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78화 (77/105)

78. 신경쓰여

78.

선유가 지켜본 바로 그녀는 분명 주관이 뚜렷하고 당찬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은 뭔가 굉장히 이상했다. 자신의 주장을 똑바로 말하지 않고 있는 것부터 원치 않는 자리인게 분명해 보이는데도 금방 떨쳐내질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물론 멀어서 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방금 전에 김하은에게 대했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대본 리딩 현장에서 그녀가 들렀던 것도 이상했지만 그 때 보였던 행동도 그녀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공통된 원인이 그녀 앞에 서 있는 한시준이라는데 선유는 자신의 배우인생을 다 걸 수도 있었다.

“신경쓰여.”

“OK!!”

어쩜 그리 자신의 상황과 딱 맞는 대사인지, 단번에 OK사인이 떨어졌다. 하지만 감독의 OK사인에도 선유의 표정은 심각했다. 심지어 다음 순간 눈에 들어오는 장면에 그는 순간 촬영장을 박차고 나갈 뻔했다. 한시준이 소민의 손목을 잡는 모습이 그의 시각을 잠식한 까닭이었다.

촬영장에 그녀가 자신의 옆에 같이 있는 건 좋았는데 그녀의 옆에 다시 한시준이 얼쩡거리기 시작하자 선유는 과연 소민이 여기 있게 하는 게 잘하는 일일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소민은 무시하는 게 역력한 태도로 그를 피해 다녔지만 한시준이 워낙 집요하게 소민을 따라다니는 까닭에 그는 매우 신경이 거슬렸다.

결국 NG가 나고 잠깐 양해를 구한 그가 준영을 불렀다.

“준영아.”

“예, 형님.”

“가서 채소민 이리로 데려오고, 한시준이 채소민 주변에 집적대지 못하게 좀 막아라.”

“제가요?”

“그럼 촬영하는 내가 하리?”

생각 같아서는 자신이 하고 싶었지만 감독이 매의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민이 한 말 때문에라도 그는 얌전히 촬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코디를 하는 건 하는 거지만 한선유씨 일에 방해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촬영 제대로 해요. 안 그러면 코디고 뭐고 다 때려칠 거니까.”

“그 다 때려치는 거에 여자친구 자리는 열외인거지?”

“필요하다면 그것도 고려할 거예요.”

아니 갑의 횡포는 들어봤어도 을의 횡포는 듣느니 처음이었지만 사랑 앞에서는 그가 엄연한 을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겠다고 하고 열심히 촬영을 하려 했건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과 같은 문제였다.

“한선유씨, 무슨 일이에요?”

헐레벌떡 달려온 그녀가 그에게 그렇게 묻자 그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은 무슨 일? 아무 일도 없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답할 수가 없었다.

“준영씨가 선유씨한테 무슨 일 있다고 그래서 당장에 달려 온 건데?”

아, 준영이 그렇게 그녀를 불러온 건가? 그냥 평범하게 불렀어도 될 것을.

“채소민 나 자꾸 NG가 나네? 상대역이 연기를 못해서인가봐. 같이 상대 좀 해주면 좋겠는데.”

“네?”

제법 부탁하는 태도였지만 연기파 배우들로 가득한 이곳에서 연기를 못한다고 하니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지만 기왕지사 준영이 그렇게 그녀를 불러온 거라면 그도 굳이 마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FULL HD화면에서 상대 연기 때문에 감정이 안사는 표정을 하고 연기를 하면 채소민은 또 다 때려 치겠다고 할 거잖아. 게다가 어제 잠도 못 자서 피곤한데 얼른 촬영 끝내야지.”

“어제 푹 잔 거 아니었어요?”

“못 잤어.”

“대체 왜요?”

“채소민 생각하느라.”

오그라드는 그의 멘트에 소민은 냉큼 대본을 집어 들었다. 아침에 버터를 씹어 먹는지 느끼한 그의 멘트는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차라리 싸가지 없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감정을 살려야지.”

이건 뭐 구연동화도 아니고 동작에, 연기에, 감정묘사까지 세심하게 하라고 하는 통에 소민은 죽을 맛이었다. 이제는 이따가 촬영을 자신이 들어가는 건지 선유가 들어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니, 한선유씨 내가 못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배우냐구요.”

“그랬구나. 채소민 사실은 귀찮았구나. 알았어. 나 혼자 대본 보지 뭐. 눈이 시뻘개져 주온 같이 되더라도 내가 참고 볼게.”

이제는 불쌍한 척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 그를 때리지도 못하고 그녀는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는 시늉을 해 보이는 것이었다.

“한선유씨!! 촬영 들어갑시다!!!”

그를 호출하는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그가 다음 화 대본을 들이밀었다.

“이거 왜요? 밑줄 다 쳐놨잖아요.”

“읽고 다음에 또 상대역 해줘야 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좀 해보고 있어.”

“뭐라구요? 아니 이!!!”

멀어지는 선유를 보며 울분을 내뿜던 그녀가 결국 고개를 절레 절레 젓고는 팔랑 팔랑 대본을 넘기기 시작했다. 다시 만나고 또 다시 선유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넘어가고 있는데 그게 또 기분이 나쁘지가 않은 게 신기했다.

“역시 오래살고 볼 일이야. 이런 재미도 나쁘지 않네. 그리고 촬영 중이니까 신경 쓰일 일 없게 해주려고 그러는 거지 뭐. 절대 주도권을 뺏긴 건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뒤로 그림자가 스윽 생겼다.

