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101화 (100/105)

101. 부부일심동체라고 아십니까?

101

소민은 예전에 한 번 와봤던 그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만나자고 한 게 아니어서인지 초인종을 누르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문이 열렸다. 그래도 한 번 와본 곳이라고 이전보다는 안으로 들어가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왔니?”

선유의 모친인 유세란 여사는 지난 번과 다를 바 없이 평이하게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와서 앉아라.”

짜여진 프로세스라도 있는 것처럼 크게 다를 바 없는 멘트에 소민이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쇼파에 가서 앉았다.

“선유는... 잘 지내니?”

“어... 네. 잘 지내요. 미국에 오디션 보러 간 건 아시죠?”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당황했던 소민이 답변했다.

“백대표가 잘 하고 있나보네.”

“네?”

“그건 그렇고. 호기롭게 1억이면 되냐고 하더니 어떻게 된 거야?”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던 소민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다 모으지 못했어요. 1억 모으는 게 뭐 쉬운 줄 아세요?”

“어렵지. 나도 알아. 그 쯤은.”

그렇게 말한 세란이 소민에게 또 다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설마 또...”

지난 번 봉투와는 다르게 황갈색을 띄고 있는 봉투는 작지 않아 보였다. 앙 다문 입술을 하고 봉투를 노려보는 소민을 보며 세란이 입을 열었다.

“열어봐.”

“네?”

“내가 준 봉투, 열어 보라고.”

벙진 표정을 한 소민이 세란이 그녀의 앞에 준 봉투를 열어봤다. 그 안에는 딱 하나의 통장이 들어 있었다. 도장과 함께.

“이게... 뭐예요?”

“선유... 아니 선류가 이때껏 보내줬던 돈이야.”

“이걸... 왜...”

“그거 갖고 선류랑 뭐든 해 봐.”

“뭐든 해보라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한테 1억 갚는다는 생각으로 그 돈 갖고 선류 옆에서 평생 지켜주라고.”

소민이 그 말에 통장과 세란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 소민의 시선을 외면하며 허리를 꼿꼿이 핀 세란이 말을 이었다.

“그 애... 지 잘못도 아닌 지 애비 때문에 나한테 미움 받고 형 죽고, 나 원망하면서 그렇게 정에 굶주려서 살아온 애야. 마음 열었던 기집애 하나는 나처럼 돈에 환장해서 그 애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갔고. 넌 좀 다른 것 같으니까 네가 선류 옆에서 있으라고.”

“그러니까...”

“나 때문에 걔가 삐뚤어졌을지도 몰라. 그래도 참아. 내가 주지 못한 정 줘가면서 그렇게 그 애 옆에서 네가 참으면서 붙어 있으라고. 그 정도 돈이면 충분할 거야.”

세란의 말을 듣고 있던 소민이 손에 들려 있던 통장을 도로 세란에게 줬다.

“뭐하는 거니? 돈 없어도 충분하다, 사랑이면 된다. 배부른 소리 하려고? 그런 사치스런 말, 관두고 갖고 가. 행복하려면 돈도 필요조건이야.”

“그게 아니라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속에 있는 화를 억누르면서 말했다. 선유 대신, 그래 선류를 대신해서.

“왜 어머님이 줬어야 할 정을 제가 줘야 해요? 어머님이 주고 싶었던 정은 어머님이 주세요. 이 돈이 있다고 제가 한선류씨한테 엄마가 될 수 있어요? 제가 줄 수 있는 건! 한선류씨 여자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줄 수 있는 사랑이라구요. 엄마가 줄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요.”

씩씩거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소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잘못했던 거 아시면 이제 더 잘해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한선유씨가 행복해 할 만큼 엄청엄청 잘 해주시면 되잖아요. 이렇게 딱딱하게 돈으로 사람들 움직이려고 하지 마시구요.”

“내가 해준다고... 좋아할 그런 애가 아니야. 이미 그러기엔 늦었고.”

“늦었는지 안 늦었는지 어떻게 아시는데요? 한선유씨가 정말 그런 애 맞긴 해요? 아니 어머님이 한선유씨에 대해 뭘 알기는 아세요?”

“내 배에서 나온 애야. 모를 리가 없지.”

