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아직도... 안 믿겨요?
77.
선유의 코디로 일하면서부터 둘은 얼굴을 볼 시간이 더 많아졌다. 물론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한 촬영 탓도 있었지만 대외적으로 캐스팅 디렉터이자 한선유 코디 겸임 중인 그녀가 안 가도 상관없는 자리까지 벅벅 우겨 그녀를 꼬리표마냥 단 선유 탓이기도 했다.
그녀가 뭐라 한마디 할라치면
“아... 이제 힘들어? 못 하겠어? 어쩔 수 없지.”
라며 제법 풀죽은 소리를 연기하는데 얼마나 달콤하게 자기 원하는 대로 꾀어내는지 몰랐다. 물론 그래도 좋고 이래도 좋긴 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게다가 다른 여자에게는 철벽을 치고 다니는데 그녀만 보면 씨익 씨익 잘도 웃어대서 아무데서나 심장이 벌렁벌렁 쿵쿵 내려앉았다.
“구미호가 된 건지도 몰라.”
선유를 따라 촬영장에 가는 와중에 소민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함께 걸어가는 선유가 소민을 보며 물었고, 소민은 그저 고개를 저어보였다. 어느새 촬영장 근처에 도착해서인지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자 수많은 시선이 그녀를 따라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손을 붙들고 선 그 남자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을 하는 것에 버금갈 만큼 놀라운 일들이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어머, 별꼴이야. 온 세상이 다 안다 이거지?”
“아무리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한선유가 자기를 좋아하면 다야?”
“저 사람 저번에도 한선유 주변에서 껄쩍거리다가 화보도 하나 찍었잖아. 세상 참 편하게 살아?”
주연급 배우들은 어느 정도 안면도 있고, 대본 리딩장에서 만났기 때문에 그저 눈인사만 하는 반면 조연급 여자 배우들을 비롯해서 엑스트라까지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는 까닭에 그녀가 선 그 곳이 바로 무대였다. 그 중 한 명의 머리라도 잡고 흔들어서 그들이 원하는 장면이라도 연출해 줘야 할텐데 그러질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 봐!”
선유가 그녀를 쳐다보더니 그 가운데 여자를 한 명 불러내자 소민이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뭐하게요?”
“뭐하긴 뭐해? 혼내줘야지? 안 그래도 예전부터 눈에 거슬렸어.”
“왜요?”
“아니, 이 현장에서 제일 발연기면서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안다고. 나는 그렇다 쳐. 이순제 선생님이나 나문이 선생님한테도 그런다니까? 그런데 이젠 너까지? 다른 사람은 다 내가 참아도 너는 아니야.”
그의 말에 소민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요? 불러서 뭘 어쩌려구요?”
“어. 마침 왔네.”
그녀가 속닥거리는 사이 그가 부른 여자가 그에게 다가와 서있었다.
“왜 부르셨어요?”
이미 너희들이 무슨 일로 날 불렀는지 안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대신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비웃음은 묘하게 소민의 속을 긁었다. 아니 대체 그녀가 손가락질 받고 비웃음까지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영 이해가 안됐다.
“너,”
선유가 뭐라 입을 열려는데 소민이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아 더 이상 말이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그런 그 둘을 쳐다보는 여자의 얼굴에 더 깊은 비웃음이 걸렸다. 그 비웃음에도 소민이 그녀답지 않게 꽤나 다소곳한 자태로 자신의 앞에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성함이...?”
“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요?”
“너무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주시면 안될까요?”
소민이 겸손한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선유의 눈에 소민은 꽤나 화가 난 듯 보였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랬다. 하지만 그런 소민의 상태를 모르는 소민의 눈앞에 선 그녀는 요청하는 듯 한 소민의 말투에 한껏 콧대가 높아져서는 목소리를 깔았다.
“김하은이요.”
김하은이라...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에서 조금 빛을 본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의 태도는 가뜩이나 착하지 못한, 악동같은 소민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 그래요? 김하은씨. 하은씨 이번에 맡은 역이 뭐예요?”
“그건 왜요?”
“왜긴요. 궁금해서 그러죠.”
“엄친딸 역이예요. 한선유씨한테 들었으면 알죠? 나름 꽤 중요한 역인 거?”
그녀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 엄마 친구의 딸로 나오니 나름 중요한 역이라고 하고 싶다면 그럴 수 도 있지 싶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네가 날 어쩔건데 하는 말투를 유지하며 자신을 깔아보는 하은을 향해 소민이 여자마저 홀릴 것 같은 미소를 짓더니 선유의 손을 놓고 그녀 가까이로 한 발 다가섰다.
“하은씨.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알아요?”
“한선유씨가 좀 끼고 돈다고 촬영장 구경 온 거잖아요?”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아냐는 듯 혹은 다른 사람들도 다 들으라는 듯 그녀가 일부러 카랑카랑하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그녀가 기대한 대로 사람들의 시선은 그 셋을 향했다.
주연배우들을 비롯해 스텝들까지도 그녀의 그런 만행을 보고 흠칫 놀라 소민을 쳐다봤지만 그녀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소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봤어요? 전혀 아닌데.”
“뭐요?”
“나 여기 일하러 온 거예요.”
“왜요? 옆에 있다가 이번엔 누구 후려서 영화 출연이라도 하게요? 하긴 그전에도 깔짝대다 모델일 했다고 하더니 이번에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껏 비아냥거리는 그녀의 말에 오히려 소민보다 더 화가 난 선유가 한 발 내디디려 하자 소민이 그의 팔을 잡아 그가 나서지 못하게 막아섰다.
