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이런 거 안 해봤어요?
82.
잠깐 얼굴을 비췄던 소민은 금새 또 사라져 보이지를 않았다.
대체 뭐가 그리 바쁜지 도토리 숨기는 다람쥐마냥 왔다갔다하는 데 그게 또 며칠 째였다.
물론 촬영현장에 그녀가 필요한 건 아니었고, 옷도 미리 미리 준비해뒀지만 몇날 며칠 연락 두절이 되는 건 영 탐탁지 않았다. 다음에 보면 주의라도 줘야지 하고 있는데 이 여자, 그에게 연락 한 통이 없었다.
그 사실에 슬그머니 약이 올랐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녀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건 숫제 무관심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건 방목이지, 방목.”
마치 자신이 가두리 양식장에 갇힌 물고기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바다로 나가고 싶다는 건 아니었지만.
“방목이요? 뭐가요?”
“채소민!”
“네. 저 채소민이예요.”
갑자기 나타난 그녀가 반가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에 울컥 서러움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이건 마치 지아비를 기다리며 독수공방하던 조선시대 여인네 같았다.
“따라와.”
소민의 손목을 덥석 잡은 선유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자신의 벤으로 향했다. 익숙한 벤에서 그의 체취가 나는 것을 보며 소민이 그를 바라봤다. 그런 소민을 선유가 쏘아보며 물었다.
“이 봐.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했는지 잊었어?”
“그게 뭐 어때서요?”
천연덕스레 되묻는 모습에 이마에 힘줄이 돋아 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천하의 한선유가 이렇게 쩔쩔 맬 수는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소민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과는 달리 이 여자는 바람의 여신이라도 되는지 무척 자유로웠다.
“이 봐.”
“채소민이요. 정말 자꾸 이 봐라고 부를래요? 그럼 나도 저기요. 이렇게 부를 거예요?”
며칠간 코빼기도 안보이다가 와서 한단 소리가 이랬다. 어쨌든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으니 여기서는 접어주기로 했다.
“그래, 채소민. 하나만 묻자.”
“뭔데요?”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대체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전화도 없고!”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선유는 소민이 그렇게 쳐다보자 은근한 기대를 갖고 그녀의 입술을 쳐다봤다.
“한선유씨도 나한테 전화 안했잖아요.”
“뭐?”
“본인도 전화 안 했으면서 나한테 그렇게 말 할 수 있어요?”
“나는 바빴잖아.”
그의 답에 소민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조금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안했어요.”
“그래서 안했다니 그게 뭔 소리야?”
“바쁠 것 같아서 안 했다구요.”
“바빠도 채소민 전화 못 받을 정도는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요.”
거짓말이라고 일축해버리는 소민의 말에 선유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거짓말이라니?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한선유씨. 한선유씨가 제 전화 받을 수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근데요. 인터넷에 한선유씨 촬영장에서 쪽잠 자는 거 올라왔거든요? 바쁘지 않다고 거짓말이나 하고 있어.”
소민이 그렇게 종알대자 선유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 없었어도 기사를 챙겨봤다니 그게 또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채소민. 내가 나오는 기사를 챙겨봤어? 혹시 일부러 검색해서 봤나?”
“아, 아니거든요?”
얼굴이 빨개진 채 그렇게 버럭 외치는 게 그랬다고 대답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선유의 입꼬리가 올라가다 못해 찢어질 지경이었다.
“거짓말쟁이는 따로 있구만. 근데, 기사로 보는 것보다 실물로 보는 게 더 좋지 않아?”
능글거리는 그의 질문에 소민이 또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선유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귀여워 죽겠네.”
“이 나이에 귀엽다는 말은 실례라구요.”
“그래도 귀여워.”
“예쁘다도 아니고, 귀엽다라니. 내가 무슨 곰인형인 줄 알아요?”
“그건 곤란한데?”
“뭐가요?”
“곰인형을 데리고 다니면 내가 찌질이같아 보일 거 아니야.”
“지금도 좀 그런 기질은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찌질이라고?”
“쫌 멋질 때도 있고. 아, 이러려고 온 거 아닌데.”
품에 안겼던 소민이 쏙 빠져나갔다. 선유가 헛헛한 기분으로 불만스레 그녀를 쳐다봤다.
“왜?”
“감독님한테 방금 여쭤봤는데요. 방영일 잡혔대요.”
“그래?”
“이번에 CBC에서 끝나는 드라마 끝나면 바로 들어간대요.”
“그거 인기 없었잖아.”
“네. 그러니까 한선유씨가 CBC에 구원투수가 돼야 한단 말이죠.”
“채소민.”
“네?”
진지한 목소리에 소민이 바짝 긴장해서는 선유를 쳐다봤다.
“이 드라마 주인공이라 나랑 닮았다 그랬지. 어떻게 알았어?”
“여자의 감이요.”
“장난 말고. 이게 왜 나랑 닮았다 그랬냐고.”
“그 땐 몰랐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대로는 몰랐어요. 비슷하단 느낌은 받았지만...”
“그럼 그 느낌만으로 나한테 이걸 권했다는 거야?”
“네. 그 때는 그랬어요. 근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생각이 바뀌었다니. 그가 이 드라마에 맞지 않는다는 소릴까? 그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거리자 그를 향해 소민이 웃어 보였지만 마냥 밝은 근심걱정 없어 뵈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그 웃음에 선유가 그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바뀌었는데.”