“그럼 완전히 착각하고 계시네요. 한선유씨가 연예계에 발 들이면서 과거 얘기 하지 말라고 한 이유, 알고 계세요? 어쨌든 하나 남은 핏줄이라고. 당신이 어떤 여잔지 행여라도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서, 남들이 당신 욕할까봐. 그게 걱정돼서 알리지 말라고 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입 다물고 가족 얘기는 절대 안 하는 사람이라구요. 가족을 핑계로 임지유씨가 자기를 밀어낼 때도, 자기 잘못도 아닌데도 한 번 붙잡아보지도 못 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인데... 한 번쯤은 붙잡아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태까지 밀어내기만 했으면 이제 좀 잡아주시면 안 돼요?”

“그래서... 너한테 돈 주잖니. 그 돈으로 나 대신...”

“꼭 하나부터 열까지 돈으로 계산하셔야 해요? 한선유씨가 상처로 너덜너덜하면서도 왜 연예계에 있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형이 유일하게 행복했던 곳이니까, 어머님 애정을 받아서 형이 행복했던 곳이니까. 형 대신, 형 꿈 이뤄 주려고 그랬대요. 한선유씨는 돈이 아니라 형에 대한 그리움에, 엄마 애정이 고파서 자기 발로 그 길을 선택한 거니까,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만해.”

“제가 지난 번에 여쭤봤죠? 정말 한선유씨 어머니 맞냐고. 엄마가 어떻게 아들하고 돈으로 계산을 해요? 아니, 엄마 정이 돈으로 계산이 되기나 하는 거예요? 제가 한선유씨라면 이런 돈 말고 엄마가 꼭 한 번 따뜻하게 진심으로 안아주는 거, 그거 하나가 더 절실할 것 같아요. 미안하다고, 그동안 고생많이 했다고. 이제 앞으로 사랑해주겠다구요. 한선유씨가 그랬던 것처럼요.”

소민이 토해내는 말을 멍하니 듣던 세란이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안으로 사라졌다.

“어디 가세요!!”

소민이 불러도 걸음을 옮긴 세란은 방으로 들어갔고, 방문은 안에서 굳게 닫혔다.

*

“아아아아악!! 어떻게 해!! 너무 주제 넘었나? 그래도 할 말이긴 했는데... 아니야, 그래도 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지 말긴 뭘 하지 마. 여태껏 그 사람이 얼마나 맘 고생했는데! 근데 그건 내 문제는 아닌데... 아니지, 그게 왜 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애인인데? 혹시 알아? 나중에, 어... 나중에 결혼하자고 하기라도 하면 내 문제지? 아니야, 그럼 그 사람 어머니가 시어머님이 되는 건데. 망했어. 망했다고.”

벌써 유세란 여사를 보고 온지도 닷새째, 소민의 얼굴은 이미 사람이길 포기한 듯 한 얼굴이었다. 반복되는 자괴감과 반복되는 자기변명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절규어린 혼잣말에 민규는 그녀만 봤다하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즉시 유턴을 일삼았다. 채종환 감독이 바깥일에 바빠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소민의 얼굴을 보고 당장 유세란 여사를 찾아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회식자리에서도 소민의 걱정은 끊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주사에 섞여 나온 한탄은 갈수록 심화 돼 가고 있었다.

“워떡카냐고. 흐엉!”

아예 오열할 기세인 소민의 작태에 보다 못한 막재 FD가 소민을 짊어지고 일어섰다. 그리고 걸으면 걸을 수록 소민의 술주정은 심화과정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감독님!! 어뛓케 생각하십뮈꽈아!!

“어떻게 생각하긴 뭘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채소민씨가 나한테 주정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흑... 불쌍해. 불쌍하돠구요!!”

“내가 불쌍하면 하지 마요, 주정!!”

막내인 죄로 회식자리에서 고기만 굽다 나온 것도 서러운데 소민의 주정까지 감당하려니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겨우 겨우 소민의 집이 있는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 때였다.

“이 봐요. 당신 누구십니까.”

소민을 부축하던 FD가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어? 한선유씨?”

“네. 제 이름이 그거인 건 저도 아는데, 그 쪽은... 뭐하시는 겁니까.”

“예?”

