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보고싶다
75.
귀에 수화기를 댄 채 차고에 도착한 소민이 차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수상한 인물을 목격했다.
“거기...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그 인물이 후다닥 도망을 갔고, 소민은 인물이 얼쩡거리던 자리에 남겨진 이제는 꽃송이보다는 꽃다발에 가까워져 가는 장미 한 묶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장미 한 묶음을 본 소민이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전화기는 이미 귀에서 떨어진 지 오래였고, 그 속에서는 제운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고백이 소민에게 닿을 리는 만무했다. 소민의 정신은 오로지 지금 그녀를 피해 도망가고 있는 사람을 향해 있었다.
“거기 서 봐요!!”
그러나 소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은 미친 듯이 달려갔고 여자인 소민이 장신인 그 인영을 따라가기란 역부족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상시에 운동이라도 해 두는 건데.”
한참이나 추격씬을 찍은 소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차로 돌아왔다. 이제는 제법 굵어져 끼워지지 않는 꽃송이가 앞 유리창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꽃송이를 빼내자 이전과는 다르게 카드가 하나 얌전히 꽂혀 있었다.
카드에는 발신인이 없었지만 그 카드도 누가 보냈는지 그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딱 네 글자.
‘보고싶다’
그 네 글자를 본 소민은 갑자기 미친 듯이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새어나오는 감정을 더 이상 막기에는 자신에게도 한계가 왔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또 다시 망설임이 비집고 나올 틈이 없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에요?”
-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 무슨 말?
“나도요. 나도 보고싶다구요. 한선유씨가.”
조금은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전화가 그냥 뚝 끊겨 버렸다.
“뭐지? 설마 이거 한선유가 준 게 아닌 건가?”
끊긴 전화에 황당해 하던 그녀가 다시 전화기를 귓가에 댔다. 혹시 그가 준 것이 아니라면 누구일지 알 수도 없겠지만, 확실하게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화를 받아야 할 상대방의 목소리 대신 그 자리를 신호음만이 채우고 있었다.
소민이 미간을 찌푸리고 왔다갔다 하는 찰나에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는 달음박질 하는 소리. 그리고 그녀가 돌아보기도 전에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덮쳐 안았다.
“아, 멀리 가기 전에 말하던가 하지. 도로 뛰어오느라 늦었잖아.”
숨을 헐떡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에 마음이 부웅 솟아올랐다.
“한선유씨?”
“그럼 누구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안겨 있는 거야? 설마 다른 놈이랑 착각해서 전화한 건 아니지?”
“내가 바본줄 알아요?”
“채소민이 바보는 아니지. 하지만 나 말고 다른 놈이 이딴 짓 하면 생각이고 뭐고 뒤처리고 뭐고 고자킥부터 날리라고. 뒷감당은 내가 해줄테니까.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기나 해? 그리고 누구인줄 알고 낯선 사람을 따라 쫓아 달리고 그래. 겁이 없는 건지,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건지.”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뒷감당은 자신에게 맡기라며 걱정하는 폼이 확실히 예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왠지 그녀는 한 번쯤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증명한다더니 꽃 놓고 도망가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도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 로맨틱한 거라고 좀 해줘.”
“피이...”
피식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뒤에서 더 꼭 껴안으며 그가 속삭여왔다.
“보고 싶었어. 채소민.”
“나두요.”
솔직하게 인정하는 그녀의 말에 농담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선유가 그녀를 돌려 세우려 했지만 소민이 뒤돌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 돌리지 마요.”
“왜! 보고 싶었는데 얼굴을 봐야지.”
“부끄럽단 말이에요.”
“보고 싶다며? 난 보고 싶었던 얼굴 실컷 좀 봐야 좋겠는데 나 좀 돌아보면 어때? 채소민도 나 보고 싶었던 거 아니었나?”
“그건 그거구. 어쨌든 지금은 안돼요.”
“그래? 그럼 내가 그 쪽으로 돌아가면 되지.”
그렇게 말한 선유가 그녀가 돌아선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소민이 이번엔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아, 알았어. 안 봐. 안 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나 갈까?”
금세 포기하고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향해 발끈한 소민이 돌아섰다.
“아니! 무슨 남자가 그렇게 포기가 빨라요? 여자가 부끄러워서 그러면 조금 기다려줘야지. 그렇게 쉽게 간다 그러고! 나 참! 남자가 무슨!!”
그렇게 흥분해서 그를 보며 삐약거리는 소민을 선유가 애정이 느껴지다 못해 그의 눈이 애정촌 그 자체라고 해도 믿을만한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내가 이러니까 지금은 채소민이 날 보고 있잖아.”
“이, 이건 반칙이에요.”
금세 또 얼굴을 물들이고는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꼬옥 가슴팍에 끌어안으며 선유가 말했다.
