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85.
“유세떨지 마.”
고운 말이 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시작부터 공격이었다. 이 사람은 공격밖에 모르나 하는 눈빛으로 소민이 자신의 앞에 선 여자, 임지유를 바라봤다.
“네?”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것과 비슷한 멘트가 그녀의 귓가에 와 닿았다 떨어졌다. 아니, 잘나긴 했지만 그렇게 잘난 척하지도 않고 조용히 살고 있는데 왜 다들 그녀더러 유세떤다고 하는지 그녀가 기가 막힌 눈빛으로 마침 촬영에 들어간 하은과 그녀를 번갈아 봤다.
“지금 선유가 좀 잘 해 주니까 좋은가봐? 근데 과거에 선유를 아는 것도 또 미래의 선유를 알게 될 것도 나야. 한선유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안다면 그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당신도 한선유 옆에서 떨어져 나갈걸?”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에게 반말을 하는 그녀를 소민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게다가 선유를 불쌍하다고 평가하는 지유를 보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그를 왜 불쌍하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기 상황을 이겨낸 멋진 사람인데.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만 보이는데 지유의 눈에는 선유가 불쌍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평가절하를 당하는 선유를 대신해 소민이 화를 낼까 하다 이내 참고는 대꾸했다.
“그래서 임지유씨 당신은 떨어져 나갔었나요?”
“그게 뭐가 중요해? 다시 돌아왔다는 게 중요한 거지.”
“왜 돌아왔어요? 뭐가 탐이 나서?”
“뭐가 탐이 나냐니? 당연히 한선유지. 그러니까 포기해.”
불쌍하다면서 이제는 탐이 난다고 한다. 그 속이 빤히 들여다 보였다. 선유가 탐이 난다기 보다는 선유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게 더 탐이 나서 그러는 게 훤히 보여서 대한민국 최고 미녀 여배우라는 지유의 얼굴이 고와보이질 않았다.
더군다나 이제 막 인정하기 시작한 감정이었다. 소민으로서도 선유를 받아들이기까지 마냥 쉽지만은 않았는데 대뜸 포기하라고 하니 소민은 기분이 몹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뭐?”
“저도 꽤 탐이 나는 사람이라서요. 그렇게는 못하겠네요. 그리고 보니까 한선유씨는 그쪽보다 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쪽이야 말로 포기하는 게 어때요? 그건 그 쪽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내가 전력투구하면 좀 막 나가는 스타일이거든요.”
“나, 한선유 어머니한테 허락받고 이러는 거야. 너는... 허락 받았니?”
그 말에 소민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한선유씨가 애기처럼 보이나 봐요? 엄마 허락받아야 하는? 그렇게 한선유씨 어머님이랑 사이가 좋으면 한선유씨 어머니랑 연애를 하세요. 한선유씨 말고. 전 한선유씨랑 사이가 좋아서 한선유씨랑 연애할 거거든요? 그리고!! 지난 번에 말씀드렸죠? 저보다 더 나쁜 사람 같은데 더 나쁜 사람이랑 사귀시라고. 그렇게 하시길 바라며 저는 이만!”
소민이 숨돌릴 틈도 없이 다다다닥 쏘아 붙이고는 휙 하고 돌아서 달려갔다. 지금 이 마음은 임지유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촬영만 하고 있을 선유를 봐야만 가라 앉을 것 같았다.
씩씩거리며 촬영에 몰두한 선유를 지켜보고 있는데 슬그머니 준영이 소민 곁으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시준이 접근하지 못하게 신신당부를 한 터라 소민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콧김을 쌕쌕 내뿜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혹시 시준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은 선유에게 태풍에 날아가는 지붕처럼 와장창 깨질지도 몰랐다. 소민과 관련된 일이라면 선유는 거센 태풍과도 같이 굴려고 했으니까.
“저... 누님? 괜찮으세요?”
“별로 괜찮진 않지만 괜찮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런 젠장! 별일이 없길 바랐는데 별 일은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랑 뒤에서 커피 마시지 말고 빨리 왔어야 했는데 속으로 자책하며 준영이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임지유씨요.”
예상을 벗어난 이름에 준영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왜 자꾸 촬영장에 올까요?”
“그... 글쎄요?”
“스컹크 똥꾸멍처럼 생겨서는.”
“네? 뭐요?”
“있어요. 그런 거. 근데 임지유씨는 한선유씨랑 오래 사귀었어요?”
“사귀기는요. 사귀기도 전에 임지유씨가 형님한테 상처줬는데요.”
이건 예상 밖의 이야기인지라 소민이 준영을 쳐다봤다.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형님이 남 얘기 막 하고 다니시지는 않으니까. 근데... 임지유씨가 나쁘다는 건 알죠.”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아니 모른 척이면 차라리 나았다. 남의 가슴 아픈 얘기를 무기삼아 그 가슴을 잔뜩 헤집어 잔인하게 상처 내놓고는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얘기는 두 사람 아니, 이제 세 사람의 문제였으니까 준영이 대신 말을 하는 건 옳지 않았다.
“나쁜 사람이란 건 저도 알아요.”
