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수갑이래
102
“아... 머리야...”
무언가 숨이 막히는 느낌 그리고 아픈 머리에 소민이 눈을 떴다. 깜깜했다.
“뭐야. 왜 깜깜해?”
그렇게 말한 소민이 몸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세상이 밝아지며 눈부신 빛이 그녀의 눈을 강하게 강타했다.
“아, 눈부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아직 빛에 적응되지 못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분명한 건 자신의 방은 아니었다.
“뭐야, 여기 어디야?”
사방이 트인 유리에 당황하며 소민이 보다 찬찬히 주변을 살피다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으아악!!! 당신 누구야!!!”
눈에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알 수 없는 두건을 쓴 남자가 옆 자리에서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비명에 남자가 잔뜩 인상을 쓰며 스르르 일어났다.
“아, 시끄러워.”
그 목소리에 소민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한선유씨?”
“그래.”
담담한 대답에 소민이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여기서 뭐해요?”
“뭐하긴. 자고 일어났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오디션 본다고 미국 간 사람이 여기 왜 있냐구요.”
“그러게. 내가 여기 왜 있을까?”
태연하게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모습에 소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남자가 돼가지고 포기하고 돌아온 거예요? 아니,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를 썰던가. 아, 한선유씨는 무 싫어하니까 배추라도 썰던가 해야지. 그렇게 인내력이 부족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내가 기다려준다고 했으면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거 아니에요. 꿈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머리도 아픈 김에 짜증짜증을 내며 소민이 그렇게 다다다다 쏘아 붙였고, 선유는 소민이 뭐라고 하든 말든 쓰고 있던 두건을 벗고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내 말 안 들려요? 아니, 내가 꿈이라더니 어쩌면 그렇게 태연하게...”
그렇게 말하던 소민이 일순 행동을 딱 멈췄다.
“설마...”
“설마 뭐?”
시큰둥하게 묻는 그의 표정에 소민이 한참 흐려진 얼굴로 말했다.
“내가 꿈이라더니 다른 사람으로 바뀐 거예요? 그래서 그냥 돌아온 거죠? 지금 나한테 이별 통보하려고 나 차에 태우고 기다린 거고.”
“하!”
그녀의 얼토당토않은 말에 선유는 기가 찬 표정을 지었지만 소민은 오히려 그런 선유의 태도에 자신의 생각에 점점 확신을 갖는 눈치였다.
“싫어. 안 돼! 절대 못 가요. 내가 무슨 일 있어도 한선유씨 안 놔줄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여자더러 포기하라고 해요. 내가 간통죄로!! 아 이건 없어졌지. 아무튼!! 뭐로든 한선유씨는 잡아두고 그 여자는 포기시킬 거예요.”
숨도 쉬지 않고 그렇게 말한 소민이 기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선유의 손을 잡았다.
“나 이제 한선유씨 엄청 좋아한단 말이에요. 아니 그보다 더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허둥지둥 그렇게 말하는 소민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소민은 눈물을 감추려는지 고개를 숙였다.
“어?”
눈물에 반사돼 더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무언가가 그녀의 손목에 걸려 있었다.
“이게 뭐지?”
눈물이 톡하고 떨어지며 온전한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은색의 세공이 독특한 팔찌가 그녀 손목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온전한 형태의 팔찌를 본 소민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한선유씨 어떡해요? 저 어제 술김에 누구 거 막 가져 왔나 봐요. 이거 누구 거지? 이거 세공이 장난 아닌 거 보니까 꽤 비쌀 것 같죠? 좌판에서 팔만한 건 아닌 것 같고 어떤 보석가게에서 가져온 건가? 어떡해. 경찰에 신고 들어간 거 아니야? 그럼 한선유씨한테 피해갈 텐데. 나랑 같이 있어서 공범으로 몰리면 어떡해요. 한선유씨 누가 보기 전에 얼른 가요. 나는 술 취해서 길에 뻗어 있었다고 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차에서 내리려 하는 소민을 선유가 잡았다.
“경찰에서 잡으러 안 오니까 걱정하지 마. 이 여자야.”
“아니, 이거 내꺼 아니란 말이에요. 빨리 가요. 경찰 오기 전에.”
