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예뻐, 제일 예뻐
76.
“왜요?”
제법 새침하게 나온 목소리에 만족해하는데 선유의 다음 말은 장르가 완전 달랐다.
-채소민. 연예계에 아는 사람들 좀 있어?
“네? 왜요?”
- 코디가 일을 그만뒀는데 지금 당장 구할 수가 없어.
“뭐라구요? 그래서 지금 나더러 하라는 거예요?!”
- 하라는 게 아니라 도와 달라고, 혹시 주변에 코디 아는 사람 없어? 사장님도 구하는 중인데 그렇게 바로 할 수 있다는 사람이 지금 없다 그래서.
“일단 끊어 봐요. 내가 알아보고 연락할게요.”
- 그래. 부탁할게.
선유의 말이 제법 진지해서 소민은 자신 주변에 누가 있나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잘빠진 8.5등신 몸을 더듬더듬하며 옷을 입히는 자.신.이 추.천.한 여.자.
“그건 안 될 말이지.”
물론 이제는 그가 진짜 카사노바가 아니라 컨셉이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스스로 그의 옆에 여자를 추천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대체 남자 코디는 왜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짜증을 내봤자 연예계에서 남자가 코디로 활동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결국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방법을 찾은 소민이 폰을 들었다.
“한선유씨. 코디 구했어요.”
- 구했어? 다행이네. 고마워 채소민. 준영아, 사장한테 전화해. 채소민이 사람을 구해줬어.
선유가 휴대폰 너머 준영에게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며 소민이 다시 물었다.
“내일 몇 시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 어. 내일 오전 7시 20분까지. 우리 집. 바로 촬영장으로 갈 거거든.
“근데 한선유씨. 급하게 구한 거라서 옷 고르는 건 잘 못할 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 괜찮아. 아무렴 준영이가 구해오는 넝마조가리들 보다는 낫겠지.
“형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넝마라니요!” 라고 외치는 준영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전화를 끊은 소민은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는 대로 입겠다고 했었잖아요.”
“그래.”
“근데 왜 안 입겠다는 건데요?”
촬영장에 갈 시간은 다가오고 있는데 옷을 안 입겠다고 버티는 선유 탓에 소민은 인내심의 한계를 온몸으로 체험 중이었다.
그리고 선유는 코디를 구했다더니 자신의 집에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그녀로 인해 적잖이 놀랐지만 지금은 이 상황이 더없이 즐거웠다. 본인이 코디라고 설명한 그녀는 그에게 이 옷, 저 옷을 권하기 시작했고 그는 그런 소민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정말 자신의 집 거실에 서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상상이 현실이 되는 어느 영화 같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기왕에 더한 상상도 해볼까 고민을 하는데 소민이 또다시 삐약 거리며 잔소리를 늘어놓으려 하고 있었다.
“채소민. 우리가 무슨 사이지?”
우리가 무슨 사이냐며 묻는 선유의 행동에 소민이 참을 인을 새기며 그가 원하는 답을 주는 것이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서로 좋아하는 사이죠.”
“그렇지. 보통은 그걸 연인사이라고 하잖아. 그럼 내가 문제를 내지. 연인 사이의 바람직한 옷차림은 뭘까?”
“설마 그걸 얘기하는 건 아니죠?”
현실을 부정하려는 소민에게 선유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채소민이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모르겠네?”
능글거리는 그의 발언에 소민이 자신의 이마에 돋아 오르려는 힘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역시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간과했나보다.
“한선유씨 아니, 이해는 하겠는데요. 우리 놀러 가는 거 아니고, 일하러 가는 거잖아요. 근데 커플룩이 말이 되냐구요!!”
“말이 안 될 건 또 뭔데?”
그래, 말이 안 될 건 없었다. 근데 왜 굳이 촬영장에 가서 갈아입을 게 뻔한 옷을 입겠다고 하는 건지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선유씨, 솔직히 말해 봐요. 사실은 나한테 화난 거 있죠? 나 곤란하게 하려고 이러는 거죠?”
“전혀 아닌데?”
“그게 아니면 나한테 왜이래요.”
뭐가 문제이냐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는 그의 행동에 그녀는 이 남자가 과연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그냥 커플룩이라면 말도 안하겠어요. 근데 이거 뭔데요.”
“왜 귀여워 보이고 좋잖아?”
그녀가 예전에 했던 말을 돌려주는 그의 손에는 그의 팬미팅 현장에 그녀가 쓰고 갔던 토끼 탈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 정신줄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
“그래요. 귀여워요. 귀여운데! 오늘은 날이 아니라구요.”
“그럼 다음에 우리 데이트하러 갈 때 쓰는 건 어때?”
“차라리 그게 낫겠네요. 그러니까 제발 그 토끼탈은 내려놓으라구요.”
“약속한 거야. 다음에 데이트 하는 것도, 토끼탈 쓰는 것도.”
