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넌 철면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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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래? 과거는 묻는 거라고? 계속 갖고 가야지. 평생. 채소민같이 엄청 근사한 여자를 날려먹은 네 안목을 후회하면서.”
“내가 여기서 포기할 거라고 생각해?”
그 말에 선유가 한쪽 입술을 슬며시 올렸다. 확실히 승기를 잡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찜찜했다.
“안하겠지, 물론. 넌 철면피니까.”
“잘 봤네.”
야비하게 웃는 시준을 보며 선유가 표정을 굳혔다. 적개심이 분명히 뿜어져 나오는 그 압도적인 분위기는 순식간에 시준을 휘감았다.
“경고하나 할까? 두 번 다시 채소민 앞에 나타나지마.”
“싫다면?”
시준이 선유가 풍기는 분위기에 지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그런 시준을 선유가 서늘한 눈으로 노려봤다.
“그래서 하나 준비한 게 있어.”
그렇게 말한 선유가 시준의 손을 잡아챘다.
“뭐, 뭐하는 거야.”
“내가 협박. 이런 거 좋아하지는 않는데, 소질은 있어. 그래서 한 번 해보려고.”
“협박? 뭘로?”
선유가 시준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준영을 향해 내밀자 준영이 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선유의 손에 건넸다.
일전에 시준에 대해 조사를 하라는 선유의 말대로 조사를 해서 선유에게 알린 지 시일이 꽤 지나 있었다. 언제 저 카드를 빼드나 했는데 이렇게 끝에 와서야 선유는 카드를 빼들었다.
선유가 준영에게 넘겨 받은 것을 여전히 자신에게 잡혀 있는 시준의 손에 턱하고 쥐어줬다. 얇은 종이 한 장인데 시준은 받는 순간 손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깊게 팔 것도 없이 한시준씨 호적 조사를 좀 하니까... 와이프에 아들까지 나오더라. 아들이 한참 예쁠 나이 같던데...”
“그거... 개인... 정보...”
뜨악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을 잇는 시준을 향해 선유가 웃어보였다.
“한국에 개인 정보가 어딨어? 더군다나 연예인이. 아무튼 가족들하고 오순도순 살아. 그 쪽이 스캔들나면 그거... 불륜이야. 그리고 너같이 후진 놈은 또 금방 들켜요. 그럼 또 너는 쓰레기니까 내 잘못 아니라고 뒤로 발뺌이나 하겠지. 그럼 또 괜히 너랑 엮인 사람만 피 볼 거고. 괜히 엄한 사람 엮이게 하지 말고. 가족들하고 오순도순 살자. 오케이?”
선유의 말이 끝나고도 멍하니 있던 시준이 갑작스레 손에 쥐어진 사진을 거칠게 찢었다. 선유가 그런 시준을 냉정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래, 그래. 마음대로 찢어. 한 장 더 줘?”
그렇게 말한 선유가 다시 한 번 준영을 향해 손을 내밀자 준영의 주머니에서는 같은 사진이 한 장 더 나왔다. 다시 한 번 그 사진을 선유가 시준의 손에 쥐어줬다.
“그 쪽이 밖에 나와서 여전히 껄떡대고 다니는 거, 당신 부인도 아나? 경고야. 채소민한테 한 번만 더 집적대면... 당신 가족 사진, 온국민이 보게 될 거야.”
선유의 말에 시준이 얼음처럼 굳었다. 혀까지 마비된 듯 그의 입에서는 한 마디 말도 새어나오질 않았다. 그런 시준을 뒤로 하고 선유가 멀어졌고, 뒤에 남은 선유의 매니저인 준영이 시준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토닥했다.
“그러게... 왜 건드렸어요. 한 번 시작하면 끝장 보는 사람인데. 선유형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두시라구요. 이나마로 끝나는 것도 소민씨가 한시준씨랑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해서 선유형님이 괜히 들쑤셔서 폭로하면 소민씨 상처 입을까봐 이 정도로 하려고 하는 거라는 것만 알아 두세요. 무슨 말인지 이해 되죠? 만약에 다시 얼쩡얼쩡대면 가차 없이 이 사진 유포할 거란 소립니다.”
얼음이 드디어 깨진 듯 시준의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포하면 그 쪽도 책임을 져야 할 텐데?”
“계산이 안 되세요? 어느 쪽이 더 폭삭 망할지? 모르겠으면 한 번 해보세요.”
그렇게 말한 준영이 한 번 더 시준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멀어졌다. 시준이 자리에 털썩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목소리 하나가 내려 앉았다.
“야.”
“임지유씨. 본인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이게 지금 뭐죠?”
만만한 화풀이 대상을 찾지 못했던 화는 지유에게 돌아갔고, 지유는 그런 그의 반응에 별 개의치 않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는 지는. 맞아서 볼이 두 배가 된 주제에.”
그녀의 말에 시준은 볼을 감쌌다. 새삼 아픈 기분이 들었다.