욕심이 눈에 보이니까요. 그녀도 진즉에 본 적이 있는 눈빛을 하고 있어서 너무 잘 보였다.
“가장 확실한 건 형님한테 물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요. 그래야죠.”
그렇게 말한 소민이 앞을 바라봤다.
지유는 자신이 생각했던, 예상했던 그림과 너무나도 다른 현실에 짜증이 났다. 맨 처음 선유의 옆 자리를 가져봤던 그녀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자신을 볼 때의 그의 표정을.
선유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보여도, 한 번 자기 사람이 된 사람들에게는 열렬히 몰두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자기 사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싶어했다.
그런 그이기에 소민과의 스캔들이 났을 때도 제운에게 무언가를 비견당하는 게 싫어서 일거라고, 제자리를 뺐기기 싫어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 여자를 악세사리쯤으로 생각하는 것일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차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은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타이어를 걷어찼다.
“이런, 이런. 그렇게 찬다고 타이어에 문제가 생깁니까?”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행동에 참견을 하자 그녀가 휙하고 돌아봤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불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 참. 마음에 드는 눈빛이네요.”
“한시준씨, 맞죠? 드라마 촬영하는 것 같은데 한가해 보이네요?”
“네. 한가합니다. 근데 이제부터 좀 바빠져 보려구요.”
“그러세요. 그럼. 전 이만.”
앞좌석 문을 여는 그녀의 손을 그의 말이 잡아챘다.
“한선유 옆 자리. 갖고 싶지 않습니까?”
그녀가 멈칫하며 그를 돌아봤다. 그녀의 반응을 짐작했는지 그는 미소도 없이 그저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랑 목적이 같은데, 손 잡지 않겠습니까?”
“한선유 옆자리가 목적이라니. 당신 게이야?”
“아, 오해하시면 안 되죠. 제가 탐나는 자리는 그 쪽이 아니라 채소민 옆자리거든요.”
“왜?”
“이유가 중요합니까?”
“파트너가 되려면 적어도 기본 정보는 알아야지.”
“흠... 그 전에 왜 자꾸 반말 하시죠?”
“내가 너보다 나이 많거든. 너 서른이지? 나 서른 하나야.”
“근데... 제가 이 바닥 생활은 먼저해서 선배일텐데요.”
“선 후배 따지자고 나 불렀니?”
매섭게 말하는 지유의 태도에 시준이 한 발 물러났다. 하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넘어가기로 하죠.”
“그래서 동기가 뭔데?”
거짓말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짝이는 지유의 눈빛에 시준이 순순히 그러나 온전하지는 않은 답을 뱉어냈다.
“한선유는 모르겠지만 채소민은 호박이거든요.”
“호박?”
그의 말에 지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부러울 정도로 예쁜 외모인데 호박이라니. 이해가 안 됐다.
“그 정도로만 아시면 됩니다. 뭐 피차 소기의 목적 달성하면 안 볼 사람들일 거잖아요. 우리.”
“뭘 어쩔 건데?”
“글쎄요?”
“한시준씨. 나 지금 상황이 안 좋거든. 너랑 말장난 할 시간 없어. 너는 여유가 있는지 몰라도 난 제한 시간이 있는 게임이나 다름이 없거든. 그러니까 내가 더 열 받기 전에 할 말이 뭔지나 얘기해. 결정은 내가 할 테니까.”
“흠... 시간이 얼마 없으시다니. 잘 됐네요.”
“누구 놀려?”
“아니요. 저도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제 코디가 되어 주시죠.”
“뭐? 무슨 소리야.”
“앞으로 남은 드라마 촬영 분은 대략 7, 8회 분입니다. 당장 다음 주에 첫방인데 반 사전제작 드라마라 남은 기간 얼마 없어요. 채소민은 그동안 저를 계속 피해왔고, 이 드라마 끝나면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제 이해되시죠? 왜 시간이 없는지. 그러니까 저도 남은 시간동안 뭔가 해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남은 기간 동안 제 코디로서 촬영장에 계시란 말입니다. 물론 가만히 계시란 소리는 아니라는 거 아시죠?”
“내가 할 일은 그것 뿐이야?”
“뭐 더 하고 싶으세요?”
“채소민 옆자리가 목표라더니 내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된다는 게 이상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난 배우인데, 갑자기 네 코디 일을 하면.”
“취미삼아 친한 동생 옷 코디 해준다고 하세요. 이전 경력이 코디였잖아요. 어차피 저는 채소민 옆자리에 있는 사람만 떨어지면 됩니다.”
“좋아. 그걸로 충분하다면 나는 손해 보는 장사 아니네.”
“그런 셈이죠. 하지만 손해 보는 장사 아니라고 대충 하시는 건 용납 못합니다.”
마지막 말과 함께 시준의 눈빛이 차게 번뜩였다. 그 눈빛에 지유가 과연 저 남자와 손을 잡는 게 좋은 생각일까 고민했지만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것만 해도 그녀 나름대로 기를 쓰고 와야 했던 것인지라 또 다른 기회가 언제 생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걱정 마.”
“걱정 안하게 잘 해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너나 잘해.”
그렇게 말한 지유가 차에 올라타고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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