“근데 왜 내가 보낸 것처럼 그래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했다.
“증명하라며.”
“네?”
“채소민을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라면서. 한국에만 증명해서 성이 차겠어? 이제 내가 영화 찍고 유명해지면 전세계 돌아다니면서 내가 채소민꺼라고 말하고 다닐 거야.”
그 말에 소민이 선유를 올려다봤다. 자신이 증명하라는 말을 한 때, 자기 이미지를 엎겠다고 한 때가 한참 전 일이었다. 그럼 그 때부터 소민이 꿈을 꾸기 전부터 선유는 꿈을 꾸고 있었단 얘기였다. 계속해서 둘이 함께 하는 그런 날을.
이미 기다릴만큼 기다린 사람을,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이미 넘치도록 증명하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계속 기다리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소민의 입에서 항복이 떨어졌다.
“알았어요. 내일 가서 한선유씨 어머니한테 한선유씨 사올게요.”
그리고 그제야 그가 환히 웃어보였다.
*
벌써 세 번째. 삼고초려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소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지난 번에 그렇게 몰아붙이듯 쏘아버리고 나온 터라 세란이 문을 열어줄지도 미지수였다.
“안되면 담이라도 넘지 뭐.”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안에서 문이 열리고 세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디 가세요?”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와라.”
“기다리셨다구요?”
소민이 뭐라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란이 안으로 향했다. 세란의 뒷모습을 보던 소민이 가방 안에 든 하얀 봉투를 확인하고는 세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쇼파에 앉은 둘 사이에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침묵이 오고 갔다. 기다렸다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세란을 바라보다 소민이 결국 입을 열었다.
“한선유씨... 저 주세요. 제가 어머님 정을 대신 줄 수는 없겠지만 제가 줄 수 있는 애정 다 줘서 어떻게든 한선유씨 안 외롭게 해줄게요. 한선유씨, 한선류씨 두 이름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인데. 그 두 이름이 허전하지 않게요. 그러니까 선유씨, 저 주세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이거... 고민했어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근데 한선유씨가 자기를 사달라고 하는데 전... 그것까지 거절하지는 못해요. 너무 갖고 싶은 사람이거든요.”
소민의 말에 세란이 하얀 봉투를 내민 소민을 바라봤다.
“선유가... 전화를 했다. 한 번도 먼저 전화 안 하던 애였는데. 내가 자기 공간에 아니지, 자기 생활에 조금이라도 비집어 드는 것 같으면 치를 떨던 애가 네 얘기를 하더구나.”
의외의 말에 소민이 눈을 크게 뜨고는 세란을 바라봤다. 그렇게 말하는 세란의 눈언저리가 약간은 붉은 듯도 보였다.
“상처주지 말라고. 자기한테 하는 건 몰라도 너한테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던 세란이 고개를 숙이더니 한참이나 잠잠히 있었다. 그런 세란을 바라보는 소민 역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침묵을 지켰다. 아니, 말이 떠오른다고 해도 지금은 세란이 자기 스스로를 추스르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이윽고 세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더구나. 내 아들인데... 내가 엄만데... 그 애를 몰랐다.”
그렇게 말한 세란이 소민이 앞에 둔 하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정말 저 돈을 받으려고 하는 건가 하는 실망감이 밀려오는 소민에게 세란이 다시 돈 봉투를 돌려주며 말했다.
“이 돈은... 과한 것 같구나.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자꾸나.”
그렇게 말한 세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민이 물었다.
“나중에요? 결국 돈을 받으시겠단 말씀이세요?”
그 말에 돌아서 방으로 향해 가던 세란이 돌아봤다.
“물론 우리 집이 많이 부족하기도 하고 선유가 너 없으면 죽고 못산다 하긴 해도, 예의상이라는게 있는 법이니까 예단비는 차차 같이 고민하자꾸나.”
그렇게 말한 세란이 방 안으로 사라졌고, 소민이 세란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예... 단비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민이 세란이 들어간 방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외쳤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님. 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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