“저런, 착각하고 있네요. 사실 이 드라마에 한선유씨 끌고 온 게 나거든요. 작가님, 감독님, 제작자분께서 꼭 한선유씨여야 한다고 해서 제가 한선유씨 하기 싫다는 거 끌고 왔거든요.”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말하는 그녀의 말은 하은이 큰소리를 낼 때보다 주변을 확실하게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이미 그녀를 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캐스팅 디렉터라는 직업이 워낙에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직업은 아닌지라 배우들 가운데 웬만큼 급수가 되고 난다 긴다 하지 않는 이상 그녀를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불리한 점이자, 유리한 점이었다.
“하!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네요? 톱스타를 당신이 무슨 수로요?”
“몰랐어요? 내가 한선유씨 캐스팅 디렉인데. 아, 그것 말고도 기타등등 많은 걸 하기도 해요. 예를 들면 한선유씨를 조련해서 드라마에 출연하게 한다던가, 스케쥴 조율도 좀 하고 지금은 이 남자가 나 없이는 옷도 못입겠다고 해서 코디 일도 봐주고 있어요. 내가 워낙 다재다능해서 말이죠.”
그녀의 말에 주변에서 헉소리가 튀어나왔고 선유는 당황한 나머지 사례에 들려 밭은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하긴 그녀가 자신을 들었다 놨다하는데다가 그녀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는 걸 생각하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련이라니...
헛웃음이 나왔지만 지금은 소민의 입장을 생각해서 한 발 물러난 선유가 물끄러미 그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지금 내 앞에서 유세 떨어요?”
“네. 그러고 있는 거예요.”
“뭐, 뭐라구요?”
“흥분하지 마요. 흥분하면 몸에 안 좋아요. 내가 유세 떠는 게 뭐 잘못됐어요? 먼저 질투해서 저 깎아내리려고 하신 건 거기 계신 분들이잖아요. 근데 제가 워낙에 자존감이 높아서 누가 제 자존심에 손대는 거 치를 떨거든요. 그리고 저 잘난 한선유씨 못지않게 저도 좀 잘나서요. 근데 앞으로 좀 더 열심히 하긴 해야겠네요. 아 물론, 저 말고 김하은씨가요. 제가 하는 일 제대로 알려면 앞으로 좀 많이 올라오셔야 할 거예요.”
“하! 캐스팅디렉이라고 유세떠니? 그래봐야 길거리에서 신인이나 캐내는 게 업무의 태반일거면서. 네가 뭐 얼마나 잘났는데?”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이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소민이 누가 봐도 콧대 높아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 김하은씨 대신에 채슬아씨 캐스팅 해올 수 있을만큼?”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그녀의 얼굴에 얼핏 당혹감이 서렸다. 명품조연으로 이름을 날리는 그녀를 자신대신 이 드라마에 그녀를 불러올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은 믿기 싫지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건 물론이요, 하차할 수도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 입술을 한 번 깨문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오 외쳤다.
“거짓말. 댁이 무슨 수로!”
그녀의 반응에 소민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소민이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돌렸다.
“여보세요?”
- 언니! 너무 오랜만이잖아!! 나 안보고 싶어?
스피커폰으로 넘어온 목소리에 사람들이 몸이 굳었다. 친언니한테 응석 부리는 듯한 저 목소리가 우리가 아는 명품조연 채슬아가 맞나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목소리는 확실히 그녀의 것이었다.
“미안해. 내가 요새 좀 바빠서.”
- 아, 맞아. 언니 바쁘겠다. 언제 한선유님이 홀랑 반하게 만들었대? 응? 그 선배님에 비하면 언니가 아깝다고. 난 이 연애 반대야!! 언니가 너무 아까운 것 같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 가운데 님이라고 존칭을 쓰고는 있었지만 교묘하게도 그 말투는 부잣집 엄마가 아들이 데려온 여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어조였기에 선유의 얼굴은 슬쩍 일그러졌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두 여자는 자신들의 세계에 젖어 있었지만...
“슬아야. 근데 이거 지금 스피커 폰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네 목소리 듣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에 순간 정적이 돌더니 방송에서 듣던 방송용 목소리가 나왔다.
- 어머~ 안녕하세요. 채슬아입니다. 호호호호호호! 방금 건 잊어주세요.
“슬아야. 이미 늦었어. 그리고 너 얼마 전에 무리한도전 나가서 푼수짓해서 소문이 짜한데 뭔 이미지 관리야.
- 쳇. 망했어. 아무튼! 웬일이야, 언니? 나 할 만한 작품이라도 나온 거야?
수화기 너머 슬아의 목소리에 앞에 서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던 하은이 순간 움찔했다. 그 동요를 놓치지 않은 소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아직은. 내가 너한테 맞는 거 있으면 줄게. 지금 들어온 것들은 네가 하기엔 좀 그렇거든. 엄.친.딸. 같은 거는 너 싫지?
- 나야 뭐, 언니 눈썰미 믿어야지. 언니 덕에 이만큼 왔는데. 아! 언니. 나 지금 메이크업하러 오래. 에이, 간만에 목소리 듣는 건데.
“얼른 가 봐. 내가 다시 전화할게.”
- 알았어. 꼭 연락하는 거다? 알았지? 꼭 연락해?
“그래. 스케줄 잘해.”
통화를 마친 그녀가 오도카니 서 있는 하은을 향해 소민이 물었다.
“아직도... 안 믿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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