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내 생각만 해요
79.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소민도 알고, 선유도 아는 목소리. 천천히 돌아가는 시선의 끝에 걸린 건 다름 아닌 지유였다.
“어? 지유씨가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요. 요즘 여기가 그렇게 핫하다고 해서 촬영구경 좀 하러 왔어요. 여기 선배님들도 많으시니까 좀 보면 연기공부도 될 것 같고 해서요. 방해 될까요?”
“방해는 무슨! 내용 누출 시키지만 않으면 상관 없지. 이참에 카메오로 한 번 출연하면 어때? 작가님께는 한 번 말씀드려볼 수 있는데.”
“어? 진짜로요? 그럼 저야 영광이죠.”
“역시 지유씨! 말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해!”
“예쁘게 봐주셔서 그렇죠.”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감독과 스텝들과 대화를 나누던 지유의 시선이 이내 선유를 향했다.
“어머!!”
가증스럽게 반갑다는 듯 다가오는 지유를 선유가 더없이 딱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살갑게 다가온 지유가 준영과 선유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 둘 중 누구도 그 인사를 반갑게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준영은 자리를 피해버렸다.
“아! 채소민씨. 오랜만이예요.”
“어? 소민씨도 알아요?”
“그럼요. 밖에서 따로 만난 적도 있는 걸요.”
“어유, 그렇구나. 임지유씨랑도 아는 사이였어요?”
지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렇게 말했고, 스텝의 되돌아오는 말에 소민이 잠시 고민하다 말을 받았다.
“어쩌다보니...”
“에이, 소민씨 그렇게 말하면 섭하죠. 우리 나름 꽤 깊은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지유의 말을 듣고 있던 선유가 소민의 손을 잡더니 앞장 서 잡아당기며 말했다.
“옷 갈아입어야 돼. 가자. 채소민.”
선유의 말에 여태껏 태연자약하게 웃어보이던 지유의 미소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이내 웃어보이며 말했다.
“아, 내가 촬영하는데 눈치없게 굴었네. 가봐요. 선유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얼핏 들으면 평이한 말이었지만 연예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녀가 택한 단어는 상당히 묘했다. 특히 얼마 전 스캔들이 터진 이후인지라 그건 더 도드라져보였다.
“선유? 방금 지유씨가 한선유씨를 그냥 이름으로만 부른 거 맞지?”
“둘이 친했어? 스캔들 난 건 한선유씨 소속사쪽에서 아니라 그랬는데. 친구 사인가?”
“그러고보니 임지유씨가 여길 굳이 올 필요 없잖아.”
“그러게? 그럼 사실은 둘이 사귀는 건가? 옆에 채소민씨는 눈가림용이고?”
그리고 그녀의 기대대로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시작됐다. 그 현상에 만족한 지유가 멀어지는 선유와 소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야.”
선유의 손에 이끌려 촬영장 멀리 외딴 곳에 세워진 그의 벤으로 온 소민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자신을 잡아 끄는 선유의 품에 폭 감싸이게 됐다.
“옷 갈아입는다면서요?”
“거짓말이야.”
“뻥쟁이네.”
“그래. 뻥쟁이야.”
그렇게 말한 선유가 소민을 조금 더 품에 당겨 안았다. 이미 밀착된 몸이 공기 하나, 먼지 한 톨 빠져 나갈 수 없게 꼭 매워졌다. 자신을 다급하게 혹은 갈급하게 끌어 안는 선유를 마주 안은 소민이 물었다.
“왜 그래요?”
“갑자기 무서워져서.”
“뭐가요?”
“네가 날 떠나 버릴까봐.”
“내가 왜요? 한선유씨가 나 이렇게 좋아한다는데 내가 어떻게 떠나요.”
“그냥... 불안했어.”
그냥이라고 말했지만 소민은 그가 갑작스레 이렇게 행동하는데 지유가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지금... 물어봐도 될까. 물어보면 선유는 순순히 답해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선유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야 했다.
“임지유씨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예요?”
일단은 가벼운 것부터. 아니 가볍지 않더라도 시작점을 알아야 했다.
“내 코디였어.”
“아... 그랬구나.”
“좋아했고, 버림당했어.”
너무도 짤막한 설명이었지만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녀 역시 같은 경험이 있으니까. 좋아했고, 버림받은 아니 배신당한 적이 있으니까.
같은 경험 있다는 사람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그녀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다면 자기 자신을 버리는 거나 다름이 없는 거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곧 촬영을 들어가야 할 텐데 그럴 수 는 없었다. 그래서 소민은 그저 선유를 조금 더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난 채소민이예요. 임지유가 아니라. 그러니까 난 안 떠나요.”
“왜 그랬는지 안 물어봐?”
“물어보면 말해줄 거예요?”
“해줄게.”
너무도 쉽게 나오는 말에 오히려 소민이 놀랐다.
“근데 오늘은 아니야. 오늘 얘기해서 너도 날 떠나면 난 오늘 촬영을 잘 끝내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입술에 고개를 든 소민이 살며시 입술을 갖다 댔다.
선유는 왜 자신이 자꾸 떠날 거라고 생각할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일은 없다고 전하고 싶은데 말로는 어려웠다.
이 마음을 다 전할 방법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 천마디 말 대신 이 한 가지로 마음이 전달되길 바라면서 살며시 그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 그녀를 선유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에게 던져진 구명줄을 잡듯이 그녀를 애틋하게 붙잡았을 뿐이었다.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은 사람처럼 그는 계속 계속 거듭 거듭 그녀를 확인했고, 서로의 숨에 질식하기 직전에서야 겨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서도 뭐가 부족한지 그녀의 볼을 소중히 어루만졌다. 그녀가 떠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사람처럼.
