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74화 (73/105)

74. 한 달 줄게

74.

역시나 선유의 소속사 사무실 앞은 기자들로 빽빽했다. 짙은 선팅 탓에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게 분명했지만 이제 곧 내릴 예정이고, 금세 일대는 시끄러워질게 자명했다. 선글라스까지 벗고 코와 눈가를 몇 번 문질러 붉은 기를 만든 그녀가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운전자석 옆으로 차 한 대가 다가와 바짝 붙어 섰다.

“뭐야? 이건? 어떤 몰상식한 게.”

그녀가 내리지 못하고 그 차를 쏘아 볼 때였다. 그 차의 운전석이 열리는 가 싶더니 낯이 익은 여자가 내렸다. 그 모습에 지유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자는 지유의 차에 올랐다.

“어쩐...”

“어쩐 일이라기엔... 네가 벌인 일이 꽤나 꼴 사납다고 생각하지 않니? 차 움직여라. 괜히 기자들 앞에서 개망신 당하기 싫으면.”

그녀의 말에 고집스레 앞을 바라보는 지유를 보며 그녀가 한 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 여기서 팬미팅 한 번 해보고 싶니? 그럼 하자꾸나. 대신 팬미팅 끝날 무렵엔 팬이 모두 안티팬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건 잊지 말고.”

여자의 차가운 말에 지유가 그제야 느릿느릿 손을 움직였다.

“알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그 때 거기로.”

여자의 말에 지유의 손이 멈칫하다가 이내 다시 움직였다.

꽤 시간이 지난 후, 멈춰선 곳은 한적한 곳에 있는 한옥이었다. 지유의 옆자리에 탔던 여자는 미적거리는 지유와는 달리 지체 없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앞에 서서 지유를 잡아 먹을 듯 입을 벌리고 있는 한옥을 향해 걸어가다 이내 돌아섰다. 여전히 차 안에서 미동도 없이 앉은 지유를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걸어와 운전석을 열었다.

“내려. 입 아프게 하지 말고.”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지유가 느릿하게 내려서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여자가 앞장 서 안으로 들어갔다. 예약은 진즉에 해둔 듯 안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그 때나 다름이 없는 마루 바닥은 매끄러웠지만 지유의 심산은 그렇지가 못했다. 한 발 한 발이 매끈한 마루 바닥에 닿을 때마다 안에서는 소름이 돋아나고 매슥거리는 기운이 올라오기까지 했다.

이윽고 예약된 방에 들어가 여자가 먼저 앉을 때에도 지유는 우두커니 장승처럼 서 있었다.

“앉아. 올려다보게 하지 마.”

매서운 눈초리가 지유를 향했고, 어디서든 자존감을 잃지 않았던 그녀라곤 믿기지 않게 그녀는 순순히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왜...”

“왜? 지금 왜 왔냐고 나한테 묻고 있는 거니? 뻔뻔하게도?”

그녀의 말에 지유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입술 놓으렴. 네 잘난 상품에 흠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한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팔에 걸린 장신구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짤랑거리는 소리 모두가 그녀를 향한 맹렬한 비난 같아서 지유는 이 자리가 힘겨웠다. 왜 잊고 있었을까. 이 존재를. 왜 쉽게 생각했을까 하는 후회 가운데서도 아집이 피어났다.

이만큼 왔는데 이제와 물러나라고? 하는...

여전히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무는데 마찰음과 함께 순식간에 뺨이 돌아갔다.

“입술 놓으라고 했는데... 안 놓으니 이럴 수 밖에.”

여자의 힘인지라 입 안이 터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물고 있던 입술은 치아에 의해 상흔이 생긴 후였다. 그리고 그 상흔 덕에 여자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뤘다.

“나한테 왜 이래요. 뭘 바라는데.”

지유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하! 하는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피해자 코스프레하니?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래. 이번엔 뭘 원하는 거니? 3년 전에는 네 욕심을 채우려고 선유 옆자리를 빌미로 협박하더니 이번엔 또 뭐가 필요해? 이제 남자 하나 잡아 시집이라도 가고 싶니?”

모욕적이기까지 한 언사에 지유가 주먹을 쥐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요.”

“정말... 욕심이 끝을 모르는 애구나.”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선유를 누구한테 뺏기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는 거.”

지유의 말에 앞에 앉은 그녀, 세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퍽도 재미있는 말을 하는 구나. 그저 난... 너 같은 날파리를 쳐내는 것 뿐이야. 그 애가 아닌 그 애가 지금 누리는 것들, 그 애의 외모에 홀려 껄떡거리는 것들. 그런 것들을 그 애 옆에 둘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날파리라구요? 이 내가?”

신경질적으로 웃은 지유가 앞에 앉은 세란을 노려봤다.

“대한민국 탑 여배우로 꼽히는 내가? 웃기지 마요. 예전의 내가 아니야.”

