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아마. 좋아할 거야
80.
“저 여우같은 게 어디 감히 꼬리를 쳐.”
중얼거린 지유가 주먹을 꼭 쥐어보였다. 선유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란 건 사실이지만 그 흔들리는 끝에 저기서 안식을 찾으라고 그런 건 아니었다.
“안식을 할 장소가 잘못 됐잖아.”
선유를 흔드는 것도, 그리고 돌아와 쉴 자리도 자신이어야 하는 그녀에게 있어 지금 이 상황은 굴욕이었다. 입술을 깨문 그녀가 휙하고 돌아섰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이 심하게 몰려왔다. 세란이 그녀에게 경고한 내용이 생각났지만 그까짓 거 지금은 무시해도 좋았다. 자극 받을 대로 받은 그녀에게 그런 경고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그건 지난 번 같은 일은 아니니까 괜찮다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준영이 차로 데려다 준 덕에 소민은 시준과 마주쳤어도 별다른 부딪힘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런 소민을 보며 시준이 중얼거렸다.
“무슨 사이길래 한선유 매니저가 데려다 줘. 요새 기사는 믿을 게 하나 없다니까.”
짜증이 얽히기 시작한 그의 눈에 촬영장을 황급히 떠나는 지유가 들어왔다.
“저 여자는 또 무슨 사이야.”
이런 쪽에는 유독 머리 회전이 빠른 시준은 선유의 차가 있는 방향과 소민, 그 뒤를 따르는 지유 사이를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강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꽤나 흥미로운 조합인데. 그럼... 여기서 내 선택지는...”
그의 시선이 지유를 향해 멎었다. 아까 짜증스러웠던 눈빛 대신 반짝이는 눈빛은 얼핏 보면 영롱했지만 분명 악의를 담고 있었다.
“역시 적의 적은 동지니까, 저쪽이 내 동지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시준의 입술에서는 나지막이 휘파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
소민이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시준이 껄끄러워서 촬영장에 있기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그녀가 알아보려 하는 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까닭이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았는데 깜깜한 게 답답했다. 그렇다고 알아보려고 하는 내용을 선유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어볼 만한 사람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활짝 웃으며 보물 1호나 다름없는 전화기를 들었다. 역시 사람을 찾을 때는 이만한 게 없었다.
“여보세요? 작가님 저 소민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녀는 지금 학교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다녔던 학교도 아니고 낯선 학교였지만 반가운 기분이었다.
“역시, 뒷조사엔 학교만 한 게 없지. 어떤 생활기록부를 남기셨으려나~”
소민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도 가볍게 교무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예, 어떤 일로 오셨죠?”
“저... 방송국에서 나왔는데요.”
“아, 연락받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역시 TV는 사랑을 끌고 작가님에게 전화하길 잘한 듯 했다. 자신이 그냥 왔다면 아마 어림도 없었겠지. 꽤 젊어 보이는 남자 교사가 자신을 흘끔대며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어... 저 생활기록부 보러 왔는데요?”
“예. 이걸로 보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생활기록부도 첨단을 달려 인터넷으로 열람이 되는 시대였다. 그녀는 감탄을 거듭했다. 한해 졸업자가 수백 명인데 이전 기록들을 일일이 다 입력한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향하여. 그녀가 인터넷으로 선유의 이름을 치려는데 아까 그 교사가 다시 다가왔다.
“저, 저기...”
“예?”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저기... 사인 좀.”
“예?”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인을 해달라니. 그녀에게 팬이 조금쯤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을 마주하니 기분이 아주 오묘했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그는 자신이 무례하다고 생각했는지 머리를 멋쩍게 긁적였다.
“아니 사실은 인터넷에 화보 올라온 다음부터 팬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뵙게 되니까 뭔가 증거 같은 걸 남겨야겠다 싶어서요. 제가 후손에게 가보로 물려주려고요!”
“아니 가보로 제 사인을 남기시면 어떡해요.”
“예?”
“아, 아니요. 가보란게 중요한 건데. 제 사인을 가보로 남기시는 건 너무 과하신 것 같다 뭐 그런거죠. 아하,아하,아하하하하.”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말하자 교사가 냉큼 종이를 들이밀었다. 그 종이를 받고 소민은 또 멍하니 있어야 했다. 사인을 받아만 봤지 해본적은 없는지라 남에게 보여줄 마땅한 사인이 없었다.
“저기... 제가 아직 사인을 못 만들어서요. 조금 있다가 고민 좀 해보고 해드려도 될까요?”
“예. 물론이죠.”