다시 한 번 내리려 시도하는 소민을 선유가 아예 품에 꼭 끌어안았다. 여린 몸이 선유의 품에 딱 맞게 들어왔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왜 이래요. 빨리 놔줘요.”
“그 수갑 내가 채운 거야.”
버둥거리는 소민을 더 꼭 끌어안은 선유가 그렇게 말했다.
“네?”
“그거 내가 어제 채소민 팔목에 채워 놓은 거라고. 왜 엄청 유치한 대사인데 그런 대사 있잖아. 당신을 절도죄로 체포합니다. 내 마음을 훔쳐갔으니까. 판결은 내 곁에서 무기징역입니다. 이런 거. 그런 거라고 생각해 줘.”
나긋나긋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민이 긴장이 풀어진 채 몸을 완전히 선유에게 맡겼다.
“뭐예요!! 완전 놀랐잖아요. 난 내가 술김에 아무거나 막 집어온 줄 알았단 말이에요.”
“채소민씨.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당신 말고 다른 여자를 내 옆에 둘 사람으로 선임할 권리가 없습니다. 뭐? 다른 여자? 내가 대체 무슨 마음을 먹었는데 다른 여자 타령이야.”
선유가 투덜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근데 왜 돌아왔어요?”
아직도 선유가 돌아온 이유를 모르는 소민이 그렇게 물었다.
“왜긴 왜야. 오디션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 알려주려고 왔지.”
“합격했어요?”
“어.”
“진짜요?”
“어.”
“잘 됐다.”
그렇게 말한 소민이 팔을 둘러 선유의 등을 토닥였다.
“수고했어요. 참 잘했어요.”
“내가 7살이야?”
“7살 아닌 거 알죠. 그래도 고생한건 고생한 거고 잘한 건 잘한 거니까.”
“그래.”
“근데 느닷없이 이건 뭐예요?”
“뭐?”
“팔찌요.”
“말했잖아. 수갑이라고.”
“나 참, 이게 수갑이라고 하면 세상 모든 여자가 다 차려고 하겠네요.”
“내가 채우고 싶은 사람은 채소민 하나야. 그건 그렇고 그래서 싫어 좋아?”
“예뻐요.”
“싫어, 좋아?”
“예쁘다니까요?”
“그래서 싫은 거야? 좋은 거야?”
“좋아요!”
페이스북 마냥 좋아요에 집착하는 선유의 태도에 소민이 그렇게 말하자 선유가 말했다.
“그래, 채소민은 날 그냥 좋아만 해줘도 괜찮아. 왜 그런 노래 가사가 있잖아. 내가 널 더 좋아한다고, 남자와 여자 사이엔 그게 더 좋은 거라고.”
“뜬금없이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채소민은 나를 좋아만 해주면 돼. 내가 채소민을 사랑하니까.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지면 사랑하는 건데, 남자랑 여자사이에 그게 더 좋다잖아.”
“그러다가 한선유씨 마음이 마르도록 나한테 퍼주다가 결국에 그 마음이 다 말라버리면요? 일방적인 사랑은 언젠가 마르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안 마를 거야. 채소민이 옆에 있어주면.”
“싫어요.”
“뭐?”
내심 잔뜩 긴장하고 있던 터에 소민이 그렇게 말하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난 싫다구요. 나도 공평하게 주고 싶단 말이에요. 물론 한선유씨가 더 줄 때도 있을 거고, 내가 더 줄때도 있겠죠. 근데 한 번 한 번 그렇게 반복하면 서로 공평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소민의 말에 조용히 있던 선유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채소민.”
“왜요?”
“사랑해.”
“그래요.”
“채소민,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있어요.”
“해 봐.”
“민규가 노려봐요.”
“괜찮아. 차문 잠가놨어. 그거 말고 다른 말.”
“아빠도 노려봐요.”
“뭐?”
소민의 말에 선유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부자가 팔짱을 끼고는 나란히 서서 소민과 선유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선글라스 너머로 눈이 마주친 채종환 감독은 팔짱을 풀고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모습에 선유가 선글라스를 썼음에도 티가 날만큼 잔뜩 굳은 표정이 되었다.
“한선유씨.”
차에서 내리려는 선유의 팔을 붙잡은 소민이 말했다.