“뭐해?”

그 목소리에 그녀의 등이 티나게 움찔했다.

“한선유씨 대본 봐주는 거야? 지극정성이네?”

“무슨 일 때문에 그래요?”

돌아보지도 않고 날 선 목소리로 그녀가 말하는 데도 그녀 옆에 넉살 좋게 앉은 시준은 비켜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긴 나 촬영 들어갈 때도 너는 그랬었으니까. 그 정성이 어디 가겠어?”

그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 쥔 그녀가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옛날 얘기 하자고 온 거에요? 촬영 없어요? 한가한 가봐? 아니면 다른 스케줄도 없어요?”

“응. 한가한대? 그래서 그런데 말이야. 채소민이 나 좀 다른 데 꽂아주면 어떨까?”

“내가 왜요?”

“왜? 싫어? 우리가 그래도 옛 정이 있는데 그러지 말고 좀 꽂아주지?”

“한시준씨. 착각하시는 게 있는데요. 전 그 옛 정. 진즉에 엿이랑 바꿔 먹었거든요. 그러니까 옛날 일로 구걸하지 말고 좀 가주실래요?”

그녀의 말에 시준이 인상을 구겼다 이내 펴고는 피식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사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내가 너한테 왜 접근했었는지.”

그의 말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생생한 배신의 기억이 그녀를 점령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래서 그 동안 기를 쓰고 피해왔는데. 허무하게 무너질까 겁이 났다. 그 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소민씨!”

“아, 네!”

어쩐 일인지 선유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화가 난 듯한 눈빛은 그녀 옆에 시준을 향해 있었지만. 안 그래도 불편한 자리였던지라 날 듯이 선유에게 다가갔다.

“어디 갔었어?”

시준을 쳐다보며 묻는 그에게 소민이 대본을 내밀었다.

“가긴 어딜 가요. 저쪽에서 대본 체크하고 선유씨 대사에 형광펜칠하고 있었죠.”

그녀의 말대로 소민이 내민 대본에는 형광펜이 그어진 대사가 가득했다. 중간중간 자신의 느낌을 적어놓기도 했는지 깨알같은 글씨도 써져 있었다.

“눈 아프지 말라고 파란색으로 했는데 괜찮아요?”

“어, 좋아. 근데.”

한시준이랑은 무슨 사이야?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한시준을 만나 그에게 직접 묻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적을 하나 만드는 게 나을 거란 판단에 그가 결국 나오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게다가 소민은 그가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진실이 나오기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 섰다. 입을 다문 그를 보며 소민이 밝게 물었다.

“왜요? 문제 있어요?”

밝음을 가장한 목소리에 소민을 어두운 눈빛으로 바라본 선유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내 스텝이니까 멀리 가지 말고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라고. 못 봤던 시간들은 이미 충분하니까.”

꽤나 오글거리는 멘트였지만 그가 하는 말이고 보니 왠지 모르게 드라마대사 같은 게 아주 또 그녀를 뼛속부터 뒤 흔들고 있는 터라 소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리고,”

“그리고요?”

“나 연기하는 거나 좀 보고, 물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저기에 물 들고 앉아 있어. 준영이한테 말해서 내 의자 저기에 두라고 할테니까.”

총감독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선유가 그렇게 말했고, 소민은 착한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알 수 있었다. 선유가 자신이 불편해 하는 걸 감지해냈다는 것을. 소민이 총감독 옆자리에 자리를 잡는 걸 확인하고서야 선유는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누구 애인인지 참 잘났네.”

그렇게 종알거린 소민이 선유의 얼굴을 보며 엄지를 들어줬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소민을 바라보고 있던 선유는 소민의 엄지손가락을 보고서야 촬영에 집중을 했다. 감독 옆에 소민이 있는 까닭에 시준은 분명 마음 놓고 그녀에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감독 옆에 소민이 서 있어 접근은 못하지만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을 선유는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이 현장에 없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라는 게 훤히 보였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시준이 소민에게 껄떡거리는 이유를 파악하는 거겠지만 그 역시 지금으로서는 녹록치 않았다.

선유는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시준을 노려봤다. 혼자 가는 그녀에게 혹시라도 시준이 또 집적 거린다면...

생각만 해도 뒷골이 당겨오는 듯 한 느낌에 선유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 보내는 것 역시 지금 촬영이 뜸한 시준이 접근할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답이 안 될 듯했다.

아무래도 준영과 보내는 게 그나마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준영을 찾는데 준영이 보이질 않았다.

“채소민. 준영이 어디 갔어?”

“한선유씨 매니저를 왜 나한테서 찾아요?”

“준영이가 옆에 없었어?”

“아까부터 안 보인던데 왜요?”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닿을만큼의 한숨을 내쉰 선유가 전화를 들었다.

“야. 김준영. 너 어디야.”

-아, 형님 뒤에요. 뒤!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싶더니 준영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형님,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어딜 그렇게 쏘다녀?”

“아. 그게. 사정이 있었어요.”

“무슨 사정?”

“지금 여기 누가 왔는지 아세요?”

“누가 왔는데?”

“아, 일단 제가 감독님한테 말씀 드릴테니까 촬영 접고 들어가시죠?”

“뭔 소리야?”

준영의 말에 선유는 표정을 와락 구겼고 소민 역시 알 수 없는 준영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다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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