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86화 (85/105)

86. 꽤 잘 어울리네요

86

간만에 제운의 촬영장에 도착한 소민이 멀리서 와이어를 달고 움직이는 제운의 유려한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확실히 제운이 멋있긴 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제운이 와이어 액션을 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말 그대로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화면 속 인물이 눈 앞에 있구나하는 느낌.

하지만 선유는 어떤 연기를 해도 그녀와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건 그가 수시로 그녀를 향해 씨익 씨익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미소를 날리기도 해서겠지만 그를 온전히 의식하는 그녀 탓이 더 컸다.

“소민씨, 왔어요?”

“제운씨, 와이어 액션 멋있었어요. 여기 앉아요.”

와이어 액션이 멋있긴 했지만 보통 몸을 혹사하는 게 아닌 지라 걱정이 된 그녀가 의자를 권했고, 제운이 그녀의 말대로 의자에 앉았다.

“소민씨. 진짜 오랜만에 온 거 알죠?”

“미안해요. 근데 제운씨는 워낙 저 없어도 잘하는 분이라. 참! 지난 번에 전화는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괜찮아요. 그나저나 전화 그렇게 끊었다고 보기 껄끄러워서 안 왔던 건 아니죠?”

제운의 말에 소민이 민망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확히는 전화때문이라기보다 선유보다 더 보기가 껄끄러워 피했던 감이 있었다. 하기야 선유는 피할 시간도 없이 몰아 붙여 자신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들기도 했지만.

“농담이에요. 소민씨 곤란해 하는 모습도 재미있네요.”

“어휴, 어째 점점 제운씨도 한선유씨 닮아 가는 것 같아요.”

“소민씨가 선유씨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보여서 한 번 닮아 보려고 했는데. 비슷해요?”

“아니요. 제운씨는 제운씨대로 매력이 있잖아요.”

그 말에 제운이 계속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내려가는 듯 했지만 이내 아까와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게 소민씨한테 안 먹혀서 문제지만 말이죠.”

“하하.”

어색하게 웃는 소민의 웃음에 제운이 씨익 웃었다.

“어때요? 저 연기 잘 해요?”

“네?”

“저... 중국 가거든요. 이 정도 연기면 외국어로 해도 먹히겠죠?”

그 말에 소민이 제운을 순간 멍하니 바라봤다.

“혹시...”

“소민씨 때문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요. 그러니까 저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구요. 생각해보면 오히려 제가 소민씨 힘든 상황에 몰아붙여서 더 힘들게 만들었죠.”

“그렇지 않아요. 제운씨가 도와준 것도 많은데요. 정말 저 때문에 그러는 건...”

“소속사 대표님이 제가 한 사람의 연인이 되는 것보단 대륙의 연인이 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하세요. 생각해 보니까... 저도 아직 연기를 더 하고 싶구요. 소민씨도 좋지만 연기도 엄청 좋아하거든요.”

“미안해요.”

“그냥 숙녀에게 보이는 기사도 정신 비슷했던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생각해보면 그냥 저는 소민씨를 동경하고 있던 건지도 몰라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라서. 저 소민씨 아버님이 누군지 알거든요.”

“그랬어요?”

“네. 뭐 그것 때문에 소민씨 좋아한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구요. 아무튼 좋아하기는 했어요. 근데 그냥 거기까지 하려구요. 소민씨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 느꼈어요. 아, 내가 소민씨가 없어도 죽을 지경은 아니구나. 그런 정도구나. 그렇구나.”

제운이 애써 밝은 표정을 연기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소민씨를 좋아한다고 하는 건 일종의 동경인 거죠. 왜 학생 때 누구나 교생선생님 한 번쯤은 좋아하는 것 처럼요.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소민씨가 나를 알아봐줬기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내가 착각한 건지도 몰라요.”

제운의 말에 소민이 발끝을 내려보다 겨우 말했다.

“고마워요.”

“뭐가요? 안 좋아한다고 말해줘서요?”