“각오 단단히 해요.”
그 말에 선유가 고개를 작게 끄덕하자 소민이 한 마디 더 보탰다.
“힘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 소민이 선유의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왔다.
“나도 사랑해요.”
작지만 너무도 크게 울린 소민의 말에 선유는 용이 와도 거뜬히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위용도 당당하게 소민의 집 거실에 입성했다.
“편하게 있어.”
편하게 있으란 말과는 달리 채종환 감독의 시선은 따끔하기가 바늘과 같아서 자칫하면 온 몸에 구멍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삼악감독이라는 칭호가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래, 내 딸하고 밤새 뭘 했나?”
“잤습니다.”
그의 말에 채종환 감독이 입을 떡 벌렸다.
“저, 저, 썬팅이 됐어도 남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차 안에서?”
“누군가는 봤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러니 책임지겠습니다.”
멀쩡히 손만 잡고, 아니 손도 안 잡고 잔 그가 그렇게 말하자 소민마저 입을 떡하고 벌렸다.
“미쳤어요?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아,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제가 공인이라 누군가에 눈에 띄면 또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소민이 곤혹을 겪을까 셔츠를 대충 두건처럼 만들어 쓰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잔 주제에 그렇게 말을 했다.
“구설수에 오르기 전에 제가 먼저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그랬습니다만, 원치 않으시고 소민이가 원하지 않으면 구태여 일을 벌이지는 않겠습니다.”
태연하게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얼굴을 채종환 감독이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리고 그런 채종환 감독의 시선을 선유가 흔들림 없이 받아냈다. 한참이나 선유를 노려보던 채감독이 한 마디했다.
“나랑 술 한 잔 하지.”
그렇게 해서 대낮부터 벌어진 술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과 술 한 잔 하자고 했지만 채감독 자신은 소주잔에, 분명 찬장에서 언뜻 보였건만 잔이 없다는 핑계로 선유에겐 글라스를 권하는 채감독의 행태에 민규마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딸이랑 헤어지게.”
“그럴 수 없습니다.
잔이 반복될 때마다 같은 말, 같은 대답이 반복됐다. 그렇게 한참을 반복하자 선유는 거의 인사불성 상태였고, 채감독도 얼큰하게 술이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 딸랑 헤어져.”
“구럴 수 웝숨돠.”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혹은 서로 뜻은 알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 다시 얼마나 오갔을까. 결국 끝까지 포기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은 채 선유가 기절하고 말았다. 식탁에 없어져서도 그럴 수 없다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없다를 반복하는 선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감독이 소민을 불렀다.
“너도 쟤가 좋으냐?”
그 말에 소민이 얼굴만 붉히자 채감독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겠다는 듯 한 표정을 짓더니 민규를 불렀다.
“민규야. 한서방 네 누나 방에 모셔라.”
“예. 예?”
자신이 잘못 들었나 아버지인 채감독을 쳐다봤지만 그는 이미 방으로 휘적휘적 들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명령대로 낑낑거리며 자신보다 5cm는 더 긴 선유를 질질 끌어 누나의 방으로 옮긴 민규가 정신을 못 차리는 선유를 바라봤다.
“뭐, 나름 인정. 아버지도 인정했는데 내가 어쩌겠어. 우리 누나 울리기만 해봐. 온 서울시민이 발 한 번씩은 담가봤을 청계천 물을 마시게 해줄 테니까 알아서 잘해라. 자형.”
그렇게 말한 민규마저 방을 빠져 나갔다. 소민은 주방에서 꿀물을 두잔 타고 있었다.
“좋냐?”
“뭐가?”
“한선유가 끝가지 포기하겠다는 말 안 해서 좋으냐고.”
그 말에 소민이 배시시 웃으며 수저로 꿀을 물에 휘젓자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에 걸린 팔찌가 반짝하고 빛을 냈다.
“얼씨구? 그건 뭐야?”
“수갑.”
“뭐?”
“수갑이래.”
선유가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본디 수갑이란 수갑을 채운 사람이 풀어주기 전까지는 벗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게 계속 자신의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이리라. 싱긋이 웃으며 꿀물을 휘젓는 그녀의 손목에서 팔찌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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