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그래, 그렇네.
88.
본디 촬영 현장이라는 게 정신이 없고, 배우들도 쪽잠을 자는 처지라 스텝들은 더더욱 환경이 열악했다. 그리고 선유는 마땅히 쉴 만한 공간을 찾지 못하는 스텝들 사이에서 연신 하품을 하는 소민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괜히 자신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준영아, 채소민 좀 집에 데려다 주고 와.”
“왜요? 나 더 있어도 되는데?”
준영을 불러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 주라는 말에 소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내가 안 되겠어. 졸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여기 촬영기구들에 다칠 수 있는데 그건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집에 가. 가서 푹 자.”
“한선유씨도 못 자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요.”
“네가 자면 나도 마음이 편하게 촬영할 수 있으니까 얼른 들어가.”
“어으... 닭살.”
그녀의 말에 선유가 웃으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 멀어지는 불빛을 보다 돌아서는 그에게 지유가 말을 걸어왔다.
“그 여자, 정말 좋아하는 거니?”
“아니.”
그녀를 바라보진 않았지만 아니라는 말에 희미하게 희망이 생겼다가 다음 말에 훅 꺼져버렸다.
“그 이상이지. 없으면 불안하고 초조해 미칠지도 모르거든.”
“나도 그랬어.”
“뭐?”
“네가 TV에 보일 때마다. 다른 여자와 있는 걸 볼 때마다. 심장이 찢어졌다가 헤어졌다는 기사 보면 다시 너덜너덜한 심장을 이어 붙였어.”
그녀의 말에 선유가 마침내 그녀를 쳐다봤다.
“이제야 제대로 봐 주니?”
“하나 묻자. 왜 그랬어?”
시선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녀에 대한 마음을 돌리는 데는 실패였다.
“뭐?”
“너는 나를 끔찍한 범죄자라고 생각했잖아. 나를 그렇게 밀어내놓고는 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을 자리를 억지로 나로 채우면서 버텼냐구. 네 말대로라면 나는 내 어머니라는 여자랑 공범이고, 살인자인데 왜 그랬냐고.”
“널 좋아하니까. 그거 알아? 교도소에 있는 사람에게도 기다리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은 있는 거.”
여전히 자신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녀가 무슨 논리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선유가 물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내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줘.”
“네 꿈이 뭔데?”
“네 옆에 있는 거. 그게 내 꿈이야.”
“너 좀 미친 것 같은 거 너도 알지? 네가 밀어내 놓고 반대로 다시 혼자 붙잡고 여기까지 온다는 게 말이 돼?”
“말이 안 되는 이유는 뭔데? 네가 저 여자를 원하는 것처럼 나도 오랜 시간 너를 원했다는 게 왜 말이 안 되는데?”
“그래. 말이 된다고 치자.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뭐?”
“너 지금 싫다는 사람 붙잡고 네 감정 억지로 들이미는 거잖아. 그럼 나보고 뭐 어쩌라고. 내가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내가 공범이라고 한 너를 다시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데? 좋은 추억 만들어 줘서 고마웠다. 부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해라. 그래야 해? 대체 네가 지금의 나한테 뭐 얼마나 대단한 존재일 거라고 착각 하길래 그러는 거지?”
소민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도 다른 태도에 지유가 몸을 떨었다.
“너...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나 좋아한다고 그랬었잖아.”
“여기까지 와서 비참한 몰골을 바란 건 너야. 전 국민이 내가 채소민을 좋아한다고 한 거 다 알아. 몰랐다고 할 거야? 알면서도 나한테 들이 덤빈 이유가 뭔데? 어쨌든 한 번 찔러나 보자. 뭐 그런 거야?”
“아니야. 나는 그냥... 이번에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진심이란 거 알았으면 물러나야 하는 거 아니야?”
“너... 정말 진심 맞아?”
“또 무슨 헛소리야.”
“그 여자, 채소민. 배경이 어마어마하던데. 당신도 그걸 원하는 거 아니야? 한시준처럼.”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채종환 감독에, 어머니가 레이첼 정이야. 플났다 수석 디자이너. 정말 몰랐니?”
