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저렴하네요. 한선유씨
96.
“야. 채소민이 왜 그럴 것 같냐?”
자신에게 묻는 선유의 말에 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둥이라고 소문은 났는데, 그게 죄다 가짜이다 보니 완전 거의 백지에 가까웠다. 종이문서 상에 계약으로만 접촉이 된 사이일뿐 감정접촉이 없는 까닭에 지금 같은 일만 생기면 선유는 자신을 지식인처럼 사용했다.
“형님. 반대로 생각해 봐요.”
“뭘?”
“소민누님이 만약에 어젯밤에 전화를 안 받았어요. 근데 연락도 없어요. 그리고서 다음날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안알랴줌. 이러면 어떨 것 같아요?”
“채소민이 왜 그래야 하는데?”
“그럼 형님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나야. 오디션 준비하는 게 창피하니까 그런 거고.”
“소민누님도 화장실 가서 씻느라 그랬다고 그러면요?”
“그게 왜 창피한데?”
“형님은 왜 창피한데요? 더 큰 물로 가서 더 멋진 사람이 되려고 오디션 준비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창피해요?”
“아니... 그래도.”
소민이 그런 엄청난 집안의 딸이란 걸 안 뒤로 땡잡았다는 기분이 아니라 자신이 너무 모자란 건 아닌가 전전긍긍인데, 그 모습을 어떻게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본인이 생각해도 지난 날은 너무 창피했다. 백치미 카사노바 컨셉이라니. 거기다 자신의 집안 이야기까지 하고 난 후였다.
아무리 솔직한 게 좋다고 하지만 그녀의 집안에서 부족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할지 몹시도 불안했다. 게다가 오디션 준비를 위해 영어공부를 한다고 하면 그녀가 뭐라고 생각할지... 너무 공부를 오래 쉰 머리가 요새는 잘 안 굴러가는 것 같아 안 그래도 힘든 참이었다.
“내 지난 과거가 너무 흑역사라서 그래.”
그 흑역사가 쉽게 끝날 게 아닐텐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준영은 연애상담소 노릇을 계속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누님이 아, 애정이 식었구나. 나도 다른 남자를 찾아 봐야겠다 하면 어쩌실 건데요.”
“어쩌긴.”
“어쩌실 건데요?”
“어떡해야 하는 거야?”
선유의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준영이 큰 숨을 밖으로 내쉬었다.
“야, 땅 꺼져. 안 그래도 요새 씽크홀 때문에 난린데. 네가 구멍 만들래?”
“됐구요. 나중 가서 막으려고 하면 될 일도 안 돼요. 그러니까 그냥 예방해요. 솔직하게 얘기하시죠?”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여자한테 줄 돈 좀 줄이고 계약 좀 적당히 할 걸 그랬어.”
선유의 말에 준영이 일순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왜?”
너무도 멀쩡하게 되묻는 선유의 모습에 준영이 선유의 머리털을 잡아 당겼다.
“너 뭐하냐?”
“계세요? 안에 누구 계세요?”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하는 준영의 손목을 선유가 잡아챘다.
“요새 너 간 집에 두고 다니냐?”
“그게 아니에요. 저는 형님이 그런 말씀을 하는 걸 믿을 수가 없는 것 뿐이라구요.”
“원래 사람은 변하는 동물이야.”
“지나치게 많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건데. 어디 아프세요?”
“오냐, 그럼 다시 개망나니가 돼주마.”
결국 준영은 머리에 혹을 달고서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를 하고서야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그나저나 형님. 이번에 영화인의 밤들 초대가 왔는데요. 어떻게 하실래요?”
“뭐를?”
“가실 거냐구요.”
“당연히 가야지.”
“왜요?”
“왜냐니?”
“원래 그런 데는 귀찮다고 안 가시잖아요.”
“이번에 해외 감독들도 올 거 아니야. 가서 미리 한 번씩은 눈도장을 찍어둬야지.”
“진짜죠? 진짜 가실 거죠? 사장님한테 얘기해 둡니다?”
“그래. 간다고.”
그의 답에 싱글벙글 웃는 준영의 모습에 선유가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근데 왜 네가 더 신나 보이냐?”
“예? 그야 거기 가면 미인들을 볼 수 있잖아요.”
“너 여자친구 있잖아.”
“손에 꽃 들었다고 길에 핀 예쁜 꽃 구경을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말은 청산유수인 자신의 매니저를 보며 선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채 영화인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
소민이 일찌감치 메이크업을 받고는 차에 올라탈 때였다. 영화인의 밤까지는 시간이 남은 터라 어디에서 시간을 때울까 고민을 하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메이크업 탓에 평소보다 1.5배는 더 커 보이는 눈이 발신 번호를 확인하고는 그보다도 더 커졌다. 그리고 이내 소민이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핸드폰을 받았다.