그의 말에 소민이 입술을 꼬옥하고 한 차례 깨물더니 느닷없이 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뭔데?”
“에이, 참. 뭐긴 뭐예요? 이런 거 안 해봤어요?”
이런 거라니? 그녀가 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선유가 계속 그녀를 쳐다만 봤고, 소민이 귀부터 시작해서 목까지 연분홍색으로 붉어졌다.
“뭐.”
“하여간 눈치도 드럽게 없어.”
분위기가 깨진 소민이 그렇게 말했고, 뭔진 몰라도 실수한 기분에 선유가 눈을 굴릴 때였다.
“안겨요.”
“뭐?”
“안기라구요.”
그녀의 말이 이해되자 선유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안겼다. 뭐, 워낙에 그가 큰 탓에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안긴 듯 한 모양새가 됐지만 선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먼저 그를 안아주겠다고 했으니까. 한참을 그렇게 안겨(?)있던 선유가 소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채소민 설마 몇날 며칠 자리 비운 걸 이렇게 때우려는 건 아니지?”
“이걸로 때워도 되는 거였어요?”
“웃기지마. 이걸로는 어림도 없어.”
“쳇.”
궁시렁대는 소민의 따뜻한 온기에 선유가 소민을 더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선유씨.”
그의 품에 따스하게 안겨있던 소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한선유씨는 차현보다... 참... 안타까운 사람이에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침묵을 지키자 소민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 역시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던 듯 시선이 마주쳤다. 그를 향해 불쌍하다고 말한 사람을 그는 기억했다. 그 사람은 정말 그를 불쌍한 눈빛으로 봤다. 그저 동정하는 눈빛. 그리고 남겨진 건 차가운 배신. 그리고 그 혼자 덩그러니 남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소민은 그에게 안타까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 안쓰러움은 있었지만 값싼 동정의 눈빛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거 대답하려면 먼저 한선유씨한테 물어야 할 게 있어요.”
“뭐가 궁금한데?”
“한선유씨는 그동안 정말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이 있어요?”
“글쎄?”
자신이 수 없이 받아왔던 질문에 선유는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이 질문이 처음 받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걸 묻는 이유가 뭔지 그는 늘 알 수 없었다. 왜 그걸 알아야 하는 걸까. 그는 궁금했다.
“잘 생각해봐요. 좋아했던 사람 없어요?”
“그거 꼭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야?”
대답하기 싫다는 듯한 답에 소민이 질문을 바꿨다.
“그럼, 나는요? 나는 좋아해요?”
“어. 좋아해.”
“정말 좋아해요?”
“어.”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그의 말에 소민이 다시 물었다.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뭐? 좋아하는데 증거가 있어야 돼? 다 좋아.”
“그래요. 다 좋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좋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 두루뭉술한 거 말고요.”
“글쎄.”
선유의 말에 소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그건 왜?”
“한선유씨. 나는 한선유씨가 가끔씩은 조금 찌질해 보일 때도 있고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나를 똑바로 봐주는 게 참 좋거든요. 한선유씨랑 투닥대는 것도 재미있고. 근데 나는 한선유씨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지 궁금해요.”
“그게 왜 궁금한데? 궁금해 하지 마. 내가 행동으로 다 보여주잖아.”
그렇게 묻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는 분명 이상한 것이 있긴 했다. 남녀간의 애정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어떤 것.
“한선유씨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줄 수 있고, 애정을 받기만 하면 되는 그런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 내가 느끼는 게 가짜라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에요. 한선유씨, 혹시 애정결핍이라고 들어봤어요?”
그녀의 말에 그의 입이 한 일자로 다물어졌다. 그런 그의 침묵을 좀 더 가만히 내버려두던 소민이 다시 입술을 뗐다.
“한선유씨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에요? 아버지는요?”
그녀의 질문에 선유가 자세를 구부정하게 만들어 그녀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언젠가 그녀에게서 맡았던 따뜻한 향기를 느끼고 싶었다.
“글쎄.”
“좋은 분들이에요?”
“좋다의 기준이 뭔데?”
그녀의 말에 그렇게 물은 그가 그녀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 소민은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쓸어줬다. 좋은 부모가 무엇이냐고 되묻는다는 건... 그만큼 행복하지 못했다는 반증이었다.
자기 부모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 그게 뭘 의미하는 걸까.
“한선유씨는... 어릴 때 장래희망 없었어요?”
“없었어.”
“정말 없었어요?”
이미 그의 생활기록부를 통해서 다 봤음에도 그녀는 자꾸만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그저 부끄러워서 적지 않았길 바랐다. 남들은 다 있던 장래희망이 없다는 건 그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으니까...
어린나이에 꿈이 없다는 건 어떤 건지 그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없었어. 생각할 시간도 없었는데 뭐.”
더는 묻지 않길 바라는 게 분명한 어투로 그가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 그가 꿈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얘기한 게 싫은 건지는 모르지만 더 묻는다고 그의 입에서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네가 뭘 생각하는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은 어릴 때 같이 있었던 사람. 부모잖아요. 그래서 한선유씨가 부모님 밑에서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했었어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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