지유의 말에 선유가 뭔가 이해가 된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몰고 다니는 차, 자신에게 줬던 셔츠, 이사 갔다는 부모님이 사는 집. 거기다가 그녀의 백만불짜리 몸매. 그런 배경이 있었구나 싶다.
그 와중에도 뜬금없이 선유는 소민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소민이 아버지를 안 닮고 어머니를 닮은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
“몰랐어. 근데 그게 중요해?”
“뭐?”
“내가 반한 건 그 여자야. 그 여자가 어떤 여자든 딱히 상관없어.”
“거짓말하지 마.”
“네가 뭘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는 거지? 한시준? 그 놈이랑 내가 같나? 그딴 삼류 쓰레기랑 내가 같다면 넌 왜 나를 좋아한다고 난리야? 하긴 나랑 한시준이 다르긴 하지? 나는 네 생각에 범죄자고, 한시준은 선량한 시민이고? 네 논리대로라면 너는 범죄자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건데, 난 네 장단에 맞춰줄 생각 추호도 없어. 그러니까 내 주변에서 꺼져.”
그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고 하자 그녀가 황급히 선유를 붙잡았다.
“뭐야.”
“그 여자 어디가 그렇게 좋니? 내가 더 잘해 줄게. 나한테는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 그 여자 배경 때문에 그런 거라고. 난 이해할 수 있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만드는 지유 때문에 선유의 인상이 절로 험악해졌다. 그리고 실제로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그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지유가 움찔했다.
“나는 채소민이 그런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진, 그래서 내가 함부로 넘봐도 되는지도 잘 모르겠는 여자라는 거 오늘 처음 알았거든. 만약에 내가 채소민 배경을 알았다고 쳐. 그래서 내가 채소민 배경을 보고 덤벼들었다 쳐. 그럼 댁은 채소민보다 더 훌륭한 배경을 가지고 있나? 날 움직일 만큼?”
“난 널 사랑한다구. 네 과거를 알고도 널 받아들여 줄만큼. 그 여자앤 널 그렇게 생각 안할걸?”
“네가 날 받아들여? 이제 와서? 왜? 내가 필요했을 때는 나에게 좌절만 안기더니. 이제 와서 사랑? 사랑 같은 소리 하지 마. 상대방이 사랑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게 사랑이라고? 아니, 그건 집착이지. 내가 네가 필요했던 때가 아닌 지금에 와서야 이러는 널 나더러 이해하란 거야? 난 이해 못해주겠는데?”
“넌 스타잖아. 빛나는 스타. 그 때보다도 지금 더 빛나. 나도 한 번쯤은 반짝이는 걸 가져보고 싶었다구.”
절규 같은 그녀의 말이 그에게 닿았지만 그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날 반짝인다고 표현해준 건 고맙다고 해두지. 그런데. 반짝이는 걸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아?”
그녀가 붉어진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신도 빛나야 되는 거야.”
“내가 빛나지 않는다는 거야? 왜?”
“자기 꿈을 다른 사람더러 대신 이뤄달라고 하는데 본인이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해? 노력도 하지 않는데 그냥 빛나길 바란다고? 웃기지 마.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난 과거에 발목 잡혀서 내 현재에 있는 여자 놓칠 생각 전혀 없어. 여태껏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 못 알아들었어? 다시 한 번 말해 주지. 내 주변에서 얼쩡대지 말고 꺼져.”
그의 말에 지유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너는... 내 생각 한 적 없니?”
“있어. 채소민 덕에.”
“채소민. 채소민. 채소민!! 그 여자 때문 말고는 내가 생각났던 적 없어?”
“없어.”
“정말 단 한 번도?”
“있었어도 없어. 네가 지금 너에 대한 내 기억을 통 편집시켰거든. 깡그리.”
“뭐? 왜? 너만 바라보고 온 건데 어째서!!”
“지금 네 몰골을 봐. 되게 추해. 집착을 사랑이란 분간도 못하는 여자 따위 질색이야. 그리고 그런 여자하고 채소민을 동급으로 놨던 내가 수치스러워.”
