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전략적 이미지
72.
이목을 의식해서인지 어두운 바로 그녀를 부른 선유의 소속사 사장은 소민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FA시장에 나온 선유를 이적해오면서 나눴던 대화를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겨울동화에서 여주인공이 했던 대사 같은 말이 선유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왜, 돈 많이 필요하냐?”
웃자고 다음 대사를 친 건데, 선유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농담을 던진 그가 무안할 만큼 진지했다.
“많으면 좋아하겠죠.”
그렇게 말하는 그가 좋은 주체가 자신이 아닌 듯, 너무도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무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얘기할 생각이 없는 걸 묻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걸 묻는 건 분명 실례일 것만 같아 물을 수가 없었다. 그가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내용은 시간이 가면서 알게 됐지만 그 때는 선유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돈 많이 벌려면 우리가 계약금 높게 잡아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네가 우리가 따오는 일을 군말 없이 열심히 하는 게 더 중요하겠지.”
“그래요? 일을 얼마나 해야 하는데요?”
“일을 얼마나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전략적으로 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야. 전략적 제휴로 이미지 마케팅을 극대화하면 효과는 확실해.”
“그 전략적 제휴라는 게 뭔데요?”
사실 가능성이 낮은 도박에 가까운 배팅이었다. 배우의 이미지를 카사노바화 시켜 정말 성공할지는 미지수였다. 해외에서는 그런 이미지가 흔히 욕하면서도 매력이 있어 이해한다는 배우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지만 보수적인 동양, 특히 한국에서는 그런 모험을 굳이 나서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광고회사에는 꽤나 구미가 당길 터였다.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로 이목을 끈 배우. 그건 상당히 자극적일테고, 사람들은 욕하면서도 이번엔 누구랑 그러는지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것보다 광고를 찍는 편이 더 수익은 짭짤한 편이었다.
“그렇게 하죠.”
“이미지 걱정... 안 되나?”
솔직하게 장단점을 늘어놓는 그에게 선유는 너무도 흔쾌히, 대수롭지 않은 문제인 듯 그렇게 답했다. 그의 반응에 놀란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연예인이라면 사실도 사실이 아니라고 우기고 보는 게 스캔들인데, 기꺼이 스캔들로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하겠다니 과연 한선유가 제정신인지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아니면 자신을 놀리거나.
“그보다는 돈이나 많이 벌게 해주세요. 계약서 쓰죠?”
그의 말에 내민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선유의 모습에 그는 또 한 번 놀랐다. 백치미 가득하다는 그가 그의 앞에서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는 모습은 남자인 그가 봐도 멋졌고, 그의 옷이 가죽 재킷만 아니었다면 사업상 전략을 검토하는 대기업의 젊은 리더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왜요?”
그의 시선을 의식한 듯 선유가 서류에서 고개를 들고는 물었다.
“어, 자네 이미지 말이야. 백치미.”
“그것도 컨셉이에요. 전략적 이미지.”
“뭐?”
“너무 완벽한 남자는 부담스럽다고 허점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그게 백치미야?”
“결과적으론 잘 안 됐죠. 그냥 동네 모질이정도?”
“그러네.”
그의 현재 이미지는 그냥 잘생긴 바보이니까 확연히 그건 실패였다. 그 말에 그는 고민에 빠졌다. 잘생긴 바보 카사노바가 과연 먹힐 것인가. 보통 서양의 잘 나가는 카사노바들은 지적인 이미지라도 풀풀 풍기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난감했다.
“하긴 이제 와서 그게 다 뻥이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오히려 그는 그런 선유의 모습에 새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시험에서 0점을 맞는 게 사실은 천재인 거라고. 뭐 간혹 정말 머리가 나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선유의 경우 그게 컨셉이고 연기라고 한다면...
“대체 그 머저리는 무슨 생각으로 이딴 컨셉을 잡은 거야?”
그가 쉽게 바꿀 수 없는 컨셉을 세팅해 놓은 선유의 이전 소속사 사장을 욕하는 동안 선유는 계약서를 끝까지 읽고는 사인을 했다.
“명심해. 전략적 스캔들로 인한 기사가 많이 날 거야. 조만간부터 정신없이 기자들이 들이댈 텐데 괜찮겠어?”
“괜찮아야죠.”
“하나 더.”
추가되는 조항에 선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카사노바다운 연기를 해 줘야 해. 무슨 뜻이냐면.”
“알아요.”
“뭐? 알아? 네가?”
“그런 사람을 하나 아주 잘 알거든요. 마음은 없이 껍데기로만 하는 그런 구애. 필요가치가 사라지면 금방 식어버릴 수 있는 그런 마음.”
“그, 그래. 아무튼 전략적인 스캔들이라는 것만 명심해. 상대도 전략이라는 걸 아니까. 그냥 단순히 파트너야. 진짜는 안 돼. 물론 네가 그런 이미지를 쓴다면 쉽게 접근하는 여자는 없겠지만.”