“한선유는 나 볼 생각도 안 하고, 옆에서 쟤들 둘이 붙어있는 거 보는 것도 싫어. 그거 보다가는 울화통 터져서 죽을 지도 몰라. 게다가 시간도 없고.”
“그래서요?”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안 하겠다고. 그만 둘 거야.”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예요?”
“누가 그래? 쉽게 포기하는 거라고?”
지유가 씁쓸한 눈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나... 포기하는 건 가졌던 사람이 포기하는 거잖아. 난 한선유를 제대로 가졌던 적이 없더라고. 생각해 보니까. 가질 수 있었던 기회를 내가 날려먹었거든. 그리고 한선유는 다시는 줄 생각이 없고.”
지유의 말에 시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성공하고 싶은 게 그렇게 잘못 된 건가.”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빛나는 걸 갖고 싶으면 자기가 빛나야 한다고. 남더러 대신 이뤄달라고 하면 안된다고. 여태껏 내가 그래온 걸 빤히 아는 것처럼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지유의 목소리가 한 순간 아주 낮아졌다. 숨기고 싶은 얘기를 애써 꺼내놓는 것처럼.
“비참하더라.”
“위로라도 해줘요?”
“필요 없어. 진심이란 하나도 없으면서 무슨 위로를 하겠다고.”
“그런 나 좀 위로 해 줄래요?”
심드렁하니 말하는 시준을 지유가 흘깃 쳐다봤다.
“야, 나도 들었어. 집에 가서 네 마누라한테 위로해 달라 그래. 넌 나보다 더 나빠. 이 가정 파탄미수범아.”
“협박할 겁니까?”
“안 해. 너 협박해서 얻어낼 것도 없는데, 뭐. 계산하는 거 좋아하는 것 같은데 계산해 봐. 지금 제일 하자 있는 게 네쪽이라는 건 금방 나오지?”
그렇게 말한 지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홀로 남겨진 시준이 소민과 선유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까 맞아 부푼 볼이 바람에 쓸려 아파왔다. 아마 뒤늦게 맞은 이 볼이 어쩌면 바람이 불 때마다 두고두고 아플 것 같았다.
“어때? 속이 좀 시원해?”
“모르겠어요. 좀 더 때려줄 걸 그랬나.”
“그랬으면 손바닥이 걸레가 됐을 것 같은데?”
빨갛게 된 그녀의 손을 조물딱 대며 그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피식 웃었고 선유는 그녀의 그 웃음을 못 들은 건지 그저 손바닥만 내려 보며 중얼거렸다.
“각목으로 때리는 씬으로 할 걸 그랬어. 그 놈 뺨만큼이나 부은 것 같은데.”
“오버하지 마요. 그리고 내가 무슨 깡패예요? 각목이 뭐예요. 여자가.”
“하긴.”
그렇게 말한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자 소민이 그의 손을 꼭 잡고는 물었다.
“화났어요?”
“뭐가?”
“음... 한시준이랑 한선유씨를 동급으로 취급한 거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아무 말이 없자 정말 그가 화가 났을까봐 불안해진 소민이 쉬지 않고 말했다.
“근데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에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근데 한 번 받았던 상처가 있으니까 쉽게 믿기 어려웠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가 되묻자 한층 용기가 생긴 소민이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그녀의 사과에도 그는 그저 조용히 있었다. 그 침묵에 압사라도 당할 것 같을 때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뭐가 미안한데?”
“어...”
“한시준이랑 나랑 동급 취급한 거, 아니면 나한테 한시준이랑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 안한 거, 그것도 아니면 키스도 안 해주고 병원에 나만 버려두고 간 거?”
농담인 듯 그렇게 얘기하는 선유를 소민이 바라봤다.
“뭐야, 그 아련한 눈빛은. 알았어. 알았어. 안 미안해 해도 돼. 농담한 거야.”
선유의 말에 소민이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미안해요. 한선유씨는 다 얘기해줬는데 나만 아무 얘기 안 해서. 너무 늦어서...”
그렇게 소민은 자신의 이야기를 선유에게 털어놨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였어요. 그 때는 저도 경력이 없으니까 그냥 감독님들시키는 대로 감독님들이 이미지 캐스팅 해오라면 해오는 그런 때였거든요.”
그런 면에서 시준도 그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일 때였다. 배우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조연으로 출연을 몇 번 했었고, 연기력이 그나마 조금 좋아서 인정받은 정도. 그래서 이제야 겨우 조금 큰 배역이 들어오기 시작한 정도였었다. 근데 그런 그가 소민의 눈에 띈 거였다.
“감독님이 연기 잘하는 사람을 요구하기도 하셨고, 한시준씨가 완전히 후진 마스크도 아니어서 일일 연속극에는 잘 어울렸어요.”
그녀도 한창 일에 열심히 끓어오를 때라서 일단 한 드라마 캐스팅을 맡으면 그 드라마 현장에서 열심히 일했던 때였다.
아직 능력을 인정받기 전이라 지금처럼 일이 많지 않은 까닭도 있었지만. 아무튼 감독들에게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비출 생각으로 꼬박꼬박 드라마 촬영현장에 출근도장을 찍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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