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막 서로 가두고 좋네
98.
사람들을 피해 발코니로 나간 둘은 소민의 딸꾹질이 멎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동안 선유는 아까는 분기탱천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소민의 모습을 찬찬히 감상했다. 이제 보니 어떤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혼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부케만 없을 뿐 마치 신부인 듯 보였다. 그녀의 뒤로 예식을 올리는 듯 한 배경이 보이는 것만 같아 선유가 숨을 들이켰다.
“아직 한 발짝도 못 내딛고는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꼴이군.”
피식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어느 새 딸꾹질이 멈춘 소민이 다가왔다. 그런 소민을 잡아 끈 선유가 커튼 뒤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시끄러운 내부와는 좀 더 동떨어져 둘 만이 있는 듯 한 그 공간이 주는 기묘함은 순식간에 소민을 사로잡았다.
“뭐, 뭐하는 거예요.”
“가만 있어봐. 이렇게 하고 와서 대체 몇 놈이나 홀리고 다니는 거야.”
“홀리긴 뭘 홀려요. 한선유씨야 말로 여자 연예인들이 다 한선유씨만 보더구만. 신이 나서 사방으로 돌아다니기나 하고. 아주 재미있죠?”
“재미없어. 채소민이 이 남자 저 남자 시선을 다 끌어 모으고 다니는 게 재미있을 리 없잖아.”
질투를 숨기지 않고 투덜대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깍지 껴 넣었다. 나란히 맞잡게 손을 포갠 채로 소민이 선유를 보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뭐가?”
“재밌었다고 하면 들어가서 확!”
“확 뭐?”
“치마단 잘라내고 댄스파티라도 벌이려고 하던 참이거든요.”
“그러기만 해 봐. 자루푸대에 담아서 집에다 데려다 놓고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할 테니까.”
“그것도 재밌긴 할 텐데.”
“뭐?”
“예전 생각나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아직 그녀를 좋아하게 되기 전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노란 병아리 같은 모습을 하고는 밥차까지 그를 따라왔던 그녀가 말했더랬다.
“글쎄요? 뭐 제가 지금 빠순이라고 칩시다. 근데 제가 영원히 그 쪽 빠순이란 보장 있어요? 사람 마음은 금방 바뀌는 거예요.”
“나한테 빠진 사람이 마음이 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텐데?”
“전 그렇고 그런 사람들하고 달라서요.”
“그래? 그럼 그런 날이 오면 알려줘.”
“왜요? 저 어디 야산에 묻기라도 하시게요?”
“아니. 잡아다가 내 집에 감금해놓을 거야. 집 안에 감금해놓으면 어디다가 제보하지는 못하겠지. 감시 안에 두면 관리도 쉬울 거고.”
“절 먹여 살리시겠다는 소리예요?”
그 때는 그런 생각을 현실로 옮기고 싶은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더랬다.
“그래서, 채소민 지금은 어때?”
“어떠냐니요?”
“지금은 어떠냐고. 나한테 좀 빠졌는지, 아닌지.”
“글쎄요?”
“아직도 아니야?”
“음... 다른 사람은 모르는 한선유씨의 은밀한 매력에 허우적거리는 중이죠. 다른 부분이 또 있다고 하면 아마 질식사할 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스타카토 음절로 그렇게 말하더니 뒷말이 입 맞추지 않고는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무 여자한테나 그 은밀한 매력 흘리기만 해봐요? 집에다가 꽁꽁 싸매놓고 감금해놓을 거예요?”
좋아한다는 고백으로도 모자라서 깜찍한 질투까지 선보이는 그녀 탓에 숨이 가빠진 선유가 소민이 산소호흡기라도 되는 듯 그녀의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멘트 아무 남자한테나 흘리기만 해봐. 예를 들면 아까 그 찰리인지 칠리인지 하는 놈 같은 그런 놈 말이야.”
“어쩔 건데요?”
간도 크지. 그렇게 묻는 소민을 도망가지 못하게 잡으려는 듯 선유가 꽉 끌어안았다.
