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얘기해 줄 생각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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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어쩌다가...”
혹시나 선유가 깰까 침대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간 소민이 눈으로 그의 입가를 매만졌다. 다부지게도 맞았는지 입가가 터져있어 잘생긴 입매에 피딱지가 맺혀 있었다.
짐작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짐작이 간다고 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닌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채소민. 얼른 키스해야지.”
“어?”
그녀가 잘못 들었나 싶어 얼른 자신의 귀를 호비작거렸다. 분명 선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가 들은 게 환청이나 되는 것처럼 선유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이 봐. 부시럭거리지만 말고 얼른 키스하라니까?”
여지없이 다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소민이 조심조심 그에게 다가가 눈꺼풀을 까뒤집었다. 갑작스런 빛의 접촉에, 그리고 감기지 못하는 눈이 건조함으로 인해 금세 눈물이 맺혔다.
“뭐하는 거야. 빨리 눈꺼풀 놓지 못해?”
“다행이다.”
그렇게 말한 그녀가 그의 눈꺼풀을 놓고는 한발자국 물러섰다.
“이 봐. 이러기야? 키스를 해 줘야 일어나지.”
선유는 아직도 키스에 미련이 남는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아예 입술을 삐죽이 내밀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민이 그런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째려보지 마. 눈 찢어져.”
눈을 감고도 시선이 느껴지는지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향해 소민이 톡하니 얘기했다. 저렇게 눈 감고도 잘 아는데 사람이 걱정할 거라는 건 모르는 걸까?
“안 째려보게 생겼어요? 나는 한선유씨가 심하게 맞아서 기절이라도 한 줄 알았다구요.”
“그것 참 듣고 싶던 말이네.”
“허!”
그의 말에 소민이 기가 차다는 듯한 소리를 내자 선유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아무래도 잠자는 숲 속의 왕자를 찍으려던 계획은 취소해야하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포기가 안 됐다.
“만약에...”
“만약에 뭐요?”
“내가 계속 눈 감고 있었으면 네가 키스해서 나를 깨워 줬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간호사를 불렀을 거예요.”
“많이 걱정했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아니, 멀쩡하면 나 멀쩡하다 문자 하나 못 보내요? 손가락 분지러졌어요?”
“응.”
“아... 미안해요.”
“뻥이야.”
“한선유씨. 더 맞을래요?”
“아니.”
그렇게 말한 선유가 고개를 조금 틀어 소민을 바라봤다. 조금은 어두운 얼굴로 자신을 보는 소민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지금 이 상황이요. 나한테도 얘기 안 할 거예요?”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소민이 어린애 혼내는 선생님 같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침대에서 조금 옆으로 가 자리를 만들고는 팡팡 쳤다.
“누워.”
“뭐, 뭐. 왜요?”
“얼굴이 퀭해. 너구리같아. 다크서클이 땅 찍고 반동으로 다시 올라오게 생겼으니까 누워.”
“그러게 누가 걱정 시키래요?”
“하루 아침에 생긴 게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소민이 끙하는 신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화장이 조금 지워진 모양이었다. 정신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럴수록 그의 곁에 누울 수는 없었다. 이런 추한 몰골이라니 당장 화장실에 가서 자신의 상태를 점검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 소민을 본 선유가 그녀를 휙 잡아 당겼다.
“빨리 빨리 누워. 다크서클이 머리 꼭대기에 있대도 예쁘니까.”
그렇게 말한 그가 앉은 그녀의 이마를 꾹꾹 뒤로 누르자 어정쩡하게 앉아 있느니 눕는 자세를 택한 그녀가 신발을 벗고 그의 곁에 누웠다. 그가 팔로 얼굴을 바친 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그 어색한 자세에 소민을 꼿꼿이 바로 누워 천장의 무늬를 구경했다. 그녀의 모습에 그가 픽하고 웃더니 농담을 했다.
“나 환자거든? 이렇게 자꾸 힘쓰게 할래?”
“나일론 환자면서. 자꾸 뻥치지 마요. 내가 나가서 기자들한테 다 불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냐?”
“민규한테요.”
그녀의 말에 그가 물어보려던 질문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족. 정말 궁금한 화제였다.
“채소민.”
“왜요?”
“정말 너 그렇게 대단한 집 딸이야?”
그의 말에 소민이 멍하니 천장을 보다 입을 열었다.
“그게 우리 관계에 중요해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고민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 봤고, 그녀는 그가 어떤 답을 할지 초조한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중요하지.”
“중요하다구요? 왜요?”
소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모습에 선유가 그녀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인상 찡그리지 말랬지. 나중에 후회한다.”
그의 손길과 목소리에도 그녀는 여전히 이마에 내 천(川)자를 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뻐 보이는 건 그가 그녀에게 단단히 홀린 까닭이겠지. 그렇지만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이 자신보다야 훨씬 못 미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계속 그 상태로 둘 수는 없었다. 새로 생긴 그의 꿈에 그녀가 차지하는 지분이 꽤 크기에. 그녀가 없으면 이룰 수가 없는 꿈이기에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의 감정을 봄날의 새싹처럼 자라게 할 필요는 있었다.