원하는 답을 얻은 선유가 큭큭거리며 그렇게 말했고, 옷을 입히기도 전에 충분히 진땀을 뺀 그녀가 옷만 입어주면 뭐든 할 것 같은 기세로 고개를 가열차게 끄덕였다.
“아하하하하, 아주 귀여워 죽겠네.”
“전 지금 한선유씨 때리고 싶어 죽겠으니까 조용히 하고 빨리 입어요. 대체 속에 뭐가 들어 있길래 저렇게 능글맞나 몰라.”
그렇게 말한 소민이 그의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옷이 뭘까 그에게 대보고 있었다.
“코디 일은 어때? 할 만 한 것 같아?”
그렇게 묻는 선유의 말에 소민이 ‘너 말 한 번 잘 꺼냈다’ 하는 표정을 짓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붙였다.
“할 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내가 생전 해본 적도 없는 일을 아는 코디 언니한테 짧은 시간 내에 배우느라 얼마나 발바닥에 땀나게 뛰었는지 알아요? 협찬사가 옹기종기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뭐가 어울릴지 모르니까 옷은 한아름에 구두도 수도 없이 많고 시계에 머플러에 모자에!!! 지금 내 차가 내 차가 아니라구요. 그냥 내가 세~~~탁!! 만 외치고 다니면 세탁소 차로 딱이라구요!!”
그녀가 흥분하는 사이에도 세~~~~탁!이라는 세탁소 흉내를 내는 탓에 그는 숨도 못 쉬고 끅끅거리고 웃어야만 했다. 정말 봐도 봐도 흥미진진한 여자였다.
“고생했네.”
“고생? 그건 고생 정도가 아니라구요. 그거 다 외워야 한다고 해서 지금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단 말이에요. 나는 원래 386 컴퓨턴데 슈퍼컴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니까요. 내가 무슨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온 악마 편집장 밑에서 일하는 그 여주가 된 기분이에요. 아무리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지만 내가 미쳤던 거야. 미쳤지. 미쳤어.”
“이봐 뒤에서 까는 것보다야 내 앞에서 욕하는 게 낫지만 진정해. 그리고 자학하는 것도 그만하고.”
“진저엉?”
그렇게 말하며 다시 다다다닥 쏘아붙이려는 소민의 입에 선유가 짧게 입 맞췄다.
“아니, 지금 뭐하는 거예요?”
“채소민이 눈빛으로 지금 나한테 뽀뽀해줘요. 나 이렇게 일 잘하는데 상으로 뽀뽀 안 해주고 뭐하는 거예요. 하는 거 들었거든.”
“내 눈이 언제요?”
“봐, 지금도.”
또 다시 한 번.
“아 자꾸”
“뭐? 자꾸 해달라고?”
“그게 아니”
또 한 번. 말만 하려고 하면 입을 맞춰대는 선유 탓에 소민이 결국 항복을 하고 말았다. 자꾸만 베이비 키스를 날리려는 그의 입술을 손으로 막은 소민이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제 그만 투덜댈 테니까 빨리 옷 입어요. 이제 정말 시간 없단 말이에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똘망똘망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선유는 입을 막은 그녀의 손 안에서 웃고 난 뒤 손바닥에도 입맞춤을 날렸다.
“채소민. 아마 내가 이상한 건가봐.”
“왜요? 어디 아파요?”
당장에 이마를 짚어보는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은 그가 말했다.
“뭘 해도 예뻐 보이니 네가 아니라 내가 미친 거지.”
“난 또 뭐라고, 한선유씨 지극히 정상 맞아요. 난 원래 예쁘거든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녀의 말에 선유가 웃자 소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 안 예뻐요? 이상하네.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댔는데.”
그의 웃음에 자신감이 낮아졌는지 낮게 중얼거리는 소민의 모습에 선유가 그녀를 다시금 꽉 끌어안았다가 놔 주며 말했다.
“예뻐, 제일 예뻐. 안 예쁘면 내가 채소민을 볼 때마다 피가 끓어오를 리 없잖아.”
그의 말에 다시금 얼굴을 붉히는 소민을 바라보다 시계를 흘끔 바라본 선유가 예고도 없이 윗옷을 훌렁 벗자 소민이 꺅하는 비명과 함께 뒤돌아섰다.
“왜? 내 속이 궁금하다며?”
“아니, 그러니까 그 속이 그 속이 아니라니까요?”
“익숙해져. 내 코디하겠다면서 내가 윗옷 벗을 때마다 비명 지르고 돌아설 거야? 시간 없어서 어쩔 수가 없어.”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기습 공격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럼 지금부터 내가 바지를 벗을 건데 괜찮아? 이러고 벗어야 해?”
“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선유가 피식 웃었다.
순진한 그녀를 너무 놀려 먹은 게 미안해진 그가 옷을 들고는 드레스 룸으로 가서는 옷을 갈아입었다. 갈아입고 나온 거실에는 소민이 준영과 함께 앉아 있었고, 그걸 본 선유는 훼방꾼의 등장에 또 다시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준영은
“형님 가시죠.”를 외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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