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73화 (72/105)

73. 어장관리는 아닌 건가?

73.

“알죠? 선유가 소민씨 좋아하는 거.”

안 그래도 오늘 고백까지 받고는 시간을 두고 증명해 보이라고 한 참이니 모른다 잡아 뗄 수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걱정이 되는 건 혹시 백대표가 그 사실을 불쾌하게 혹은 언짢게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소민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백대표가 다시 물었다.

“선유가 좋아한다고 얘기는 하던가요?”

그 질문에 소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백대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저 미소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고민하는 소민에게 백대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한테만 그런 의지를 보인 게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네요. 사실 선유가 고민 많이 했을 거예요. 녀석 성격에 쉽지 않은 한 발이었단 건만 알아줘요.”

“무슨...?”

“아마 소민씨가 다칠 수도 있어서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 같은데... 마음이란 게 그렇잖아요. 좋은데 떠나려면 더 아쉽고 눈에 밟히는 거. 쉽게 포기도 안 되고.”

“다친다구요? 어... 한선유씨 팬들한테요?”

그 말에 백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어보였다.

“팬이라면 팬이긴 한데... 아무튼 복잡하기도 하고 선유 개인적인 일이라 소민씨한테 제가 말해주기는 힘들어요. 아무튼 밀어낸 게 소민씨 싫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배려하느라 그런 거라는 것만 알아줘요.”

“몰랐어요. 그런 거라는 건...”

“그 녀석이 말 안 해서 오해를 잘 사는 스타일이에요. 누구한테 쉽게 속내를 내보이는 법도 없고. 그런 녀석이 방금 막 와서 그랬다니까요? 제가 짜준 틀... 다 엎었으면 좋겠다고. 사실... 선유는 지금껏 그냥저냥 하루하루를 살아갔어요. 말 그대로 그냥 눈 떠지면 그 날 일을 하고, 그 날 일이 없으면 가만히 있고. 본인 이미지 걱정을 하지도 않고. 보통 돈을 벌게 되면 미래를 생각해서 다른 사업에 손을 대거나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유는 그러지도 않았어요. 그냥 제가 만들어준 틀 안에서만 열심히 했죠.”

그 말에 소민은 또다시 긍정했다. 너무도 잘 아는 현실이었다. 연예계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은퇴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 얼굴을 걸고 사업을 하곤 했다.

“선유가 지금 이미지를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기존의 자신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라고 봐야겠죠. 그리고 그건 선유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스스로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내일을 생각하지 않던 선유가 내일을 생각하는 거, 이게 무슨 의민지 알겠어요?”

소민이 가만히 있자 사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선유가 왜 그런 변화를 하려고 생각할까요?”

사장의 질문에 소민이 그를 바라봤다.

“채소민씨 때문이에요. 아니,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선유씨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화를 겪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과연 그에게 자신이 그렇게 큰 존재일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신을 배려했다는 그 마음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그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하기가 버거웠다. 그에게 해준 게 없는데 그에게 동기부여를 했다는 타이틀을 쉽게 가져가도 되는 걸까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백대표의 목소리가 동앗줄처럼 던져졌다.

“그 철딱서니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철 들 리가 없죠. 내 생각엔 소민씨가 조금 센 약을 투약한 것 같은데요.”

“약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묻자 사장이 짧게 하하 웃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뭐 선유 앞에서도 저런 그녀의 모습을 100% 다 보여줬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의 눈에는 보였다.

“정말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엄청 좋은 명약을 투약한 거죠. 그리고 그게 선유한테는 가장 필요한 약이었구요. 누군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준다는 사실이 고맙겠죠. 그리고 그게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의 걱정일 경우는 더더욱 그렇구요.”

사장의 직설적인 발언에 소민의 얼굴이 어두운 불빛 아래서도 확연히 보일만큼 붉어졌다.

“저... 그렇게 티나요?”

그렇게 묻는 소민이 깜찍하기 이를 데 없어서 사장이 순간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아마 소민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소민이라면 허허벌판 한복판에 홀로 심겨있는 나무 같은 선유에게 따스한 햇살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긴, 그녀가 햇살이 아니라 폭풍이면 어떻겠는가. 어차피 나무는 폭풍우를 견디며 자라고, 고치는 햇살 아래 나비가 되는 것인 것을.

“뭐, 그 바보는 정말 애정이라는 게 어떤 건지 모르던 아이니까 아마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바보는 자기가 걱정을 해본적은 있어도 다른 사람의 걱정을 받아본 일은 별로 없어서 직접 얘기해주기 전까지는 잘 모를 거예요.”