담담하니 자신이 할 역할을 짚는 선유의 모습에 그는 감탄하면서도 근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하던 선유의 눈빛이 너무도 쓸쓸해서. 과연 선유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제대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건가 방향성의 혼란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이 기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선유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역할을 잘 해냈다.
“사장님. 오래 기다리셨나요?”
청량하고 맑은 목소리에 그가 술잔을 쳐다보던 눈을 들었다.
그래, 선유는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서있는 사람, 소민을 만나기 전까지는.
n기획사 대표인 백사장은 한동안 말없이 독하디 독한 술을 앞에 두고 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소민은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물론, 선유와 관련된 일이란 건 확실하지만...
“소민씨.”
“예. 사장님.”
“선유를 어떻게 생각해요?”
“무슨...?”
“선유가 하나 바꾸고 싶다고 한 게 있어요.”
“바꾸고 싶은 거요?”
소민의 물음에 잔에 든 얼음을 빙글빙글 돌리던 사장이 말을 이었다.
“본인 이미지를 엎어야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나 고치 밖으로 나오래도 말을 안 듣더니.”
“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소민이 되물었다.
“선유가 바람둥이라고 생각하죠?”
“네? 뭐...”
부인하지 못했다. 사실 부인할 게 있을까? 대한민국 사람 누구라도 선유의 이미지하면 카사노바, 바람둥이를 떠올릴 터였다.
“근데... 소민씨도 알죠? 이 바닥. 이미지가 전부인 세계인 거. 어떻게 만들고 어느 쪽으로 방향을 모느냐가 참 중요하죠.”
그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숱한 스타들이 아주 작은 말에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반대로 아주 사소한 행동, 말로 호감이 된 경우도 많았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잘 알았다.
“선유가 처음 들어가 계약했던 회사에서는 그 녀석한테 백치미 이미지를 씌웠어요. 멍청했던 거죠. 완벽남 이미지를 만들 수 있던 걸 스스로 부숴먹었으니까.”
엄연히 한 소속사의 사장이었지만 그 말투에는 단지 소속사 배우의 이미지관리의 차원을 넘어서, 선유에 대한 안쓰러움과 애정이 느껴졌다.
“처음 소속사에서는 백치미 이미지로 몰고 갔고, 카사노바 이미지는 내가 만들었어요.”
“네?”
자신이 선유를 카사노바 이미지로 만들었다고 고백하는 사장의 말에 소민이 놀라 되물었다. 어떤 소속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소속 연예인의 이미지를 그렇게 만들까. 그리고 그제야 선유의 반응도 이해가 됐다.
‘나 그런 거 잘 못해.’
‘그런 게 아니라... 하... 어쨌든 증명하라고. 이걸.’
‘증명하라면... 해야지.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믿을 거야?’
그 말들이 다 연기가 아니라 정말 어찌해야 할 지를 몰라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에 소민은 새삼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선유랑 계약을 할 때 선유가 신경을 쓰는 건 단 하나였어요. 얼마나 많은 돈을 얼마나 빨리 벌 수 있는가. 소민씨도 알죠? 이 바닥에서 돈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선유는 최단경로로 가려고 했어요.”
물론 쉴 새 없이 영화, 드라마, 팬미팅, 해외투어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쉽게 돈 버는 건 아무래도 CF, 광고 쪽이라는 건 자명했다. 그렇지만 그가 왜 그런 길을 선택해야 했는지 소민은 감이 오지 않았다.
“근데 당시 선유 이미지로 그건 어려웠죠. 그냥 잘생긴 동네 바보 이미지를 광고모델로 쓰려고 하는 회사가 몇 군데나 있겠어요. 그나마 가장 이슈가 되는 건 열애설이고 열애설을 가장한 전략적 제휴관계로 기업 CF를 잡는 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었어요. 당시에는.”
지금이야 선유가 워낙에 이미지 구축을 잘 한 바람에 TV프로에 여자 연예인과 출연만 해도 스캔들이 아닌가 촉을 세우지만 그 당시에는 일부러 정보를 흘리기도 했으니, 선유가 그런 이미지를 확립한 건 어느 정도는 사장인 자신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수록 소속사도 이득이니까. 내 말 알죠? 어쨌든 소속사도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미안하기도 했는데... 이번 경우는 아니에요.”
말끝을 흐리던 소속사 사장이 소민을 똑바로 쳐다봤다.
“소민씨한테는 동의도 없이 선유입장에서 그냥 기사를 내서 미안해요. 근데 그건 그 녀석이 알았던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 알았대도 막을 시간도 없었을 거예요. 제가 바로 기사 띄웠으니까. 왜 그랬는지 알아요?”
그 말에 소민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궁금했던 내용이 지금 백대표의 입에서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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