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남녀싸이에 칭구가 어뒤쒀
97.
“무슨 엄마가 개미 똥구멍만도 못 해. 1억? 웃기시네.”
있는 대로 씩씩거리며 집에 도착한 소민을 반긴 건 그의 아버지 채종환 감독이었다.
“오~ 딸내미!! 힘 좀 줬어? 아빠 얼굴 확실하게 살겠어.”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소민이 물었다.
“아빠. 나 얼마짜리야?”
“뭐? 우리 딸을 어떻게 값을 매겨. 백만불을 갖고 와 봐라. 내가 바꾸나.”
“그치?”
“왜, 누가 우리 딸 더러 뭐라 그래?”
“아니야. 참! 나 오늘 바쁠 거야.”
“바쁘다니? 아빠랑 가는 거 아니었어?”
“갈 거야.”
“근데 뭐가 바빠?”
“가서는 아빠랑 안 있을 거거든.”
“뭐? 누구랑 있게?”
그 말에 소민이 채종환 감독을 보며 싱긋 웃어보이고는 말했다.
“남사친이랑.”
“남... 뭐?”
“이따 보면 아빠도 알 거야.”
그렇게 말한 소민이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는 나왔다. 그녀의 변신은 꽤나 성공적인 듯 싶었다. 그녀의 아버지 채종환 감독과 집을 나서던 중 마주친 그녀의 동생 민규는 한동안 뻐끔거리더니 한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누구세요?”
그 말에 채종환 감독은 민규의 그의 뒤통수를 때리려는 시늉을 했지만, 소민은 확신했다.
‘아, 몰라볼 정도로 변했구나. 사람이 되었구나.’
그리고 그 확신은 파티장에서 더욱 여실히 증명됐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기도 전에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그녀의 모습에 홀린 듯이 쳐다봤다. 뭐, 그도 그럴 수밖에.
가만히 있어도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가진 그녀가 연예인들이 하는 화장을 하고 나타난 것도 그런데,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그녀의 어머니 정명자 여사가 오로지 자신의 딸을 위해서 만들어 준 옷이었다. 단 한 벌의 맞춤제작을 일류 디자이너로부터 받은 셈이니 그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이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보다 눈부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깔끔한 업스타일 헤어에, 신부가 입을 법한 순백의 머메이드 스타일 롱드레스는 그녀가 마치 이 파티의 메인으로 보이게 할 정도였다. 거기에는 그녀의 몸매 역시 한 역할을 했다. 여자배우들은 질투 혹은 선망의 눈빛으로, 남자배우들은 어떡하면 말을 한 번 섞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그녀를 스캔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소민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만이 관심사였다. 1억을 주고 사겠다고 마음 먹은 남자, 선유가 오는가, 안 오는가.
“흥, 안 오면 기사라도 보게 만들 테다.”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빙고. 아빠 나 가 볼게.”
그 말과 함께 채감독이 잡을 틈도 없이 인파 속으로 사라진 소민은 목표물을 향해 강렬한 눈빛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누가 봐도 봐달라고 봐달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을 못 느꼈는지 돌아보지를 않았다.
역시 세상에 텔레파시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서두를 필요가 없다 판단한 소민이 잠시 후를 기약하고는 드레스를 입기 위해 비워둔 배를 달래줄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돌아본 곳에는 아까 그녀가 끈질기게 시선을 보냈던 이가 서있었다. 그 사람을 확인한 소민이 활짝 웃어 보였다.
[찰리!]
“쏘민. 한쿡말 마니 배워써. 나.”
영어로 인사하는 그녀의 말에 서툴게 발음하면서도 많이 배웠다고 웃으면서 말하는 그의 모습에 소민이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반갑기도 하고 한국말을 배웠다고 더듬더듬 자랑하는 그가 기특하기도 했다.
[찰리, 많이 컸네?]
그녀의 말에 찰리가 한참이나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젓고는 이내 영어로 말했다.
[무슨 말이야?]
[키가 더 컸다고.]
그녀의 말에 그가 그제야 이해가 된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했다.
“나 컸어 키. 왜 쏘민은 커?”
그의 말에 소민이 자신의 한쪽 발을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그녀가 신은 힐의 높이를 본 찰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말했다.
“쏘민, 거쥣말이야.”
“뭐가?”
느닷없는 거짓말이라는 소리에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힐을 신어서 거짓말이라는건가 싶었는데 다음 말에 소민이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촬리 보러 와. 했는데 안 와입니다.”
찰리는 그녀가 해외에서 잠시 아버지의 일을 도왔을 때 만난 배우였다. 그 때야 신인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를 찍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를 돕는 일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며 그를 만나러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었던 것이다. 뭐,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빈말이었지만 약속을 중요시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빈말이라 인식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음... 미안해 찰리.”
“죵말 미안햅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요상하고 웃긴 발음이었지만 소민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찰리가 활짝 웃더니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사람들의 이목을 다시 한 번 끌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나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해외 배우가 서슴없이 포옹을 하는 여자라니 더더군다나 호기심의 게이지는 높아져만 갔다.