가로등 불빛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봐도 감탄할 만큼 잘생긴 한선유가 자신을 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 왜 한선유가 자신에게 그런 날 선 태도를 보이는지 알 길이 없는 그가 되물었을 때였다.

“엉? 한서뉴랑 달문 사라뮈네. 우리 한서뉴는 아뭬리콰에 가써요. 나보고 고무쉰 거꾸로 신쥐 말뤠놓고! 왜 안 오능겅데.”

누가 봐도 술에 취한 혀가 꼬부라진 소리를 하는 소민의 모습에 선유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지금 술 취한 여자 끌어안고 수작 부리시는 겁니까?”

더욱더 험악한 표정을 한 선유가 남자에게 으르렁거렸다.

“아니, 이건 오해예요. 저는!!”

그렇게 말하는데 소민이 갑자기 허리를 수그렸다.

“우웩. 토할꺼 같뉀.”

“괜찮아?”

푹하고 고꾸라질 것 같은 소민을 황급하게 받친 선유가 그렇게 묻자 소민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뻥이지롱?”

어지간히 술에 취했는지 소민은 술김에 장난이라면 헤실헤실거리고 웃었다. 선유와 머리 하나는 차이 날 것 같은 FD가 소민을 부축하는 선유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채소민씨랑 아는 사이십니까?”

“아닙니다.”

“예?”

아는 사이도 아닌데 소민과 무슨 관계냐고 묻는 선유의 태도가 이해가 안 되는 찰나였다. 선유의 잘 생긴 입술이 다시 열렸다.

“혹시 부부일심동체라고 아십니까?”

“예?”

“제가 채소민이고, 채소민이 저란 소리죠.”

“채소민씨는 아직 결혼은 안 하신 걸로 아는...”

그렇게 말하던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선유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기어이 내 몸에 수작을 한 번 부려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그건 오햅니다."

“오해? 술취한 김에 오예하려던 건 아니시고요?”

“소민씨가 감독님하고 회식자리에서 끝가지 마시다가 너무 취해서 집에 데려다 주러 온 겁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어도 그걸 왜 네가 알려고 하냐고 그래서 여기까지도 겨우 겨우 달래고 얼러서 물어물어 온 거거든요.”

어지간히도 억울한 지 FD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그리고 저도 집에 저만 기다리는 토끼같은 마누라가 있거든요?”

“그래!! 내가 잘 가따오라고!!! 기다린다고 했는뒈 왜 안 와!! 이 나뿐 놈!!”

때를 맞춰 그렇게 답하는 소민의 모습과 남자를 번갈아 보던 선유가 사태파악이 된 듯 한층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그럼 채소민은 저한테 맡기고 이만 토끼같은 마누라라고 표현하신 분께 돌아가시죠.”

“안 그래도 그 말을 하려던 참입니다.”

해방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소민을 아예 선유에게 덥석 안기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이씽. 언제꽈쥐 기다려야 하는궈야. 확 미국까지 가볼까부다. 보고시픈데 왜 안 오냐고오오오오”

술에 취한 소민은 전화기 너머로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깜찍하기 이를 데 없는 진심을 늘어놓고 있었다. 너무 태연한 듯 한 소민의 태도에 짐짓 당황스러웠던 지난 날을 떠올리며 선유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숭이었구만. 취중진담을 들었으니 그건 용서하기로 하고.”

이대로 소민을 들여보내기 아쉬운 선유가 자신의 차 보조석 문을 열고는 소민을 태웠다. 그리고는 차 시트를 뒤로 눕혀 소민이 눕게 만들었다.

거리에서는 중얼중얼 말이 많던 소민은 막상 차 안에 눕혀놓자 금세 잠이 들었다. 소민이 추울까 차 안에 있던 자신의 옷가지로 덮어준 선유가 운전석 시트도 뒤로 눕히고는 잠든 소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차 안 가득 소민의 향기(라기보단 술 냄새)와 소민의 숨소리가 가득 찼다.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아까는 느끼지 못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역시 구미호야. 오자마자 또 홀렸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면 선유가 피식 웃었다. 홀렸지만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평생을 산다 해도 억울하다거나 벗어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나마 한 발짝 다가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겠지만 소민이 옆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엄홍길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같이 넘어 줘.”

그렇게 중얼거린 선유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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