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89화 (88/105)

89. 사실이잖아. 쓰.레.기

89

지유에게서 선유와는 완전히 끝난 것 같다고 완전히 밀쳐졌다고 하는 말을 들은 시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생각보다 계속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주차장에 소민의 차인 빨간 스포츠카가 들어서자 시준이 주위를 살피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리는 소민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거 놔요. 갑자기 왜 이래요. 미쳤어요?”

“잠깐이면 돼.”

“싫다니까요?”

잡고 있는 손목을 빼려 노력해보지만 소민도 여자인지라 시준을 떨쳐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따라 와. 할 얘기가 있다고.”

“잡고 있는 그 손목 내 건데. 잡아도 된다고 허락해 준 적 없는데 왜 잡고 있지? 한.시.준씨.”

실랑이 중이던 소민과 시준 사이로 타이밍도 좋게 선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경고가 분명한 목울림이었다. 어차피 막장이었다. 더 잃을 것도 마땅히 없다 생각한 시준이 태연스레 답했다.

“제가 채소민씨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요새는 얘기를 손목 잡고 하나? 어느 나라 예절이야, 그건? 그리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내 세상에서는 임자있는 여자 손목 그렇게 함부로 잡으면 손목 임자한테 얻어터지는 게 법인데. 원하면 법대로 할까?”

선유의 경고에도 시준은 태연했다.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얘기입니다. 상관 마시죠.”

손목을 놓지도 않고 둘 사이가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시준의 태도가 선유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그럼 그 얘기 나도 같이 들어 줄게. 내 여자 일은 내 문제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그 손목 놔. 지난 번부터 뭐든 삼 세 번 들어야 들어 먹나.”

완전히 기분이 상한 선유가 어거지로 준영의 손을 소민의 손목에서 잡아 떼어내자 붉은 자국이 선유의 눈에 들어왔다. 선유가 소민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마치 치유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가 마중 안 나왔으면 어쩔 뻔 했어?”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긴. 채소민 따뜻한 향기 나길래 왔지.”

“거짓말.”

“진짠데.”

그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선유와 소민의 태도에 시준이 인상을 구겼다. 손목을 놓친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소민이 자신을 피해 다니는 상황에 지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니까.

“채소민. 아직 난 할 말 못했어. 그러니까 따라와.”

“할 말은 이미 예전에 다 했어요. 이제 와서 달라질 건 없어요.”

소민의 말에 시준이 비릿한 미소를 입에 물며 말했다. 안 가겠다면 따라오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한선유씨. 안 물어봅니까?”

“뭐를?”

너 따위 상관없다는 투의 어조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시준은 그렇게 말했다. 그와 그녀를 갈라놓으려면 그 정도 무시쯤이야. 그리고 그가 조금만 밑밥을 풀면 소민이 그를 막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채소민과 제 관계말입니다.”

“이봐요, 한시준씨.”

역시나, 소민이 움찔하며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손목이 선유의 손 안에 있었고, 그 손 밧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민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으로 당긴 선유가 고개를 외로 꺾고는 시준을 보며 말했다.

“알고 있다면 그게 뭐 어쨌다고.”

알고 있다는 예상 외의 답변이 그를 놀라게 했다. 그럼 그도 그녀의 배경을 보고 다가온 것일까? 아니면 소민이 그런 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벌써 둘의 사이가 가까운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선유의 말에 소민 역시 적잖이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어떻게 시준과 자신의 사이를 알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시준이 자신에게 집적거리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시준과 자신의 사이를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알고 있다고?”

선유가 자신의 품에 안긴 소민을 내려다 봤다. 뭐가 두려운지 자신의 품 안에서도 바들바들 여린 새처럼 떨고 있는 소민 앞에서 계속 이 얘기를 해야 할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소민 앞에서. 시준의 말을 무시한 선유가 소민을 향해 말했다.

“채소민, 아침 먹었나?”

맥락과 상관이 없는 말에 소민이 선유를 올려다 보자 선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먹었지? 가서 아침 먹고 와.”

그리고는 지체 없이 근처에서 통화 중이던 준영을 불렀다. 그 부름에 준영은 또 황급히 달려왔고, 선유는 준영에게 소민을 넘기며 말했다.

“김준영. 채소민 데리고 가서 아침 먹이고 와. 밥 차 말고 다른 데.”

“예?”

“얼른.”

“아, 예 형님.”

준영은 선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은 듯 넋이 반쯤 나간 소민을 차에 태워 촬영장을 빠져나갔다.선유의 시선이 다시 자신을 향하자 시준이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알고 있습니까? 그럼 소민이가... 채종환 감독 딸이란 것도 아는 겁니까?”

“근데? 그게 뭐?”

선유의 대꾸에 시준이 비웃음을 걸치며 말했다. 자신과 다를 바 없다 생각하니 선유가 우스워 보이기까지 해 그 비웃음은 말을 하면 할수록 짙어졌다.

