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87화 (86/105)

87. 다행이다

87.

다음 날, 혹시나 몰라 옷을 바리 바리 싸들고 선유의 집에 온 소민은 비가 오는 탓에 오전 촬영이 쉰다는 말에 창가 옆 소파에 앉은 선유를 향해 투덜거렸다.

“진짜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럼...”

“그럼 뭐? 아침부터 안 왔을 거라고?”

“당연하죠. 일찍 일어나느라 고생하는 거 안 보여요?”

“내가 채소민 보고 싶어서 목 빠진 건 안 보여?”

“어휴, 말이나 못하면.”

선유의 말에 피식 웃은 소민을 보며 선유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채소민 뭘 이렇게 뿜어대?”

“뿜어요? 내가요? 뭘요?”

“왜 뿜고 있는 본인이 몰라?”

혹시 침방울이라도 뿜은 건지 이상한 냄새라도 나는 건지 소민이 눈을 굴렸다.

“대체 뭔데요.”

“예뿜.”

그의 대사에 소민이 입을 다물고는 경악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설마 지금 그거 농담한 거예요?”

“농담은 아니고 진담인데. 예쁘잖아. 채소민.”

“그래요. 나 예뻐요. 나도 알아요.”

“맞아. 채소민 정말 예쁘지. 지금은 더 예뻐.”

그의 말에 소민이 그를 불안하게 쳐다봤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어제 지유의 말처럼 그도 그녀의 배경을 알고 접근한 거라는 말을 하려는 건지 불안해지는 찰나 그녀를 바라보던 선유가 조용히 소민의 손을 잡았다. 준영에게 들었다.

소민이 지유에 대해서 꽤나 궁금해 한다는 걸. 왜 아니겠는가, 그 역시도 한시준에 대해, 그 둘의 관계에 대해 꽤나 궁금한데.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인데 왜 가만히 있어? 그러니까 더 예뻐 보이잖아.”

“묻고 싶지만 참고 있는 거예요. 한선유씨가 먼저 말해줄 거라고 믿으면서요. 그리고 지금 한선유씨가 먼저 얘기해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낭랑하니 예쁘게도 말하는 소민의 목소리에 선유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여전히 심지 곧은 눈빛을 한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여자가 이렇게 날 믿어주는구나 생각하니 장거리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래. 얘기해 줄게. 이 말을 하면 채소민이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불쌍해서 옆에 있겠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궁금해할 거고, 오해가 생겨서 날 버리는 건 더 싫으니까 얘기해줄게.”

그렇게 비가 오는 창가에서 빗소리와 함께 선유의 나직한 목소리가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유는 너 말고 내 과거 얘기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사실 지유에게 말하기까지 참 시간이 오래 걸렸어. 지유가 내 코디 일을 시작한 게 스물일곱살이니까 벌써 사년 전이네.”

소민은 그제야 지유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너는 선유의 과거를 모른다는 말. 그게 그 의미였구나하는 안도가 가슴에 차올랐다. 자신이 모르는 과거가 아닌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게 한결 마음을 가볍게 해줬다.

이전 소속사에서 백치미 컨셉을 밀어붙인 탓에 잘생긴 동네 바보라는 칭호가 익숙하던 그는 팬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열성적인 팬은 몇 안 되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열성 팬이라는 지유는 신기한 존재였다.

그 증거로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 잘 다니던 패션회사에 사표를 내고는 코디 일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오게 된 것이라며 해맑게 웃었었다.

그런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 더 그에게 다정했고 잘 챙겨줬었다. 그래서 그가 이전 소속사와 계약을 끝내고 n엔터테이먼트로 옮길 때도 그를 따라 기꺼이 직장을 옮겼다.

“내가 새 엔터테인먼트로 옮기면서 카사노바 컨셉을 잡았다고 했잖아.”

그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짐작이 가서 더 안쓰러운 부분이었다.

“근데 사장한테는 잘 할 수 있다고 호기롭게 얘기했는데 실은 그렇게 쉽지 않더라고. 내 생활이 없이 기자들한테 시달리고 어딜 가나 파파라치가 있고. 밖에서 아는 사람하고 밥 한 끼 먹기도 힘들었어.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고 버텨야 하니까 버티고는 있는데 어딘가 허전한 그런 느낌. 그래서 지유가 눈에 들어왔던 건가봐.”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의 정도 못 받고 자란 그이기에 사실을 더욱 정에 갈급한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그런 그가 누군가 정을 주니 마음이 당연히 끌렸을 거라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정에 굶주리지 않았어도 누군가 주는 정을 매몰차게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용기를 냈어. 내 과거에 대해 얘기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내 부모가 어땠다는 걸 알아야 가끔 내가 이상하거나 다른 평범한 사람들 같지 않은 태도를 보여도 이해해줄 것 같아서. 사실 그런 구차한 얘기...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소민이 안타까움과 고마움을 담고 그의 손의 꼭 포개 잡았다. 그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과거 얘기를 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 자연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럼에도 용기를 내준 그가 좋았다.