“추해? 수치스러워?”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널 좋은 기억으로 남기길 바라면 적당히 하란 소리야. 사실 지금도 선을 많이 넘긴 했지만. 이쯤에서 물러나면 더 이상 문제 삼지는 않을게.”
“내가 더 가겠다고 하면?”
그녀의 말에 더 차가워 보일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선유가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입꼬리만 올라가 있는 그 미소는 미소가 아니었다. 차가운 눈동자가 그의 현재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해 봐.”
“뭐?”
“궁금하면 해보라고.”
어떤 협박보다도 더 무서웠다. 해보라는 말이 허락이 아닌 협박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걸, 그 말이 협박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사람 목을 조여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는 게 자신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거 알아?”
“뭐?”
“넌 정말 빌어먹을 놈이야.”
“알아. 나도.”
그녀의 말에 선유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착하다고 해주는 사람은 채소민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근데 그거 진짜야?”
“뭐가?”
“채소민이 정말 그런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졌다는 거.”
“세상은 참 불공평하지 않아? 먼저 알았어도 무언가가 조금만 틀어지면 금세 기회를 놓쳐버리잖아. 그리고 어떤 때는 그 기회가 영영 돌아오지도 않고 말이야. 지금 나처럼.”
“대답해주기 싫단 의미야, 그거?”
“내가 대답해 줘야 할 의무, 없잖아.”
그 말에 선유가 입을 다물고는 지유를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마침표를 찍는다.
“거 봐, 넌 내가 원하는 건 하나도 안 내놓잖아. 그게 무슨 사랑이야. 탐욕이지.”
미련없이 돌아서는 선유의 등이 누군가와 참 닮았다고 느꼈다. 일말에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는 당당해 보이는 저 등을 어디서 봤더라.
“그 여자네...”
기가 찬다. 겨우 몇 개월인데, 자신과 있던 몇 년 동안 자신이 옮지는 않더니 그 여자는 어쩌면 저렇게 빨리 옮아서 뒷 모습까지 닮게 되버린 걸까. 자신의 곁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던 뒷모습이라 지유는 더더더더더 밑으로 심연 깊이 자신이 처박히는 듯 했다.
그래서 지유는 소리쳤다.
“그 여자!! 한시준이랑 사귀었었어!!”
대번에 시선이 돌아온다. 혼란을 야기하려고 던진 외침인데 선유의 시선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은 그녀를 아예 심연 깊이 밀어 넣고 봉해버렸다.
“알아. 아니까 괜히 헛수고 하지 마. 내 관심사는 그 여자 과거가 아니라 내가 그 여자한테 어울리는 사람인가, 아닌가. 그거니까.”
대체 뭘까, 저 애정은. 저런 애정을 자신이 가질 수도 있었던 걸까 생각하니 더 목이 탔다. 미친 듯 한 갈증으로 온 몸이 타오를 것 같은데 정장 갈증을 선사한 선유는 돌아서 멀어져만 갔다.
가진 사람은 줄 생각이 없는데 자꾸만 탐이 났다. 그게 너무 비참해서 그 심연을 벗어날 방법을 쥔 사람은 열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서 지유는 지난 시간이, 선택이, 결정이 후회가 돼 딱 미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미칠 수 없는 건 그녀의 성격 탓이었다. 욕심은 크지만 꽤나 현실주의자인 탓에 어느 선까지 가능한 지를 계산하고, 그 계산을 넘어서는 일이 발생하면 돌아서는 그녀의 현실주의가 그녀를 깨어나게 했다.
“안된다고...”
그녀가 한 발 더 멀어진 선유의 뒷 모습을 바라봤다. 세란이 준 기한 중 남은 시간은 단 이틀. 끝이 난 기회의 최후의 최후를 앞 두고서야 현실이 보였다.
버렸던 남자는 자신이 뭘 하든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한 여자만 바라본다. 그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의심이란 단 한 톨도 없어서 뭘 하든 파고들 틈이 없다. 그 사실이 이제야 정확히 보였다.
“그래, 그렇네.”
지유의 입에서 남은 기한만큼의 허탈한 두 마디가 기어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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