“이제 됐지? 나는 네 얼굴 한 번 보고 널 안을 수 있어서 좋고, 너도 보고 싶었던 내 얼굴 한 번 보고 이제 부끄러운 얼굴 나한테 안 보여도 돼서 좋고.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그의 가슴에 묻혀서 얼굴에 울리는 가슴소리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민이 말했다.
“언제부터 공평한 거 따졌다고.”
“채소민이 불공평한 거 안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고쳐야지 뭐.”
“그럼 내가 싫어하는 거 다 고칠 거예요?”
“뭐, 가능하면.”
“거짓말.”
“나 참 약속 한데도 안 믿으니 어떡하면 좋아?”
그렇게 말한 선유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약속의 의미로 도장이나 찍을까?”
소민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선유의 입술이 순식간에 소민의 입술을 향해 내려 앉았다. 속도는 벌처럼 빨랐지만 부드럽기는 나비의 날갯짓보다 부드러웠다.
한참이나 다정하게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고 멀어진 선유의 입술이 붉었다. 자신의 입술도 저만큼 붉을까 생각하는데 선유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도장보다 더 한 게 뭔지 알아? 화인(火印)이야. 방금 네 세상에 속하기로 약속한 거야. 네 세상에 속하기로 한 이상 네 세계의 법칙에 날 맞출 거야. 그러니까 날 네 세계 안에 살게 하든 밀어내는 이제 선택은 네 몫이야.”
꽤나 달콤한 계약이었다. 그리고 계약의 현장답게 진지한 눈빛이 흘렀다. 한참이나 선유를 말없이 바라보던 소민이 살며시 뒷발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선유의 입술에 가져갔다.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 천천히 차분하게 입술을 찍는 소민에게 맞춰 선유가 고개를 내렸고 그에 맞춰 소민의 뒷발은 다시 땅에 닿았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성실히 이행하는 계약자인 선유를 향해 이제 막 도장 찍기를 마친 소민이 말했다.
“낙인(烙印)이에요. 축하해요. 입국심사를 통과해서 내 세상에 들어온 걸. 그리고 알아둘 게 있는데, 난 한 번 내 세상에 들어온 무언가를 그렇게 쉽게 밀어내지도, 버리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쉽게 벗어나려고 하지 마요.”
“그것 참 고맙네.”
그녀의 입술 위에서 사근사근 말하는 목소리에 취할 때쯤이었다.
“그림 조오타?”
갑자기 들려오는 민규의 빈정거림 가득한 목소리에 소민이 화들짝 놀라 선유를 밀어냈다. 그리고 밀려난 선유가 태연한 표정으로 민규를 바라봤다.
“아주 여기 여관방을 차리시지?”
“그러고 싶지만 이만 가야지.”
“어? 가려구요?”
방금의 달콤한 분위기에 아직도 취한 소민이 그렇게 묻자 선유가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채소민. 내가 지금 정말 잠깐 짬을 내서 온 거라 도로 가봐야 해.”
“어디를요?”
“어디긴 어디겠어. 일하러 가야지. 촬영할 때마다 틈틈이 오느라 내가 얼마나 눈치 보는데.”
그의 말에 소민이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촬영장에 나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이제 소속사에서 관리하기로 했으니까?”
“당연히 안 되지.”
언제 그렇게 애정이 넘쳤나 싶게 딱 자르는 그의 말에 속상해지려고 할 때쯤 선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려면 남자친구 촬영장 견학하는 애인으로 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여자 친구라는 말이 어찌나 낯 뜨거운지 소민은 대꾸도 없이 집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와 버렸다.
“아주 주차장에 모텔을 차리지 그랬냐?”
“웃겨. 우리가 언제 그런 분위기였다고.”
“아주 그냥 둘이 같이 주차장에 불 지를 기세로 활활 타오르더만 날도 더운데 안 덥냐? 동네 창피해서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이게 못하는 말이 없어. 오랜만에 등짝 스매싱이 그립지? 네가 그래서 그러지?”
“어휴. 남우세스러워.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우리가 뭘 어쨌는데?”
민규가 어디까지 본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뻔뻔하게 나가보자는 정신으로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향해 민규가 빈정거렸다.
“네네. 알겠습니다. 우리 누님은 아주 순결한 분이신데 제가 불경을 저질렀네요.”
한껏 비꼬던 민규는 소민이 눈을 번뜩이며 한 손을 치켜들자 자기 방으로 냅다 줄행랑을 쳤다. 그런 민규를 쫓는 시늉을 하던 소민은 민규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곧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부끄럽게시리 또 여자 친구도 아니고 애인으로 오라 그래.”
아잉 난 몰라 하는 톤으로 소민이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바로 그 때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소민이 입술을 삐죽였다.
“아이 참,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전화를 하고 그래.”
몸을 베베 꼬며 그렇게 말한 소민이 수화기를 들었다. 목소리만은 새침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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