장난스런 어투로 그렇게 말하는 제운을 향해 소민이 고개를 들고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제운이 그렇게 말하는데 자신이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할 수야 없었다.

“아니요. 나를 동경할 수준의 여자라고 생각하게 해줘서요. 제운씨는 참 나한테 아까운 사람이에요. 나보다 훨씬 착한 사람이 제운씨 옆에 있어야 어울려요.”

“지금 소민씨 안 착하다고 고해성사 하는 거예요?”

“그럴 지도 모르죠.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괜찮아요. 사랑한다면 자신에게만 착한 사람이 되면 돼요.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기 감정을 속이지만 않으면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어요. 설령 상처를 준다고 해도 그건 살짝 까진 정도라 다른 사람을 통해 치유 받을 수 도 있거든요.”

“그거 알아요? 제운씨는 진짜 나한테 오빠같은 사람이에요.”

“그거, 꿈도 꾸지 말란 말로 들리네요?”

그렇게 말하며 제운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중국에서 잘 되면 소민씨한테 한 턱 쏠게요.”

“기대할게요.”

소민의 말에 제운이 씨익 웃어보였고, 왠지 모르게 미안하면서도 씁쓸한 감정으로 소민은 선유가 일하는 촬영장으로 향했다.

“이럴 때 해결책은 하나지 뭐,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는 거.”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일전에 선유가 지정해 준 감독 옆자리 지정석에서 멍하니 그가 촬영하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어?”

“왜? 귀신이라도 봤니?”

“아니요. 또 왔단 사실이 신기해서요. 여배우도 꽤나 한가한 직업인가봐요.”

지유가 그녀의 옆에 서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선유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건 참... 묘한 기분이었다.

“너만 하겠니? 캐스팅 디렉터란 핑계로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녀도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하면 그만인 게 그 직업이잖아.”

가시 돋힌 그녀의 말에 소민이 그녀를 쳐다봤다. 아니 나이 좀 많다고 해서 좀 좋게 좋게 넘어가려 했더니 이 여자가 자신을 물로 보는가 싶었다.

“임지유씨 제가 불편한 건 알겠는데요.”

“아니. 불편한 거 아니야.”

“그럼...”

“꼴 보기 싫고 짜증나는 거야.”

그녀의 말에 사라져 훨훨 날아가려는 그녀의 인내와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소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자신도 지유가 꼴 보기 싫고 짜증도 났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니까.

“말씀이 지나치신대요?”

“참 좋겠어. 세상 편하게 살아서.”

“임지유씨.”

소민이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짜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뭘 쉽게 얻었다는 건지 대체 알고나 말하는 걸까? 노력에 인내를 거듭한 그녀로서는 그건 모욕에 가까웠다.

“채소민씨 아버지.”

지유의 말에 소민이 벌리려던 입술을 다물었다.

“채종환 감독. 맞지? 아주 어마어마한 부모님을 뒀더라구.”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거기다 어머니. 디자이너 레이첼 정. 가족이 이 정도니까 그렇게 까부는 거잖아. 안 그래?”

소민이 그녀를 노려봤다. 그걸 어디서 들었을까. 짐작이 가는 곳은 있었지만 물증은 없었다. 아니 어디서 들었는지 보다도 가족 덕에 그녀가 까불 수 있다는 건 무슨 호랑이 토끼풀 뜯어 먹는 소리인지...

“베를린 국제 영화제, 칸 국제 영화제 초청받는 감독인 아버지에, 모델출신의 풀났다 수석 디자이너 어머니. 날 때부터 다 가졌으면 하나쯤은 잃어도 되지 않나?”

“워,워,워. 임지유씨. 생각보다 입이 가볍네. 여기 다른 사람도 들을 수 있다는 거 몰라? 파트너씨. 조심 좀 하라구.”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시준이 뒤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준의 말에 소민은 짐작이 확신이 됐고 그를 노려봤다.

“너니?”