“채소민.”
“네.”
“넌 내가 찌질해 보여?”
“네. 아, 아니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심결에 불쑥 네라고 했던 그녀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도리질을 하며 아니라고 그랬다.
“이봐. 내가 말할 때는 나한테 집중 좀 하지? 넌 이래 봬도 대한민국 톱스타랑 대화 중인 거거든? 기자들은 나랑 얘기를 못해 안달이구만. 캐스팅 끝났다고 나한테 너무 소홀한 거 아니야?”
“내가 뭘요.”
부루퉁하니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말에도 소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단답만 하고는 말이 없었다. 선유가 그런 소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들여다보이는데 그녀는 왜 말을 하지 않는 건지 답답했다.
얼마나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었을까. 소민이 갑작스레 느껴진 듯 말했다.
“머리 만지지 마요.”
“왜? 네 가족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니요. 어쨌든 몸에 무리 갔을 거 아니에요. 쉬어야죠.”
“기특하네. 계속해서 내 걱정 해주고.”
“이제 알았어요?”
“근데 기특한 김에 적당히 기특하지 그랬어. 아니 좀 더 많이 기특하지 그랬어.”
그의 말에 소민이 그의 눈을 쳐다봤다. 검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곧게 비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아니. 그렇게 훌륭한 집안 딸이지 말지. 적당한 집이면 좋잖아.”
“그게 내 잘못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꽃가루 뿌려진 길을 걸어지도록 나온 걸 어떡하겠는가. 그는 그걸 탓하는 걸까?
“아니. 그건 채소민 잘못이 아니지. 근데... 채소민이 너무 좋은 집 자식이라서 걱정이야. 몰랐던 사실을 갑자기 알게 되니까... 내 꿈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순식간에 가라앉은 음성이 된 그의 목소리에 그제야 소민은 그의 눈이 그토록 검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왜인지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장난스레 굴고 전과 다름없이 굴길래 그는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는 상상이상으로 화가 난 듯 보였다.
왜? 진즉에 얘길 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요?”
“뭐?”
“내가 한선유씨한테 얘기해 주는 거랑 얘기 안 해주는 거랑 우리 사이랑 한선유씨 꿈이 무슨 관련이 있어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를 쳐다봤다. 마치 그의 속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만 그의 눈에서는 어떤 분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어떤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 짐작이 가질 않자 그녀 역시 삐뚤게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채소민이예요. 그거 말고 뭐가 중요한대요?”
“그래, 넌 채소민이야. 그런데 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존재는 아니잖아. 채소민.”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도 말의 내용도 분명한 타박을 담고 있었다.
“내 가족이랑 한선유씨는 상관이 없어요.”
“정말... 상관 없어?”
“무슨 소리예요?”
“나, 그 쪽 애인 아니었어?”
“애인이라고 해서 시시콜콜 모든 걸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말했죠. 프라이버시는 중요한 거라고.”
그녀의 말에 선유가 침묵으로 그녀를 불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이 없는 선유와 함께 병실에 있는 건 곤욕이었다.
그동안 그가 수다스럽다 생각했는데 그래서 카리스마 있거나 싸가지 없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명백한 판단의 오류였다. 어떤 자리도 이만큼 불편할래야 불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가 한시준과 같은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것만 같아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에 왠지 모를 서러움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왜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과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치열하게 그녀의 안에서 싸웠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자존심이 자신의 치부인 과거를 선유에게 내보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오려는 눈물과 한숨을 애써 참으며 돌아서서 신발을 신는 그녀의 등에 선유가 물었다.
“얘기해 줄 생각은... 있었어?”
그 말에 소민이 선유를 돌아다 봤다.
“지금은 아니예요.”
그 말을 남긴 소민은 병실에 선유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섰다.
그녀가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서자 선유가 팔로 눈을 가리고 누웠다. 그러다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소민은 지금은 아니라고 했지만 선유는 지금이어야 했다. 소민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기 전에. 혹시 몰라 받아 뒀던 번호가 필요한 때였다.
“여보세요? 여기 대박병원 특실이야. 좀 와줘.”
상대방이 뭐라고 했는지 인상을 찡그리던 그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시준.”
그 단 세 글자에 상대방에게서 만족스러운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그가 1초가 1시간 같은 기다림을 시작했다. 그가 족히 100년은 기다린 것 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의 병실 문이 열렸다.
“어떻게 알았어.”
들어온 민규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그랬다.
“다는 몰라. 입에 접착제를 발랐는지 왜 궁금하냐고만 하면서 절대 얘기를 안 해주거든.”
“어쩐지... 그럼 한시준이라는 건 어떻게 나온 소리야. 안 그래도 지금 인터넷이 뜨겁긴 하던데. 무슨 일이야?”
“촬영장에 한시준이 있었어.”
그 한 마디로 모든 게 이해가 됐는지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소민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물어볼 수도 있어. 근데 그러면 채소민이 정말 상처를 받을 것 같으니까. 그러고 싶지 않아서 널 부른 거야. 그러니까 말 해. 그 놈이랑 채소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커멓게 내려앉은 목소리를 들은 민규가 덩달아 어두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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