“여, 여보세요?”
그리고 잠시 후, 소민의 빨간 차는 도로 위를 미친 듯이 달렸다.
페달을 밟는 다리가 얼마나 떨렸는지 몰랐다. 예상 밖의 시간에 걸려온 전화는 그녀를 잔뜩 흥분 상태로 몰아갔다.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는 몰라도.
고급스런 타운하우스 중 가장 큰 집 앞에 선 소민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손을 뻗었다.
‘딩동’
간결한 차임벨 소리와 함께 누군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문이 열렸다. 잠시 망설이던 소민이 조심스레 발을 안으로 들였다.
“실례하겠습니다.”
현관에서 이어지는 꽤나 긴 복도에 선 소민의 목소리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친절하지는 않은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고 그 목소리를 따라 소민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자 쟁반을 들고 움직이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여성을 향해 소민이 꾸벅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계속 서 있을 거 아니면 들어와 앉아.”
“아, 네.”
여자의 말에 소민이 서둘러 발을 옮겼다. 긴 소파에 앉은 소민 옆으로 1인 소파에 앉은 여성이 소민에게 쟁반 위에 갖고 온 주스를 한 잔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소민이 타는 목에 겨우 주스를 한 모금 넘기는 걸 확인하자 1인 소파에 몸을 묻은 여자가 물었다.
“그래서?”
여자의 질문에 소민이 망설이자 여자가 재차 채근했다.
“얼굴이나 보자고 온 건 아닐 거고, 그렇게 귀찮을 정도로 전화를 했으면 용건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 말에 소민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 말에 여자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디 한 번 물어보라는 듯이.
“어머님이 정말... 한선유... 아니 한선류씨 어머니 맞나요?”
예상치 못한 소민의 말에 이번엔 소민의 질문을 받은 그녀, 유세란 여사의 눈이 커졌다.
“너... 그 이름은... 어떻게...”
“어쩌다 보니 듣게 됐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 질문에 답해주세요. 어머님이 정말 한선류씨 어머니... 맞으세요?”
소민의 질문에 잠시나마 휘청이는 듯 보이던 세란의 몸은 이내 꼿꼿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다.
“저, 어머님?”
소민이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고 어딘가로 향했던 그녀는 잠시 후 돌아왔다. 새하얀 봉투와 함께.
“이 정도면 되겠니?”
“에?”
한 번 경험했던 일이긴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지난 번엔 사랑한다 생각했던 남자의 숨겨진 애인이 임신했다고 떨어지라고 하더니 이번엔 드라마 속에서 보던 흔하디 흔한 돈 봉투였다.
“네가 그 말을 하는 건 협박하겠단 소릴텐데 이 정도면 만족하겠냐는 소리야.”
“제가... 지금 협박을 한다구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돈 받고 그 입 다물어. 그러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에 소민이 돈 봉투를 노려봤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 넣었으니까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생각 버려. 어차피 너도 바라는 건 뻔하겠지.”
소민의 시선을 곡해한 세란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망언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민이 돈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세란의 시선을 받으며 소민이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지금... 뭐하는...”
황당함을 넘어서 경악하는 듯한 목소리에 소민이 태연스런 얼굴로 세란을 바라봤다. 소민의 목소리는 차분함 그 자체였지만 나오는 말은 세란을 기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확인해 봐야죠. 얼만지.”
“뭐? 너 정말 맹랑하구나.”
세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소민은 돈을 세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돈세기를 마친 소민이 세란을 똑바로 바라봤다.
“정말... 한선유씨가 1억 밖에 안 해요?”
기가 찬 눈으로 소민을 바라보는 세란에게 소민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말 1억이면 되는 거죠? 1억 가져 오면 한선유씨 제가 가져도 되는 거죠?”
“뭐?”
“전 또 몇 십억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저렴하네요. 한선유씨.”
“너 지금...”
“그리고... 전 한선유씨 어머님을 뵈러 온 거지, 한선유씨 파는 장사꾼 만나러 온 게 아니라서요.”
세란의 손에 1억과 돈 봉투를 쥐어준 소민이 허리를 펴고는 세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럼 돈 마련해서 다시 올게요.”
말을 마친 소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는 그 집을 빠져나왔다. 소민이 나가고 거실 창 앞에 선 세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는 빨간 자동차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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