그런 지유를 바라보는 세란의 얼굴은 태연했다. 아니 태연하다 못해 심드렁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세란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게 뭐? 네가 그렇게 불리는 게 누구 덕인지는 기억하고?”

그렇게 말하던 세란이 기묘한 미소를 물고 다시 물었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그런 너한테... 선유가 관심은 있었니?”

세란의 표정과 함께 날아든 그 문장은 지유의 귀를 통과해 심장까지 순식간에 날아들어 관통했다. 그녀를 거부하다 못해 참담할 정도로 무시한 선유의 모습이 순식간에 뇌리를 점령했다.

“그건... 그건...”

그렇게 중얼거리는 지유의 시선이 바닥을 헤매다 이내 공기를 타고 올라와 시선의 끝에 세란을 담았다.

“당신 때문이야. 3년 전에 당신이 그런 제안만 하지 않았으면!!”

“그래? 내 제안 때문이다? 정말 그래?”

세란이 지유를 쏘아봤다.

“네 욕심 하나 채우려고 언제든 그 애를 버릴 준비가 돼 있던 게 너라는 건 기억 안나나 보네? 내가 너를 시험해보려 했다손 쳐도 네가 정말 그 애를, 내 아들을 좋아했다면 그 때 그런 눈빛을 보여서는 안 됐지.”

“내가... 뭘요?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어!! 당신 아들 그늘 말고 나 혼자서 행복해 보고 싶었다고.”

“그럼 됐는데 왜 다시 돌아왔어.”

“내 자리니까. 한선유가 비워둔... 내 자리니까.”

차가운 세란의 말에 지유가 시선을 맞부딪히며 말했다. 그 두 눈 가득 들어선 고집을 세란이 바라보다 입술을 열었다.

“좋아. 한 달 줄게.”

“뭐?”

“네가 내 아들 앞에서 얼쩡거릴 수 있는 시간. 그 시간 안에 선유가 널 사랑하게 아니 좋아하게라도 되면... 그 때는 인정해 줄게. 이번처럼 선유한테든 누구한테든 더러운 수는 쓰지 말고. 그랬는데도 시간 안에 걔가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않는다면 물러나.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애 앞에 얼씬도 하지 마. 이 제안을 거절해도 마찬가지.”

한 달이란 시간에, 그리고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세란의 제안에 지유가 입속을 잘근잘근 씹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고민을 한들 별다른 수는 없었고, 지금 제안을 거절한대도 결과는 같았다. 세란은 언제든 그녀를 몰아낼 수 있으리라.

“어차피 나한테 선택권은 없는 거잖아요.”

“네가 내 아들을 팔아 넘긴 순간부터 그건 정해진 거지.”

“그런데 뭘 기다려요? 이미 시작한 게임이면서. 두고 봐요. 내가 당신을 어머님이라고 부르게 될 테니까.”

지유의 말에 세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해 봐. 근데 어머님이라는 네 말, 참 소름끼치는구나.”

그 말을 남긴 세란이 방을 나섰고 지유는 홀로 남아 초조히 입술을 물어뜯었다.

*

백대표가 한 말이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갔다.

“아... 어떻게 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가 화장대 옆에 놓인 화병을 바라봤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꽃송이의 숫자는 늘어갔다. 처음엔 한 송이, 그다음 날은 두 송이, 그 다음다음날은 세 송이.

꽃이 놓여있는 시간은 달랐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꽃이 놓여있었다. 마치 그녀가 선유와 떨어져 있는 날들을 카운트하는 것처럼.

“한선유가 주고 가는 거... 맞겠지?”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 미안~ 미안해! 미안~ 미안해!

이번엔 태진아의 노래 소리가 그녀의 벨소리였다. 밖에 나가고 없는 민규가 바꿔 놓은 게 틀림 없었다. 핸드폰을 든 소민이 발신자를 보고 조금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잘... 지냈어요, 소민씨?

“네... 제운씨도 잘 지내셨죠?”

왠지 모르게 뱃속이 간질간질하니 어색한 기분을 참으며 소민이 말했다. 혼자 집에 있을 뿐인데 집은 어색하고, 어색하고, 어색한 기류가 맴도는 것 같았다.

- 좀 더 빨리 연락하고 싶었는데... 소속사랑 얘기도 하고, 촬영도 하다 보니 좀 늦었네요.

“아... 그랬어요.”

입은 통화를 하고 있었지만 머릿 속에는 오늘은 나갈 일이 없는데 행여 차에 꽃이 꽂혀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 소민씨가 맨정신일 때,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하하하, 지난 번엔... 제가 좀... 취해 있었죠.”

- 사실... 소민씨가 부담스럽다고 할 수 도 있는데 숨기기에는 내가 너무 답답해서요. 얘기해도 될까요?

“아...”

제운이 말은 귀를 거치긴 했지만 걸러지지 않고 그냥 그대로 흘러 나가고 있었고, 발걸음은 생각을 따라 어느 새 슬그머니 차고로 향하고 있었다.

- 제가... 2년 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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