“뭐라니. 당신도 그럼 나랑 같은 거잖아. 아니야? 채소민이 내가 채소민한테 접근한 이유가 채종환 감독 때문이라는 거에 열 받아서 나 안 보고 있거든. 그런데 당신은 계속 본다는 게 이상하잖아. 아, 아직 안 들켰나? 내가 대신 얘기해 줘?”

시준의 목소리에 선유가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아, 불손한 의도로 채소민한테 접근했다가 내쳐졌나? 근데도 채소민한테 집적거리는 거고? 뭐 콩고물 떨어지는 거 있을까 싶어서.”

냉정하게 상황을 짚어내는 선유의 말을 무시하며 시준이 말을 이었다. 이게 먹히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으로 흔들면 된다.

“채소민이 날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그 말에도 선유는 요지부동, 끄떡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입에서는 태연스레 다음 대사가 나왔다.

“뭐, 그 쪽 후진 과거 얘기는 안 궁금하니까 관두고. 그쪽이 채소민 부모나 가족이라도 되나? 차인 주제에 내가 왜 안 차였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한데? 구 남친도 아니고 이건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설명 좀 해주지?”

자신을 후지다고 한 번에 평가내리는 선유를 향해 시준이 낮게 이를 갈며 말했다.

“댁도 나랑 비슷할 것 같은데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굉장히 억울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억울한지 안 억울한지? 그게 왜 궁금해야 하는데. 내 관심사는 오로지 채소민이거든. 그리고 채소민은 사리분별 잘 하고 똑 부러지는 여자란 말이지. 지금도 봐봐. 쓰레기는, 쓰레기 통에. 그리고 쓰레기 주변에는 얼씬도 안 하는 거지. 아주 상식적이고 분별력 있는 여자잖아. 너는 쓰레기통에 버려져 마땅한 쓰.레.기일 뿐이고.”

“그러는 한선유 당신은 뭐가 다른데? 여자가 넘쳐나는 건 나보다 더 하잖아. 사실은 나보다 더한 속내를 가진 걸지 어떻게 알겠어?”

그 말에 선유가 깊디 깊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쪽보다 더한 속내를 가진 거. 맞는데 그건 이 여자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여자라는 걸 알기 전이거든. 사실 나도 이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집 딸인 걸 어제 처음 알아서 쇼킹도 이런 쇼킹이 없거든?”

“거짓말 하지 마. 그렇게 발뺌하면 좋아? 거짓말만 늘어놓는 당신이랑 나랑 다를 게 뭐야?”

“말했지? 지금까지 지껄인 걸 봤을 때 넌, 채소민 배경보고 접근했겠지. 어떡하면 그 여자 단물 빼먹을까 고민하면서. 내 말이 틀려?”

시준이 움찔하자 선유가 그의 어깨를 짚고는 말했다.

“나 같은 멍청이도 네 속이 훤히 보이는데 똑똑한 채소민이 그걸 모르겠어? 다시 채소민이랑 잘 해보고 싶다고? 그럼 그 썩은 속부터 갈아엎어. 네가 그렇게 하고 와도 내가 비켜줄지는 모르겠지만. 지골로보다도 못한 놈이야, 너는. 걔들은 몸으로라도 봉사하지만 넌 그냥 그 여자 단물만 바라잖아. 그리고 단물이 없으면 버릴 놈이야.”

지골로라고 자신을 깎아 내리는 선유의 말에 시준이 여지껏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리고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좀 심하잖아. 한선유씨.”

“그게 사실이잖아. 쓰.레.기”

선유가 계속해서 그를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시준은 그대로 덫에 걸려들었고, 그 둘은 나란히 또다시 신문 1면, 검색어 1위를 차지하게 됐다.

소민은 준영과 허둥지둥 병실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밥을 먹이라고 하더니 밥 먹을 새도 없이 사고란 사고는 본인이 치고 있었다. 밥이 나오는 동안 인터넷 서핑을 하던 그녀의 눈에 검색어 1위가 들어왔고, 그와 거의 동시에 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리고 둘은 이제 막 뚝배기를 내려놓는 아주머니에게 먹지도 않은 밥값을 내고는 병원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선유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 특실 - 한선유 님 ]

이란 글 밑으로 ‘절대안정’이라는 글이 보여 소민의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반으로 쪼그라든 것 같은 심장이 이젠 아예 덜렁 거리고 있었다.

“어... 이거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소민이 들어가야 할지 말지 망설이며 그렇게 묻자 준영이 문을 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거, 기자들 출입 못하게 하려고 붙여놓은 걸 거예요. 무시하세요. 아마 멀쩡할 걸요? 그리고 누님이 옆에 있는 게 형님이 절대 안정을 취하는 길이에요.”

“아,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그리고 소민을 다독이며 말하는 준영 덕에 안심을 하고 들어간 소민의 눈에는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선유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고 있는 건지 멀쩡한 건지 혹은 상태가 심각한 건지 알 수 없는 그 모습에 소민이 준영을 향해 물었다. 흡사 개다리춤을 추는 것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준영씨 멀쩡한 거 맞아요?”

“그... 잠깐만요.”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준영이 밖으로 나가자 병실에는 눈을 감고 있는 선유와 소민만이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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