그의 말에 소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인지 안타까운 한숨인지 묘한 한숨에 사장이 야릇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채소민씨는 괜찮아요?”

“네?”

“이렇게 그저 가만히 떨어져 있는 동안 선유가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게 돼도?”

“다른... 사람이요?”

“설마 세상에 선유를 이해할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에요.”

소민이 사장의 말에 자못 심각한 표정이 되자 사장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감추려 더 심각한 어투로 겁을 주기로 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 발짝 내딛기 두려워한다면 두 발짝 뛰도록 등을 떠밀어 주는 게 어른이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을 많이 알고 겪어본 그가 적어도 그들보다는 어른임이 확실하니까 그가 나서야 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랑 못하는 거 아니잖아요. 소민씨가 왜 망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망설이다가 어긋날 수도 있어요. 드라마 보면 자주 그러잖아요. 주인공들이 자꾸 어긋나는 거. 그러고 싶지 않으면 마음이 움직일 때 나를 향해 오는 게 보일 때, 내 마음이 갈 때 잘 잡아야 하는 거예요. 소민씨 마음이 선유에게 안 가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향해 사장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선유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생각이에요. 자기 이미지를 엎고 싶다고 하니까 그래 줄 예정이거든요. 그동안 그 녀석이 많이 힘들었을 거 아니까 이제는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싶거든요. 소민씨도 도와주지 않을래요?”

사장의 따끔한 일침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 소민은 물을 마시다 말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주 허물어지다 못해 유리성이 됐네.”

“유리성? 어디에?”

“깜짝이야!!!”

뒤에서 갑자기 말을 거는 민규 탓에 깜짝 놀란 소민이 돌아서며 물 컵에 있던 물을 민규의 얼굴에 뿌려버렸다.

“뭐 하는 거야. 미쳤냐?”

“뭐? 미쳐? 네가 놀래키니까 그런 거 아니야.”

“아니 물 마시러 나와서 혼자 하도 중얼거리니까 무서워서 말 걸은 거 아니야.”

“무서운데 왜 말을 걸어!”

“내 맘이지!!”

놀란 마음에 그렇게 투닥거리던 소민이 뒤늦게 물이 뚝뚝 떨어지는 민규의 얼굴을 티슈로 주섬주섬 닦아주며 물었다.

“채민규.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여자가 남자한테 정말 날 좋아하는지 증명하라고 하면 어떻게 증명할까?”

“뭔 개뼉따구 같은 소리야. 그걸 어떻게 증명해? 심장 박동이라도 재서 갖다 줘?”

“역시... 그건 어려운가?”

“아니 딱 보면 사이즈가 나오지. 설마 그 나이 먹고도 모른다 그러는 거 아니지?”

“내 얘기 아니거든?”

소민의 말에 민규가 알만하다는 눈빛을 지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아니, 까놓고 남자도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도 남자를 좋아해. 근데 여자가 좋아하는 게 보여도, 표현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 남자가 미쳤냐? 가서 너 나 좋아하지? 이러면 여자가 응, 그래. 나 너 좋아해. 이러냐?”

“무슨 소리야?”

“정말 좋아하면 기다리겠지. 여자도 용기를 낼 때까지. 자기가 물어봐도 여자가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사실은 차일까봐 겁이 나서 자기가 먼저 가까이 올 생각을 못하는 거 아니야?”

“정말 좋아하면 남자도 신호를 보내지.”

“신호?”

“그래, 나한테 와라, 와줘라. 제발 와줘라. 뭐 이런 거. 사람마다 표현 방식은 다르겠지만.”

"그런 게 없으면?"

"어장관리지."

딱 잘라 답하는 민규의 말에 소민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물을 받더니 물컵을 들고는 방으로 들어갔고 그런 소민의 뒷모습을 보던 민규가 소민이 완전히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이 여자야. 진도 좀 나가라. 언제까지 스물 다섯살에서 멈춰 있을래."

밤새 끙끙거려 고민을 해본들 쉬이 결정이 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닌지라 소민은 턱까지 내려올 듯 한 다크서클을 달고는 집을 나섰다.

차에 올라타려던 그녀는 와이퍼에 끼워져 있는 어떤 사물에 시선이 머물렀다.빨간 장미 한 송이가 거기 가만히 끼워져 있었다. 어떤 카드도, 어떤 편지도 누가 보냈는지도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게 누가 보내는 메시지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신호라 이거지? 증명하라는 내 말에 대한 한선유식 답이고."

어젯밤 민규가 한 말을 곱씹으며 소민이 와이퍼에 꽂힌 장미꽃을 살며시 뽑으며 중얼거렸다.

"적어도 어장관리는 아닌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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