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빵 터지던데
81.
선유는 한창 촬영 중인 현장에 있었다. 소민이 자리를 비우겠다고 얘기를 하고 사라진 촬영장에는 분명히 사람이 많았지만 왜인지 어딘가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그가 나오는 촬영 분을 거의 다 찍은 상태라 심심하기까지 했다. 이럴 때 그녀가 있어야 그 종알대는 목소리라도 듣는 건데 하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한편 걱정이 그의 머리를 채웠다.
그늘에 앉아 다음 씬과 소민을 번갈아 생각하고 있는데 매니저인 준영이 슬쩍 말을 걸었다.
“형님. 인터넷 봤어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소민 누님 기사가...”
“뭔데? 다쳤어?”
“그... 소민 누님 다친 건 아니구요.”
“그래? 다친 것만 아니면 됐어.”
“다친 건 아니고 다른 일은 있어요.”
“뭔데? 또 누구랑 스캔들이라도 났어? 아니, 이 여자는 뻑하면 스캔들이야.”
“형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뭐 임마?”
스캔들 메이커인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원체 어울리지 않아 반박한 것 뿐인데 선유의 표정은 무시무시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준영은 이제 이런 분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소민 누님 사인이 인터넷에 올라왔어요.”
“뭐?”
선유가 몇 초간 이해가 안 되는 듯 눈을 끔뻑이다 재차 확인했다.
“사인? 왜? 어디 팬 사인회 열렸대? 채소민 사인이 아니겠지.”
“소민 누님 사인 맞다 그러던데요. 어떤 사람이 사진이랑 같이 SNS에 올렸더라구요. 지금 누님 팬들 사이에서는 시끄러운가 봐요.“
“뭐? 나도 못 받아본 사인을?”
별 것도 아닌 일에 흥분하며 선유가 그렇게 말하자 준영이 그를 의자에 도로 기대 앉혔다.
“궁금하시죠?”
“뭐가?”
“누님 사인이요. 아마 보면 빵 터질지도 모를 텐데.”
“안 궁금해.”
“진짜죠? 나는 봤는데. 정말 빵 터지던데.”
“어떻길래.”
슬슬 넘어오는 선유의 반응에 준영이 웃음을 참았다.
팬들도 인정하는 싸가지 한선유가 저렇게 행동할 때가 있다니... 자신이 그를 곯려먹는 때가 오다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게 다 소민 때문 아니, 덕분이었다. 팬클럽 회장이 자신이라는 걸 소민은 알까 모르지만 그는 진심으로 소민을 응원했다.
“안 궁금하시다면서요.”
“그래, 안 궁금해. 안 궁금한데, 그 여자가 어떤 사인을 하고 다니는지는 알아야겠어.”
곧 있으면 자신의 머리를 잡아끌어 알밤이라도 먹일 것 같은 선유의 눈초리에 준영이 슬그머니 핸드폰을 들이 밀었다. 이 정도 놀려먹은 것도 그의 매니저 인생에 한줄기 휴식 같은 일이었으니 감사하며.
“이게... 사인 맞아?”
“네. 사인이래요.”
“자작 아니야?”
“자작 아니던데요? 소민씨랑 인증샷도 찍었던데.”
“뭐? 나랑 단 한 번도 사진 찍은 역사가 없는 여자가 다른 놈이랑 사진도 찍었어?”
“남자인 거는 어떻게 아셨어요?”
“진짜 남자란 말이야? 아니 이 여자가.”
“사인은 어때요? 그 앞에 길쭉하니 통통한 거 뭔지 모르겠어요?”
“이게 뭔데?”
“잘 아시지 않아요?”
준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자 선유가 그 앞에 그려진 정체 모를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설마 이거... 무야?”
“푸큭큭큽큽.”
선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준영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게 무라고? 그럼 이 옆에 이건? 배추야?”
“그하하하하학크크크크크.”
다음 이어지는 말에 준영이 아예 선유의 어깨를 퍽퍽 때려가며 웃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야. 이게 사인이라고? 내 눈에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건 ‘민’이라는 글자 하나랑 엄지손가락 그림뿐인데?”
선유가 난생 처음 보는 해괴한 사인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중얼거리자 준영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설명에 들어갔다.
“형님. 이해 안되세요? 누님 이름이 뭐예요?”
“뭐긴 뭐야. 채소민이지.”
“예. 채소민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준영이 그렇게 말하자 선유가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준영아.”
“네.”
“설마 이 여자 지금 채소 그린 거냐?”
“푸흡! 그런 것 같죠?”
왜 하필 무 그림을 그린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도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를 생각하기는 하는 모양이니까. 그걸 나무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떨어졌지만 그를 생각한다는 게 어찌나 기특한지 옆에 있다면 그녀가 숨 막혀 죽겠다고 할 때까지 끌어안아줄 수도 있었다.
“준영아. 나도 이 참에 사인 바꿀까?”
“왜요? 형님 사인 고민 끝에 만들어 낸 걸작이잖아요.”
“아무래도 커플 사인으로 하나 맞추고 싶은데.”
“뭐 어떻게 하시게요?”
“나도 이름대로 하지 뭐.”
“이름이요?”
“한선.유. 선 하나 긋고 유자 쓰면 어때?”
선유의 말에 겨우 멎었던 준영의 웃음이 다시 터졌다. 어깨를 퍽퍽 때리며 웃는 준영의 팔목을 잡은 선유가 말했다.
“준영아.”
“예. 형님.”
“일부러 웃기지도 않은데 웃긴 척 하면서 때리지 마.”
선유의 말에 움찔한 준영이 우물대며 대답했다.
“예.”
며칠 뒤에 나타난 소민은 일이 꽤나 힘들었는지 눈 밑에 시커멓게 다크써클을 매달고 왔다. 일이 잘 안 풀린 건가 싶어 선유가 걱정스레 물었다.
