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침입 좀 해보지?
84.
따뜻하고 사랑을 듬뿍 주는 가정에서 자란 소민에게 선유의 과거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픈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 그녀의 눈에서 이렇게 펑펑 눈물이 난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 일일까?
유니세프광고나 노란우산 광고를 보면 불쌍한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대신 전화 한통을 선택했었다. 물론, 선유에게 그런 전화는 필요 없겠지만.
“왜 이렇게 눈물이 나나 몰라.”
선유가 촬영을 들어가고 자신의 차에 앉은 소민이 아직 나오는 훌쩍임을 삭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와 관련된 기사는 모두 섭렵했지만 어떤 기사도 그의 그런 과거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모든 기사에는 그의 여자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니까. 새삼 그가 겪었을 아픔이 너무도 생생하게 와 닿아서, 그 시간들을 홀로 감내했을 그가 너무도 가여워서 또다시 코 끝이 아려왔다.
“에이, 고만 울어야지.”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생각해서 모든 캐스팅 대상들과 친밀하긴 하나 절대 안전거리를 유지했었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아는 게 무서워서, 또 그녀의 속마음을 들키면 안된다 생각해 항상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한계치 내에서만 접근을 허락해야 한다 생각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였는데, 안전거리가 허물어지다 못해 무너진 게 한 눈에 보였다.
그녀의 뇌리에 선유와 나눴던 나머지 대화가 맴돌았다.
“그래서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요? 계속 그 이름으로 살 건가요?”
“그럴 생각이야. 어쨌든, 누군가 형을 추억해주는 사람은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달리 형을 추억해 줄 사람이 나 외에는 없으니까.”
“근데 이상하네요. 어릴 때 형이 그렇게 유명했다면, 지금 한선유씨 뒤에 어릴 적 이야기가 따라 다녀야 하잖아요.”
“처음 돌아와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내가 방송에서 발작을 했지. 아니 발작을 하는 연기를 했어.”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시점이었다. 십대 초에 불과했던 그에게 그의 어머니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건강에 좋다는 것을 챙겨 먹였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변했구나, 자신에게 관심이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진심을 알게 됐다.
“먼저처럼 폐렴이든지 뭐로든지 쓰러지면 이젠 끝이야. 내 말, 알아듣겠어요?”
늘 먹던 약을 가지러 간다는 어머니가 그 날 따라 오래 걸리길래 나왔는데 어머니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그렇게 말했다.
“폐렴이 뭔지 잘 몰랐어. 그래서 인터넷으로 찾아봤지. 근데 병이 어떻게 진행되고 그런 것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치료가 가능한 병이었다는 거였어.”
그제야 알았다. 형이 왜 죽었는지, 왜 자신에게 몸에 좋다는 약을 챙겨 먹이는지. 그리고 지독한 증오가 끓어올랐다. 치료가 가능한 병에도 불구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해 형을 죽게 만든 그 여자에게.
“변한 게 없었던 거야, 그 여자는. 나도 대체품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코너로 몰아넣었을 거라는 걸 알게 됐지. 방송국에서 녹화 도중에 눈을 뒤집고 쓰러지는 척을 하면서 알았어. 내가 노래보다도 연기에 꽤 소질이 있다는 걸.”
“그럼 그동안은 노래를 했던 거예요?”
“뭐, 형보다 노래를 못하긴 했지만 못하는 건 아니었는데 사실 소질은 연기 쪽에 있었던 거지. 그리고 하나 더 알게 됐지. 그 여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내가 쓰러지는 거라는 사실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 여자에게는 내가 마지막 돈 줄인 셈이니까.”
울지 않겠다고 그렇게 그렇게 다짐을 하고 들어왔는데 또 울 것만 같았다.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을 어머니라고, 엄마라고 부르지 못하고 그저 그 여자라고 부르는 그가 불쌍하고 또 불쌍해서. 열면 안 되는 상자를 열었던 판도라처럼 소민은 물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요?”
“쉬겠다고 했어. 지금 쉬지 않으면 난 발작을 반복하다 죽을 거라고 협박했지.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 큰 다음에 스스로 돌아오겠다고 마음먹고 돌아온 거야. 그러면서 단서를 달았어. 돈은 줄 수 있지만 과거 얘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고, 형 얘기 꺼내면 난 죽어버릴 거라고. 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거라고 그랬어.”
“그 말을 들어줬어요?”
“그 여자는 어쨌든 돈만 벌면 됐을 테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거겠지. 그리고 내가 쉬는 동안 버틸 정도로는 돈을 벌기도 했었고. 뭐, 복귀한 뒤를 대비해서 그 때까지 대고 있던 연줄을 댄 것도 그 여자고 거기에 기대서 빠르게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여자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랬던 거니까 그걸 고맙다고 하고 싶지는 않아.”
“과거 얘기는 왜 하지 말라 그랬어요?”
“어쨌든 내 하나 남은 핏줄이잖아. 사람들이 혹시라도 그 여자가 어떤 여잔지 알게 될까봐. 내가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욕하는 것까지 참을 수는 없을 것 같았거든.”
그의 말에 소민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그런 삭막한 부모 밑에서 자랐음에도 따뜻한 피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소민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자신은 욕해도 다른 사람은 욕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이 너무도 따뜻했다.
“나한테는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녀의 질문에 선유가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심지 곧은 눈동자가 그를 바로 보고 있었다. 어떤 편견도 없이. 온전히 그의 말을 믿어주며. 거기 그렇게 있었다.
“어.”
“왜요?”
“글쎄...”