교사가 흔쾌히 물러나자 소민이 흰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선유를 만난 이후로 그녀의 인생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바뀌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영향을 받은 건 실로 간만인지라 조금 낯선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워낙에 긍정적인 성격대로 그녀는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사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녀가 받은 수많은 사인을 떠올려 볼 때 사인은 흔히 간결하거나 멋들어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흔한 사인 중에 하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흐음...”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 친 그녀가 그림판에 몇 가지를 끄적거리다가 결국 한 가지를 택했다. 유치하긴 하지만 그녀 마음에는 아주 쏙 들었다. 그림판에 그렸던 그림을 실제 종이에 옮기는 게 또 쉽지만은 않아서 그녀는 종이 몇 장을 버린 후에야 그녀가 생각했던 사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근데 사람이 많이 몰려오면 이거 너무 해주기 힘들 것 같아.”
이 사인으로 여러 장은 무리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가 펜을 내려놓고 모니터로 다시 눈을 돌렸다.
중학교 때의 그의 얼굴은 어릴 때 찍은 영화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똘망똘망한 눈에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지 굳게 다문 입.
그의 사진을 보며 그녀는 자신이 정말 스토커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 어때, 나는 제대로 허가도 받은 스토커인데.”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그의 성적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맙소사. 이게 말이 돼?”
그녀가 선유의 성적표를 보며 기함했다.
“아니, K본부 퀴즈 프로그램 예선 탈락이라며? 이거 순 사기 아니야? 선생님! 선생님? 여기 성적표 위조 된 거 아니에요?”
소민은 믿을 수 없는 그의 성적에 선생님까지 소환했고, 원본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숫자들을 믿어주기로 했다. 그가 전교 상위권에서 놀던 사람이라니 놀랄 노자였다. 사실 소민은 그가 다른 의미에서 놀던 학생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는데 예상이 완전 어긋나자 왠지 모를 허탈함을 느꼈다.
“놀릴 구석이 카사노바라는 거 밖에 없냐 어떻게. 인간미 없게.”
게다가 담임선생님 전달란은 더 기가 막혔다.
“뭐? 조숙하고 사려 깊어? 타학생의 모범이 돼?”
그가 아니 대타가 학교를 다닌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칭찬 일색인 성적표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성적을 갖고 예선 탈락이 말이 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뭐 단기 기억상실 이런 건가? 학교 때 배운 건 기억이 안나요. 이런 거?”
“저기... 이거라도 드시고 하세요. 눈 아프실텐데...”
그녀가 한창 투덜거리는데 예의 그 선생이 그녀에게 주스를 권했다.
주스와 눈의 피로가 무슨 상관관계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중요하겠는가. 흥분한 그녀가 목이 마른 와중에 주스가 생겼다는 게 중요하지.
소민이 교사가 주는 컵을 냉큼 받아들고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아까 사인을 끝낸 종이를 교사에게 내밀고는 수줍게 말했다.
“그... 첫 사인이라 어설프지만 귀엽게 봐주세요.”
“아, 오히려 영광이죠. 첫 사인이라니 정말 가보로 물려주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교사의 말에 소민이 “안 되는데...”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곱게 접힌 종이를 소중히 든 교사가 뒤돌아 가자 소민이 주스를 홀짝이는데 남자 교사의 자리쯤에서 “풉!”하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럴 줄 알았어. 뭐 사인 한 장으로 다른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면 됐지 뭐.”
그런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소민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모니터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모니터의 내용을 머리에 새겨가려는 것처럼 보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근데 개근상은 한 번도 못 받았네. 공부를 엄청 잘하지는 못했어도 나는 개근상은 꼬박꼬박 받았는데.”
출석일이 결석일보다 적은 까닭에 그에게 개근상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대신에 그녀가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상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그렇게 스크롤을 열심히 내리던 그녀의 손이 순간 멈칫하더니 이상한 것을 감지했다. 그녀가 그의 1,2,3학년 기록을 다 살폈지만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있을 법한 게 없었다.
“왜?”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떠오르는 선유의 말.
‘아마. 좋아할 거야.’
보통 자기 꿈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흔한 걸까. 아니 있는 경우이긴 할까 하는 의문이 머리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곧 확신이 됐다.
본인의 장래희망 옆에 있는 부모의 장래희망란에는 온통 ‘배우’. 이 두 글자가 3년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의 부모란에는 그의 어머니의 이름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만나봐야겠다.”
이 일의 원인 중에는 그의 어머니, 유세란 여사가 뿌리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를 어머니의 연락처를 소민이 수첩에 꼭꼭 눌러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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