“집에다가 꽁꽁 싸매놓고 감금해 놓지, 뭐.”
“한선유씨가 나 먹여 살리게요?”
예전과 비슷한 그녀의 말에 선유가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는 말했다.
“얼마든지.”
농담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 선유의 어조, 그 말이 얼마나 달콤한지 소민이 확 붉어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 조. 좋네요! 감금커플. 막 서로 가두고 좋네.”
“그러니까 말이야. 천하의 채소민이 날 가둬두겠다고 말할 날이 올 줄 내가 알았겠어?”
피식거리며 기쁜 티를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선유를 홍당무와 같은 밭에서 나온듯한 얼굴색을 한 소민이 선유를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아, 맞다! 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 그 은밀한 매력에 벌써 홀린 여자인가?”
“홀리기는 무슨.”
“그럼 누군데요?”
“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죠.”
“그럼 안 알려줄래.”
“왜요? 아니 대체 왜?”
“그냥 나에 대해 계속 궁금해 하라고.”
“뭐요?”
“난 채소민한테 안 알려준 게 없어서 신비주의가 워낙에 떨어지니까 말이지. 조금이라도 신비해보려고.”
“헐. 하긴 난 한선유씨가 얼만지도 아는 사람이니까. 그 여자는 한선유씨 얼만지 모르죠?”
“무슨 소리야?”
“궁금해요?”
“당연히 궁금하지. 나도 모르는 내 가격이 뭔데?”
“그런게 있어요. 궁금하면 그 여자가 누군지 알려주든가.”
소민의 말에 선유가 피식 웃으며 항복했다. 질투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런 건데 소민은 역으로 그걸 이용하니 당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지도 않았지만.
“영어 선생님이셔.”
“영어요?”
그제야 선유가 안에서 외국인 감독들하고 인사를 나누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거였구나.”
“왜. 바람이라도 피는 줄 알았어?”
“설마 그러기야 하겠냐고 생각은 했어도 자꾸 옆에 나말고 다른 여자가 있으니까 성질이 나죠, 뭐.”
새침한 소민의 목소리에 선유가 피식 웃었다.
“내가 채소민을 두고 어딜 감히.”
선유의 말에 그의 입술에 살짝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뗀 소민이 말했다.
“나 가고 나서도 한 눈 팔면 안돼요? 아까 봤죠? 여기 내 편 많거든요?”
“가게?”
“한선유씨가 한 눈 팔지 말래서 이제 가려구요. 나도 모르게 내 매력을 흘릴지 모르는데 가지 말고 계속 옆에 있어요?”
제일 먼저 그 매력에 압도당할 위기인 선유가 황급히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
“가. 어서 가.”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향해 살며시 손을 흔든 소민이 테라스에서 빠져 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선유는 선선한 바람을 한참이나 느끼며 서 있었다.
*
사전제작드라마의 촬영도 막바지인지라 소민은 선유의 얼굴을 간혹 가다 보는 정도에 이르게 됐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수많은 스텝들과 배우들 보기 민망해서라도 자주 현장에 가는 것이 미안할 지경이었고, 선유도 그 현장에서 나오는 게 어려워서 자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이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걸로 좀 봐 줘라. 내가 다같이 1화를 봐야 한다는 걸 나는 민망해서 혼자서 모니터링하겠다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왔다니까? 내가 왜 그랬겠어? 채소민이랑 잠깐이라도 있을 시간을 만들려고 그런 거잖아.”
본의 아니게 견우와 직녀를 찍게 된 견우의 입장인 선유가 자신의 집 소파에 앉아 잔뜩 토라진 얼굴을 한 직녀 역할의 소민을 향해 그렇게 통사정을 했다.
“흥! 매일매일 전화라도 했으니까 봐주는 건 줄 알아요.”
촬영이 끝나가는 만큼 드라마도 방영을 맞게 되었고, 첫방송은 그녀와 함께 보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한 그의 전화에 부리나케 달려온 그녀였다. 뾰로통하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선유의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아 소민이 혹시 몰라 몰래 갖고 온 그녀의 아빠가 늘 챙겨 먹는 보약을 그에게 건넸다.
