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83화 (82/105)

83. 반가워요.

83.

그의 아버지는 진정한 한량이었다.

그의 아버지에게는 여자가 끊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그의 아버지는 여자에게 돈을 쓰는 데 있어서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여자가 따랐고 그의 어머니도 그런 여자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고아였고, 성인이 되어 고아원을 나와서는 지독히도 가난한 삶을 살았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지.”

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비소를 머금으며 어린 그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어쨌든 그런 그녀에게 돈을 잘 쓰는 아버지는 꽤 부잣집 아들 같아 보였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자신을 이 초라한 신세에서 구원해 줄 동아줄로 여겼다.

그래서 그녀는 덜컥 임신을 했고, 그것을 빌미로 아버지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와는 상당히 달랐다. 아버지는 부자도 아니었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녀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연히 그는 어머니를 부양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어머니가 번 돈까지도 끌어다 자신이 쓰기에 급급했다.

물론 그 돈은 다른 여자들의 가방, 구두, 반지, 목걸이가 되어 그의 어머니를 괴롭게 했다. 숱한 다툼과 갈등 끝에 그의 아버지는 완전히 어머니를 떠났다. 그의 형이 태어난 지 3년, 그가 태어난 지 6개월만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걸려온 낯선 전화 한 통이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어머니와 형제를 버리고 갔던 아버지는 타향에서 치정에 휩쓸려 싸움 도중 분에 못이겨 날뛰다 혼자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졌다고 했다. 한량이던 아버지다운 죽음이었고, 누구의 동정도 없는 싸늘한 죽음이었다.

“빌어먹을 놈. 죽으려면 보상금이라도 받게 교통사고로나 죽지.”

그의 어머니의 짧은 소감이었다. 정말 기댈 만한 곳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의 어머니는 이전보다 더 심하게 돈에 집착했다. 그래, 그건 집착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돈이 쉬이 벌릴 리 만무했고, 그들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였다. 그럴수록 그녀의 푸념도 나날이 더해갔다. 그리고 아버지를 빼닮은 그들 형제에게 어머니는 폭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던 그는 세상 모든 어머니는 그런 거라 생각했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 그에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오히려 똑같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폭언 앞에서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는 자신의 형이 그에게는 더 소중했다.

그런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찾아왔다. 아니 그건 그의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기적이었지만, 그와 그의 형에게는 악몽의 시작이었는지도 몰랐다.

그의 형이 우연찮게 어린이 동요대회에 나갔던 것이 발단이었다. 그리고 그의 형이 노래를 잘한 것도, 그리고 아버지를 닮아 외모가 썩 훌륭했다는 것도 화근이었다. 동요대회에서 빼어난 외모로 형은 제법 훌륭하게 노래를 했고, 1등을 차지했다.

한 번 방송을 타고, 외모가 뛰어난 형은 TV쇼에 출연까지 하게 됐다. 그게 돈이 되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그의 형과 방송국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방송국 방문빈도가 높아질수록 나날이 화려한 옷차림이 되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제야 웃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 형제를 향해서가 아니었다. 형을 통해 돈을 벌면서도 그의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그 빌어먹을 놈을 닮아가지고 아주 끔찍하고, 역겨워.”

그들에게는 독설을 서슴지 않는 그녀가 웃어 보이는 상대는 방송국 사람들이었다. 방송국에서, 남들의 시선 앞에서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어머니인 양 행세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 남들의 이목 때문에 자신에게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일지라도 그 다정함이 좋아서 형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형은 아직 어렸고, 그렇게 계속해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스케줄을 감당하기에 어린 아이인 형의 체력에는 곧 한계가 왔다. 빽빽한 스케줄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 날부터 형은 잦은 기침과 가슴의 통증을 호소했다.

이따금 그는 형이 빨개진 얼굴로 땀을 흘리는 것을 보기도 했는데 형은 더워서 그런 것 같다고만 말하곤 했다. 그게 증상의 일부였음을 안 것은 그가 한참 크고 난 뒤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형이 그렇게 잦은 기침을 해도 방송에 방해된다며 기침을 완화시키는 약만 계속 먹이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늦은 밤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형을 집에 두고 어머니는 방송국 PD와 회의를 해야 한다며 그와 형을 집에 두고 외출에 나섰다.