[찰리, 여긴 서양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안으면 사람들이 오해한다구. 그리고 아직 때가 아니야.]
“크렀습니까?”
“그래.”
그녀의 말에 찰리가 씨익 웃고는 말했다.
[대체 어떤 남자길래 소민이 이런 연극까지 부탁한 거야?]
[있어. 잡은 것 같다가도 보면 안 잡힌 것 같은 그런 물고기 한 마리.]
[흐응~ 소민 지금이 때가 아닌 것 맞습니까?]
[그렇다니까? 아직 안 왔어.]
[이따가부터 하면 연기가 안 사니까 나는 지금부터 시작할게.]
“뭐?”
그녀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찰리가 그녀의 얼굴을 잡더니 양 볼에 입 맞췄다. 그녀의 볼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이 순간 가장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1위에 빛나는 그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그녀는 마음 속으로 OMG를 수도 없이 외쳤다.
‘내가 도발을 원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요. 하느님!!’
과정이야 어쨌건, 그녀는 확실히 그에게 불을 지른 셈이었다. 그의 온 몸에서 불길이 솟아 나오는 듯한 CG효과가 보이기까지 했고, 익숙한 그 느낌의 소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맹세컨대, 그녀는 그가 저 정도로 열 받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나이스 타이밍에 이미 쏟아진 물, 아니 타오르는 불이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상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찰리를 밀어내고는 그를 향해 살며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아까보다 더더욱 분기탱천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인사가 그를 더욱 열 받게 만든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 역시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나이스 타이밍. 맞지?]
찰리가 그렇게 물었고 그녀는 얼어버린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그래, 찰리가 눈치는 드럽게 빠르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옆에 서있기만 하는 데도 어지간히 노려보던데, 인사하고 나니까 슈퍼맨처럼 눈에서 레이저라도 쏠 것 같은데? 하긴 여긴 동양이니까. 우리식 인사를 인사로 받아들이지 않겠지?]
저 불붙은 CG같은 모습이 그녀만 보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분명 입구와 그들이 있던 곳까지는 꽤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는 마치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하기야 피하고 싶은 순간은 늘 빠르게 다가오는 법이지만.
“누구야.”
찰리를 무시한 채 그렇게 물은 어마무시한 얼굴의 선유를 향해 소민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선유가 정말 찰리를 몰라서일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뭐라고 설명해야 할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게 통성명인지 아니면 그녀와 찰리의 관계에 대한 해명인지 알 수 없었다.
“음... 선유씨, 여긴 찰리. 제 친구예요. 찰리, 여기는 내 남자친구. 한선유씨야.”
고민 끝에 나온 답이 저거였는데 두 남자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반카워요. 써뉴.”
“친구? 친구? 남녀사이에 친구?”
“마따. 한국 말에 그런 말이 이따면서요? 남녀싸이에 칭구가 어뒤쒀.”
찰리의 말에 선유는 기가 찬 듯한 웃음을 지었다. 소민 역시 찰리의 말에 기가 막힌 건 마찬가지였지만, 사태가 더 커지지 않게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에게 부탁을 하긴 했지만 예전부터 찰리는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도 불 난 것 같은 그에게 저렇게 도발을 하는 듯 한 미친 대사를 내뱉을 리는 만무했다.
“저 놈이 뭐래? 그리고 아무나 그렇게 발전하는 줄 알아?”
말투는 의문형인데, 그 물음에서는 엄청난 자제의 향기가 느껴졌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억지로 화를 누르고 참는 게 느껴졌다.
“음... 나는 놈 아니고, 쏘민운 아무나 아닙미다.”
찰리의 말에 선유가 뚫어져라 그녀와 찰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빛에 소민은 자신이 먼저 시작한 일에 오금이 저려왔다. 그리고 이젠 찰리를 잡고 멱살이라도 흔들고 싶었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는 알고 있는 건지...
[찰리, 적당히 해.]
“OK.”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살거린 심상치 않은 어조에 찰리가 이제야 사태파악이 된 건지 순순히 물러났다. 그리고 소민은 찰리의 뇌에 정상적인 생각이 들어 있는 건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찰리는 예전부터 이상한 아니,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촬영장에서 진검을 들고 칼춤을 출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안녕하세요.”
묘한 긴장감이 실린 기류를 뚫고 인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소민이 살피는 눈으로 인사를 건넨 대상을 쳐다봤다. 분명 입구까지 선유의 에스코트를 받고 들어온 인물이었다. 아니 여자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만.
“예. 안녕하세요.”
그녀가 떨떠름하게 그렇게 말했다. 연예인은 아닌 것 같았다. 뭐 썩 안 좋은 외모는 아니었지만 눈에 익은 외모도 아니었고, 나름 평범한 얼굴이었다. 지금은 꾸며놓으니 예뻐 보이는 걸거라고 소민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설마, 정말 바람피는건가? 아니면 또 다른 계약인 건가? 그가 자신의 이미지를 엎겠다고 했는데 설마 또 계약을 했을까? 하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갔다.
“누구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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