그의 시선이 그녀를 꼼꼼하게 훑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훑어 내리는 곳마다 왠지 모르게 간질거리는 듯 한 느낌에 소민이 바르르 떨었다.
“채소민이니까. 채소민이라서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아.”
진지한 그의 말에 소민은 그제야 깨달았다. 선유는 단순히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자신의 치부 하나 하나 깊숙이 보여줄 수 있을만큼 그녀를 믿고 있다는 걸. 얕은 잣대로 그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한 자신이 부끄러워진 소민이 왠지 지금은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질문을 던졌다.
“무는... 왜 못 먹어요?”
그 말에 선유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말했다.
“형이 아팠던 날... 그러니까 엄마라는 여자는 PD랑 나가서 흥청망청 하던 날, 집에 먹을 게 별로 없었어. 어리다보니까 요리를 해먹을 수도 없었고. 형이 아픈 몸을 끌고 밥통에 남은 밥이 있나 봤는데 밥도 없었어. 내가 냉장고를 뒤져서 겨우 찾아낸 게 언제 냉장고에 있기 시작했던 건지 싹이 돋아난 무였어.”
“그럼...”
소민이 차마 너무도 가슴 아픈 이야기에 말을 잇지 못하자 선유가 마지막 끝맺음을 냈다.
“맞아. 형이랑 나랑 마지막으로 나눠 먹은 게 그 무 쪼가리였어. 그 이후론... 무만 봐도 몸이 벌벌 떨리는 겁쟁이가 된 거지.”
“그게... 그게... 왜 겁쟁이에요. 무를 보면 형 생각이 날테니까... 마음이 아프니까 그러는 게 당연한 건데. 그걸 왜 겁쟁이라고 해요.”
“고맙네. 그게 아니라고 해줘서.”
선유가 씁쓰레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사람이 왜 무 그려진 내 사인을 달라고 해요. 제대로 보지도 못할 거면서. 내가 사인 다시 만들어서 해줄게요. 무 안 들어간 걸로.”
“희한하게 채소민이 그린 무 사인은 보고도 괜찮았어.”
“거짓말.”
“진짜야. 인터넷에 올라온 사인 봤는데 괜찮았어. 채소민이 무를 무같지 않게 그려서 그런가.”
아무렇지 않은 척 우스갯 소리를 하려는 선유를 물기 어린 눈으로 보던 소민이 한 번 눈가를 훔치고는 물었다.
“한선유씨 내가 문제 낼게 맞춰 봐요.”
“맞추면 뭐 주나?”
“장난하지 말구요. 나 지금 진지해요. 말을 볼 수 있다면 지금 내 말들은 다 궁서체거든요? 러시아 태생의 화가로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은?”
“칸딘스키?”
“중력이 야기하는 단위 시간당 물체의 속도 변화량은?”
“중력가속도. 뭔데, 이거 왜 묻는데? 왜 갑자기 시험 보는 건데. 괜히 기분 나쁘게.”
“아니, 내가 본 것도 있고, 들은 것도 있어서... 물어본 건데 이건 거의 사기급이네요.”
“사기라니?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채소민.”
“사실은 내가 한선유씨 생활기록부를 좀 봤는데요. 의외로 성적이 좋더라구요?”
“의외로?”
“의외죠. 완전 뜻밖! 한선유씨 본인 이미지 몰라요?”
“알아. 백치미, 카사노바.”
“그러니까요. 게다가 백대표님이 그 백치미 이미지가 사실은 전 소속사 대표님이 만든 거라고 해서 의심스러웠는데. 성적표 보고 뜨악했거든요. 그래서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던 건데.”
“역시... 부담스러운가?”
“부담스럽냐고요?”
“그래. 전 대표는 지나친 완벽남은 부담스럽다고 백치미로 가자고 그랬거든.”
“헐. 방금 그거, 나 완벽남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거죠? 왕자병.”
“출생이 거지인 왕자가 어딨어.”
“아, 출생만 아니면 왕자였다?”
계속해서 분위기를 전환하려 노력하는 소민의 모습에 피식 웃은 선유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데... 내 생활기록부는 왜 본거야?”
“스토커니까요.”
“뭐?”
“허락도 해놓고 이제와서 뭘 새삼스럽게?”
“아니, 내가 왜 스토커 하라고 해줬게? 내 생활기록부 보라고 해줬겠어?”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그럼 왜 해줬는데요?”
“혹시 뉴스 좀 봤나?”
“무슨 뉴스요?”
“어느 남 배우 집에 사생팬이 침입했다는...?”
“설마...”
“내 집 비밀번호도 알고, 허락도 받았고. 침입 좀 해보지?”
능글 능글 소민을 놀리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이마를 찡그리더니 말했다.
“한선유씨도 없는 빈집에 내가 침입해서 뭐해요?”
소민의 대꾸에 선유가 멍해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꼭 끌어 안으며 말했다.
“아, 내가 없어서 침입을 안 했다? 나 다음 주에 집에 갈 건데. 다음 주에 침입할 건가?”
“무, 뭐, 뭐라는 거예요!!”
버둥거리는 소민을 꼭 끌어안은 선유가 킥킥거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가만히 있어. 채소민 부끄러울 것 같아서 지금 숨겨준 거니까. 아니면 얼굴 빨개졌나 봐줘?”
“돼, 됐거든요?”
새삼 떠오르는 기억에 얼굴에 불이 나는 기분이라 소민이 화락화락 손부채질을 할 때였다.
‘똑똑.’
선유가 촬영이 끝난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선유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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