“그 날따라 형은 유독 새빨간 얼굴이었어. 가슴도 계속 아프다고 했고, 기침도 쉴 새 없이 했지.”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잔뜩 아픔을 담고서 아프다고 아파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준비가 돼있다고 호소하는 눈빛은 소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안타깝게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 여자가 새벽에 나가서 술을 마시며 PD와 흥청망청 거리고 있던 그 시간에 형은 호흡곤란이 와서 죽었어. 아침에 형을 깨우러 가서 형의 차가운 굳은 몸을 흔들 때 그 기분을 알아? 나무토막같은 그 차가움만 가득한 그 시체가 내 형이라는 걸 난 믿을 수가 없었어.”

기어코 소민의 눈에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어린 아이였을 그가 자신보다 조금 더 큰 어린아이인 형의 시신을 깨우려 애쓰는 모습이 그려져 울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근데 형이 호흡곤란이 온 이유가 뭔지 알아? 폐렴이었대.”

그의 형은 폐렴이었다고 했다.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어머니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럼 형 때문에 어머니가 미워요?”

“아, 물론 형 때문에 그런 게 70프로 정도.”

“나머지 30프로는요?”

“그 여자가 변한 게 없다는 거. 난 5살부터 형 이름으로 살았어. 어머니는 방송국에 철저하게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숨겼지. 잠깐 휴식이 필요하다며 날 데리고 해외로 갔다 올 정도로 그 여자는 철두철미했어. 물론 방송국에 늘 형만 데려가긴 해서 그 사람들은 내 존재도 몰랐지만 얼굴이 약간 달랐지. 근데 애들은 클수록 얼굴이 바뀌잖아. 뭐 다르긴 해도 같은 배에서 나왔으니 닮기도 닮았었고.”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건 대체 어떤 걸지 소민은 가늠키도 힘들었다.

슬퍼 보이지만 울지 못하는 그를 대신하는 것처럼 소민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꿈이 없었던 게 아니야. 나도 꿈이 있었어. 근데도 난 적을 수 없었어. 내 이름은 형 이름이니까. 형 이름으로 쓰는 꿈은 형의 장래희망이어야 하니까. 근데 형은 뭔가 꿈을 꾸기도 전에 가버렸잖아. 대신 형이 그나마 행복해 했던 연예계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이건 그 여자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내가 형을 위해 택한 거야.”

힘이 들어간 그의 턱이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고 있는 것 같아 소민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끌어안아 토닥였다.

“근데, 형을 위한 사람은 있지만 나를 위해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더라구. 하긴 내 어머니라는 여자마저 애정을 주지 않는데, 누가 애정을 줄 수 있겠어. 채소민 말대로 나는 그냥 누군가에게 나를 봐달라고, 관심을 가져달라고 구걸한 건지도 몰라.”

그런 그의 표정을 알아챈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인생 29년 전체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그래서였나보다. 그녀의 어깨에서 그렇게 따뜻한 향이 났던 것은...

그래서 그녀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낸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다르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면서.

혹시 소민이 자신의 바람과 다른 반응을 보인다면, 그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진짜 이름이 뭐예요?”

발간 눈으로 여전히 눈물을 달고 그의 등을 토닥이던 소민이 그에게 물었다.

“한선류. 아버지, 어머니란 작자는 이름 짓기도 귀찮았던가봐. 형은 부드러울 유, 나는 흐를 류를 써서 그냥 헷갈리게 지었거든. 뭐 그것도 지금 내 이름은 사망신고가 돼 있겠지만...”

“좋은 이름이네요. 학교는 어떻게 다녔던 거예요? 형 호적으로 살았다면 나이차이 때문에 공부하기 힘들었을 거 아니에요.”

“그 여자가... 해외에 나갔다 와서 한국식 교육에 익숙하지 않을 거라면서 선생님들을 설득했어. 그래서 내 나이에 맞게 학교는 다녔지.”

“힘들었겠어요. 그동안.”

“내가 어떻게 힘들다고 불평할 수가 있겠어. 형한테 미안해서라도 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

“사실은 엄청 착한 남자였네.”

“내가? 채소민한테 칭찬도 받아보고. 좋네. 진작 얘기할 걸 그랬어.”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목소리에 소민이 안고 있던 팔을 풀고는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한 손을 내민 채 여전히 눈가에는 눈물을 달고 웃어 보이며 소민이 말했다.

“반가워요. 한선류씨. 캐스팅디렉터 채소민입니다.”

그런 그녀의 손을 맞잡고 선유가 말했다.

“반가워요. 채소민씨. 한선류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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