“일이 잘 안 풀려?”
“모르겠어요. 기다려봐야 알 것 같아요.”
“누구야? 누가 채소민을 괴롭혀?”
“괴롭힌 건 제 쪽이에요. 만나 달라고 만나 달라고 사정사정 했거든요.”
“대체 누군데? 혹시 남자 만나고 다녀?”
마음에 안 드는 게 역력한 목소리로 불퉁스레 묻는 선유의 얼굴을 소민이 물끄러미 쳐다보다 고개를 젓고는 답했다.
“여자예요.”
“아, 여자. 여자면 괜찮아.”
여자면 괜찮다며 씨익 웃는 선유를 보며 소민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채소민, 내가 사인해줄까?”
“네?”
“사인해줄게. 다이어리 줘봐.”
“다이어리는 왜요?”
“지금 세 번째 얘기하는데. 사인해줄게.”
“안 해줘도 돼요. 지난 번에 계약서에 사인 한 거 보니까 딱 연예인 사인이던데. 자랑하려고 그래요? 설마, 인터넷에 올라온 내 사인 본 거예요?”
그녀의 말에 신명나게 펜을 들던 선유가 멈칫했다.
“그... 자랑하려는 게 아니고 다른 버전의 사인을 개발했어. 리뉴얼 버전이랄까?”
“뭐 하러 리뉴얼 했어요? 사인 멋지던데?”
“정말? 정말 멋졌어?”
그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유가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지만 이건 기념으로 남겨야겠으니까 다이어리 줘.”
다이어리를 주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을 듯 한 선유의 행동에 소민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다이어리를 넘겼다.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사인을 만들었길래 그래요?”
“대단한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한 그가 다이어리에 슥슥 선을 몇 개 긋고는 그녀에게 내밀자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게 리뉴얼이에요?”
“그래. 그 쪽이 내 리뉴얼 사인을 처음 받은 사람이야.”
“형. 거짓말 마요. 어제 나한테 이게 좋냐 저게 좋냐 물어가며 이것저것 막 줬잖아요. 내가 처음이죠.”
“하여간 넌,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놈이야.”
선유의 매니저 준영이 그렇게 말하며 끼어들자 선유가 그렇게 타박했다. 그리고 선유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인을 내려다 본 소민은 이게 대체 뭔가 들여다 보고 있었다.
“준영씨 제가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이거 뭔 사인이에요?”
“형이 영감을 좀 받으셨거든요. 어느 분 덕분에요.”
“피카소 그림이라도 봤어요?”
소민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그렇게 묻자 준영이 큭큭거렸고 소민은 들고 있는 사인을 쳐다봤다. 숫자 1과 가로로 그은 선 하나, 거기다 동그라미. 이건 사인이라기 보단 그냥 낙서였다.
“그 사인 확실히 웃기죠? 그 1일 한이래요. 가로로 그은 게 선. 동그라미는 있다는 뜻으로 유. 원작자는 그래도 열과 성을 다 했던데. 형은 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라지는 준영을 노려보던 선유가 그녀에게 흰 종이를 들이밀었다.
“왜요?”
피카소를 넘어설만한 대작에 넋을 놓고 있던 소민이 선유가 내미는 종이를 보고 그렇게 묻자 그가 자신이 사인을 하던 유성펜마저 넘겨줬다.
“이거 뭐 하라구요?”
“말했잖아. 세상은 기브앤테이크라고.”
“그래서요?”
달라고 한 적도 없는 사인을 막무가내로 주더니 이제는 뭔가를 요구하겠다는 그의 말에 그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식을 바라는 강아지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물론 그쪽이 첫 사인을 외간남자에게 줬다는 사실이 심기가 불편하긴 하지만 두 번째 남자가 되는 걸로 만족해줄게.”
“뭐를요?”
“그 쪽 사인 말이야. 채소민인지 야채민인지를 그렸잖아.”
“아... 사인. 어... 근데 두 번째도 못하겠는데요.”
“뭐?”
그녀의 말에 선유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민규가 사인 한 스무장 해달래서 해줬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는 소민에게 화까지 나려는 참에 소민이 잽싸게 약을 투약했다.
“대신 우리 이사 간 집 알려줄게요. 그건 첫 번째가 되겠네요.”
“이사했어?”
“한선유씨랑 스캔들 난 덕에 신상이 여기저기 털렸잖아요. 그 집에 계속 사는 건 좀 무리더라구요.“
“왜?”
“짐작은 했지만 집이 그렇게 쉽게 노출되는 곳인지는 몰랐어요. 어휴 완전 얼마나 시달렸는데요. 제가 사는 아파트 경비가 그렇게 허술한 지도 몰랐구요. 아무튼 그래서 이사했어요.”
이사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나 새로 구두 한 켤레 샀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선유는 기가 막혔다.
“동생이 별 말 안 해?”
“하죠.”
“뭐라고?”
“직장 가까운 데로 이사 가서 좋대요.”
마음에 들지 않는 답에 얼굴을 찌푸린 선유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집을 빨리 구했어?”
“구한 거 아니에요. 부모님 집으로 들어간 거지.”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선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모님은 뭐라셔?”
“여행 중이세요.”
소민의 부모님의 집이란 말에 혹시 느닷없이 방문하면 그녀의 부모님과 상견례라도 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선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 집이 안전하겠어? 뭣하면 내 집도 괜찮은데.”
사심이 가득 담긴 제안을 소민이 칼같이 잘라냈다.
“안전하니까 걱정 마요.”
“제길.”
“뭐요?”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욕설을 들은 소민이 날카롭게 반문하자 선유가 꼬리를 말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려 퉁명스레 말을 돌렸다.
“사인이나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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