“하나만 알아둬. 내가 이름을 부르는 여자는 너뿐이야.”
그녀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활짝 핀 꽃처럼 웃어 보였다.
“그래요. 앞으로도 그래야 돼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마 소민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게 분명했다.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선유가 너무 애틋해서 괜히 민망해진 소민이 헛기침을 큼큼하고는 말했다.
“촬영하러 안 가요?”
“가야지.”
말은 가야한다 했지만 몸은 말과 달리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한 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에 선유가 코를 묻었다.
“좋은 향이 나.”
“아, 그거 섬유유연제 냄새일걸요?”
“그런 거 말고. 채소민한테서는 따뜻한 향이 나.”
“따뜻한 향이요? 그런 것도 있나?”
“계속 났으면 좋겠다.”
선유가 그렇게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그렇게 웅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목소리가 너무도 쓸쓸해서 소민은 다시 그를 토닥였다. 선유가 이런 이상행동을 보였던 때에는 그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사람이나, 영화배우 임지유가 연관되어 있었다. 이걸 예사롭게 넘겨야 할까 곱씹던 그녀가 선유에게 물었다. 지금 당장 임지유를 물어볼 수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부터.
“한선유씨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에요?”
그 말에 선유가 침묵을 지켰다. 한참이나 지속되는 침묵이 선유가 말을 하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뭐라 표현을 하지 못하는 건지 궁금해 질 때쯤이었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족쇄.”
예상보다도 더 참혹한 답변에 소민이 안겨 있던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는데 선유가 먼저 그녀를 떨어뜨렸다.
“촬영하러 가야겠어. 채소민은 다른 볼 일 있으면 이만 가봐. 불편하잖아.”
그 말에 소민의 눈빛이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았다. 뭐가 불편할지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그게 시준을 가리키는 의미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그래요. 알겠어요.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촬영 잘해요.”
선유에게 답한 소민이 차에서 내리려는데 선유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왜요?”
“기다려. 괜히 한시준하고 마주쳐서 기분 나빠질 일은 없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한 선유가 핸드폰을 들더니 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차에 와서 채소민 좀 차까지 배웅 해주고 와.”
통화를 마친 선유가 소민을 옆에 두고도 먼 산을 바라봤다. 선유의 머릿속에는 소민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하는 고민이, 그런 선유를 바라보는 소민의 머릿속에는 선유의 문제는 뭘까 하는 고민이 들어차고 있었다.
준영이 도착하기 전 생각을 갈무리 한 소민이 입술을 뗐다.
“한선유씨.”
소민의 부름에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음에도 단번에 그 생각의 틀 박으로 벗어난 시선이 향했다. 저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둘 수 있을까. 결심은 더 깊어졌다.
“옷은 미리 준비해 놓을테니까 한 사,나흘 자리 좀 비울게요.”
“왜?”
“잊었어요? 나 캐스팅 디렉터인거. 한선유씨 코디는 잠깐 사람 구해질 때까지 하는 거지만 캐스팅 디렉터는 내 평생 직업이라구요. 일이 들어오면 당연히 가야죠. 원래는 오늘 촬영 끝날 때쯤 말하려고 했는데 가야하니까 지금 말하는 거구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갖다 와. 채소민 캐스팅 디렉터 일 하는 거 좋아하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채소민이 온 힘을 다해서 열성적으로 하잖아. 그럴 때 채소민 얼굴에서 반짝 반짝 빛이 나거든. 모르면 바보지. 그리고 실제로 좋아 하는 사람이 뭐든 잘 하는 거야. 채소민 캐스팅 잘 하잖아. 까다로운 나도 지금 채소민이 캐스팅 한 거고.”
선유의 말에 소민이 얼굴을 붉혔다.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칭찬이 이다지도 사랑스럽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래요? 어... 한선유씨는 배우 일 하는 거 좋아요?”
그 말에 선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내 배우답게 태연스런 얼굴로 말한다.
“아마. 좋아할 거야.”
남 얘기 하듯이 나온 말이 이상했다. 그런 선유에게서 이상한 기운이라도 도나 얼굴을 살펴도 감쪽같이 가면을 뒤집어 쓴 후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확신이 생겼다. 무언가 있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겠지.”
선유가 소민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똑똑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차문이 열리고 준영이 등장했다.
“가시죠. 소민누님.”
“준영씨, 갑자기 왜...”
“그럼 형수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오버의 극치를 달리는 멘트에 소민이 눈을 굴렸다. 준영이 절대 흰소리를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고, 친밀하다 해도 저렇게까지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 근처 한 쪽 구석에 지유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소민의 머리에는 지금의 사태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어떤 사인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선유가 이름을 부르는 여자는 자신 하나니까. 그래서 소민은 준영을 비켜서서 내리고는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하는 선유를 향해 돌아섰다. 무슨 일이냐는 듯 묻는 선유를 향해 소민이 씨익 예쁘게 웃어 보였다.
“나 없는 동안 내 생각만 해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순식간에 선유의 재킷 카라를 잡아채서는 자신에게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고는 슬쩍 속삭인다.
“알았죠?”
세 마디가 가져온 자극은 입술에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서 이제껏 차 안에 내리 앉아 있던 숨 막히던 공기를 훅하고 날려버렸다. 소민의 의도대로 선유는 그 자극에 순식간에 발화해 이내 소민까지 불태웠고, 준영은 그런 둘을 못 본 척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외딴 곳에 선 선유의 차도 준영도 그들의 노골적인 애정행각에 눈을 돌렸지만 단 한 사람만은 끝까지 그런 둘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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