“이거 뭔데?”
“뭐긴 뭐예요. 몸에 좋은 거지.”
그렇게 말한 소민이 선유가 약을 다 먹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초콜릿을 까서 그의 입에 쏙하고 넣어줬다.
“채소민, 무섭게 왜 이래? 나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말없이 입에 꾹꾹 초콜릿을 넣어주고 있는 소민을 향해 선유가 그렇게 물었다.
“시끄러워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가지고 온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서 무언가를 한 장 꺼내고는 쿠션을 자신의 무릎에 얹었다. 그리고는 쿠션을 팡팡 내리치며 한마디를 날렸다.
“누워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선유는 또 소민의 말대로 누웠다. 그런 그의 얼굴에 가방에서 꺼낸 팩을 얹어주며 소민이 잔소리를 늘어놨다.
“아니, 촬영장에서 밥 안 먹어요? 볼은 홀쭉하게 해가지고 안쓰럽게 보이잖아요. 그리고 코디 새로 구했다면서요. 그 코디는 남의 남자 얼굴을 이렇게 까칠하게 만들어 놓으면 어떡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가서 지키고 있을 수도 없고.”
잔소리와는 다르게 소민의 손길은 다정하고 부드럽기 이를 데 없어서 선유는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팩하는데 누가 자꾸 웃으래요?”
“누가 하도 귀엽게 굴어서 안 웃을 수가 없네.”
“웃지마요. 팩하는데 웃으면 주름진단 말이에요.”
“채소민. 자꾸 나 자극하지 마. 안 그래도 꿈이 큰데 여기서 더 키우면 나중에 그 뒷감당을 어쩌려고?”
“뭔 소리예요.”
“어? 시작한다.”
소민에게 아직은 다 말할 수 없는 단계라 선유가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다행히도 소민은 별 생각 없이 그의 의도대로 순순히 관심을 그의 드라마로 옮겼다. 드라마는 첫 화, 첫 장면부터 그가 고생한 만큼, 또 소민이 고생한 만큼 연출이나 각본이 훌륭했다. CBC의 구원투수로 손색이 없을 듯 했다.
“확실히 정작가님이 다르긴 하네요. 그죠?”
“그러니까 스토리도 매끄럽고 군더더기도 없고.”
자신들의 수고는 잊은 듯 작가를 칭찬하던 소민이 뜬금없이 물었다.
“맞아요. 그러니까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그래. 고마워. 고마워 죽겠어, 채소민.”
“별로 안 고마운 것 같은데?”
그의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곱게 눈을 흘기는 소민을 향해 선유가 웃으며 말했다.
“고맙지. 왜 안 고맙겠어. 채소민이 그 때 나한테 캐스팅 안 들어왔으면 내가 어디 이런 여자를 만났겠어?”
“알아주니 다행이네요.”
자못 뻐기며 말하는 소민 덕에 선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일어나 소민이 얼굴에 붙여준 팩을 떼어냈다.
“어디 봐봐요.”
그런 선유의 얼굴을 끌어당겨 꼼꼼히 확인한 소민이 중얼거렸다.
“음... 아까보다는 훨 낫네.”
그런 소민을 쳐다보던 선유가 문득 물었다.
“채소민. 채소민은 군대 간 동생을 기다릴 때 기분이 어땠어?”
“뭘 어때요. 가면 가는가보다. 오면 오는가보다 하죠. 가끔 보고 싶을 때도 있긴 했지만. 근데 그건 왜요?”
“채소민 남자친구가 군대에 간다고 하면 채소민은 어떻게 할 거야? 기다릴 건가? 아니면 고무신 거꾸로 신을 건가?”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니에요? 기다릴 가치가 있으면 얼마든지 기다리겠죠.”
“그럼 나 같은 남자친구는?”
“한선유씨가 군대를 간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던 소민이 순간 입을 딱 벌리고는 선유를 바라봤다.
“설마!! 군대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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