그녀가 포갠 손을 응시하며 그가 지유의 말을 회상했다.

“넌 그럼 그 때 뭐했는데? 형이 아팠으면 너라도 병원에 데리고 가야 했던 거 아니니?”

“어?”

“사실은 너도 엄마를 독점하는 것 같은 형이 싫어서 없어지기 바랐던 거 아니냔 말이야.”

너무나 뜻밖의 말에 소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유가 끝으로 한 말은 결국은 나도 공범이란 말이었어.”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요?”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 여자를 숨겨줄 리 없다면서. 형이 죽어갈 동안 너는 뭘 했냐고.”

너무 잔인한 말을 한 지유를 향해 소민이 몸서리를 쳤다. 그가 겨우 6,7살 때 형을 지켰어야 했단 말일까? 그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도 어머니의 언어폭행에 지쳐있던 가냘픈 아이라는 걸 그녀는 몰랐던 걸까. 소민은 대체 지유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형의 이름으로 사는 것조차 위선이라고 했어. 정말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채소민도 그렇게 생각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약간은 젖은 눈으로 자신에게 묻는 선유를 향해 소민이 그렇게 말하자 선유는 마음 깊이 있던 짐이 한꺼풀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그게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더더욱 이 얘기를 아무한테도 할 수가 없어졌어.”

“그렇지 않아요. 잘못을 한 건 어른인데 누가 똑같이 학대당한 한선유씨한테 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난 한선유씨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도 자기 이름 대신 남의 이름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아요. 자기 잘못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한선유씨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그가 잡은 손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그동안 지고 있었을 마음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그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말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좋아한다고 하면 그의 상처를 보듬어줘야 맞는 게 아니었을까?

상처 난 자리를 다시 할퀸 그 여자를 향한 적개심이 피어났다.

“누구도 한선유씨를 비웃거나 욕할 수 없어요. 그리고 누가 그렇게 본다고 하면 내가 쫓아가서 다 혼내줄 거예요.”

제법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말에 선유가 작게 웃었다.

“다행이다.”

“뭐가요?”

“내가 채소민을 만나게 돼서 정말 다행이야.”

그의 말에 소민이 조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어깨에 기댄 그의 이마에 살며시 입 맞췄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나쁜 마음먹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꿋꿋이 버텨줘서 고맙다는 뜻이에요.”

“반칙이야.”

“뭐가요?”

“나한테는 아무 때나 그렇게 못하게 하면서.”

“그렇게 못하게 한다고 안 하는 사람이에요? 한선유씨가? 분위기 봐서 하는 거죠. 지금이 그 타이밍이라서 한 것 뿐이거든요?”

혀를 쏙 내밀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선유는 다시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만나서 다시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담아 소민에게 입 맞췄다. 그리고 그의 심장박동이 소민에게까지 닿아 소민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알 수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의 숨결 하나하나까지도 그녀에 대한 애정이 흘러 넘쳐서 공기 대신 그의 애정을 들이 마시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도. 채소민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단 의미야.”

살며시 입술을 뗀 그가 그렇게 말했다.

“별 게 다 고맙네요."

그렇게 말하는 소민 탓에 선유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정말 자신을 동정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자신이 한 일을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것이란 걸 알 수 있어서. 그리고 씨익 웃는 그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소민은 생각했다.

짧은 오전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착한 촬영장의 오후 촬영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가 온 뒤라 날이 흐린 탓에 더 어두워지기 전에 찍으려는 스텝들의 움직임으로 바빴다.

그 와중에 언제 자신의 촬영을 끝냈는지 아니면 촬영 틈에 잠깐 온 것인지 선유가 소민의 옆 자리에 있었다. 지유가 물끄러미 그 둘을 지켜봤다.

선유의 온 몸에서 나 정말 행복하다 하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저 옆에 앉아 있는 것뿐인데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시선을 느낀 소민이 뒤를 돌아봤다.

지유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긴 했지만 아마도 지금은 어려우리라. 그리고 굳이 묻고 싶지도 않았다.

선유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지유를 그녀는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느꼈다고 무조건 비난을 할 수는 없겠지만 소민의 입장에서는 그런 지유가 그를 정말 좋아한다고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녀는 지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