“뭐가?”

“내 개인정보, 신상 질질 흘리고 다니는 입 싼 놈 말이야.”

소민의 말에도 시준은 실실 웃음을 지었다.

“너 그렇게 말하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기분 좋네. 이런 모습 네가 우리 끝낼 때만 보였던 모습인데.”

“욕 먹는 걸 좋아하는 취향인 줄은 몰랐네. 뼛 속 가득 욕심만 들어찬 줄 알았더니.”

“욕 더 안 해?”

“안 해. 너한테는 욕도 아까워.”

그녀의 말에 비실거리던 웃음이 지워졌다.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는 욕심 아니 정확히는 탐욕이란 감정이 눈에 어려 있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그렇지만 한선유는 어떨까?”

“뭐?”

“너는 내가 네 배경을 봤다는 이유로 날 떠났잖아.”

“말은 똑바로 해. 넌 내 배경 때문에 접근했던 거잖아. 본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왔던 거였어. 아니야?”

“뭐든. 근데 만약 한선유도 네 배경을 알고 있다면?”

“그럴 리가 없어.”

“순진한 채소민. 넌 아직도 한참 멀었어.”

시준의 말에 소민이 일순 흔들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 직접 들은 말인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 어리석은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고, 답을 들을 거야.”

“그래. 듣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해. 내가 위로하고 다시 네 옆으로 돌아가게.”

“아니. 그렇다 해도 내 옆자리에 네 자리는 없어.”

“그럼 누굴 네 옆에 둘 건데?”

“아무도. 내 배경 때문에 접근하는 사람 따위 없게. 평생 혼자 살 거야.”

차라리 평생 혼자 살겠다는 그녀의 말에 시준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소민의 시선이 지유를 향했다.

“이봐요. 잠깐 따라와요.”

“왜? 어디 가서 머리끄댕이라도 잡게?”

“여기서도 잡을 수는 있어요. 제가 워낙에 타고난 배경이 대단해서 그 정도는 커버 가능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잔 말 말고 따라와요. 임지유씨도 배우면... 지금 제 위치가 어떤 위치인지는 아시겠죠? 그럼에도 저한테 발톱을 내미신 거니까, 저도 뭐라도 보여드려야죠.”

소민이 휙하고 바람이 나게 돌아서 앞장서서 가자 지유가 시준을 힐끔 쳐다봤다. 시준은 그저 소민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지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소민이 그녀를 이끌고 온 곳은 자신의 차 앞이었다.

“지금 차 자랑 하려고 따라오라 그런 거니? 네 배경이 좋다는 거. 충분히 알아.”

“나 지금 혈압 오르는 중이니까 좋게 말할 때 입 다물어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차 문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명함집 같기도 한 그것은 아코디언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소민이 그걸 지유에게 던졌다.

“이게 뭔데.”

“내가 날로 살아 온 거 아니라는 증거요.”

소민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지유는 마지못해 손에 들린 걸 펼쳤다. 그건... 온갖 각종 자격증이었다. 이건 마치 직장의 여신이라던 미스 김같았다.

“내가 부모님 덕에 기회가 더 많았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해요. 그런 자격증 딸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이 도와주셨던 덕분이긴 하니까. 그런데. 나 날로 먹고 편하게 산 거 아니거든요. 캐스팅? 물론 아버지 이름 대면 줄줄이 줄을 서겠죠. 근데 나 그렇게 안 했어요. 난 그렇게 공주캐릭터 아니거든요.”

“나보고 그걸 믿으라구?”

“맘대로 해요. 그런데 한선유씨한테만 물어봐도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내 가장 최근에 캐스팅 상대가 한선유씨였거든요. 그리고, 한시준이랑 임지유씨, 지금 두 사람. 꽤 잘 어울리네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그녀의 손에서 자격증 모음집을 다시 빼앗아서는 차에 집어던져 넣고는 사라졌다. 그 뒷모습이 너무 당당해서 지유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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