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71화 (70/105)

71. 잠깐... 안아보자

71.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느껴졌다. 아마 엄청 화가 난 듯했다.

선유든 제운이든 어느 쪽이 됐든 오겠지 했는데 제운은 소속사에 붙잡혀 오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사과, 그리고 다음에 전화하겠다는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제운의 문자가 오고 나서 얼마 후  자타공인 톱스타라는 한선유가 문자 못지 않는 속도로 그녀에게 달려왔다. 선유의 형형한 눈빛에 그녀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긴 오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거 뭐야.”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평상시와 달리 분명 정말로 많이 화가 난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목소리 하나는 일품이라 생각하는 그녀였다.

“이거 무슨 상황이냐고.”

채근하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그의 눈빛에는 노기가 어려 있었다. 대체 왜?

“나더러 나가라 그랬잖아.”

“그럼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그럼 계속 있으라 그래요?”

“뭐?”

그녀의 말에 선유가 멍해져 더듬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가라고 한 말이 그... 가라고 한 말 아니야?”

“나야말로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요?”

그녀는 자신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이 틀림없었다. 꽤나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유를 소민 역시 지지 않고 째려봤다.

“장난이요? 장난은 한선유씨가 했잖아요. 옷 갈아입으려고 옆 방 가라고 한 말인데 아련한 눈빛 한 번 발사하더니 밖으로 나가고, 옷 다 갈아입고 나갔는데 방 밖에 없고, 호텔 밖에서 기다리나 했는데 거기에도 없고. 내가 한선유씨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요?”

“수습? 무슨 수습? 아, 설마 수습한다고 낸 게 이 기사야?”

그가 내민 폰 안에 실검 1위인 그 기사 내용을 그녀는 너무 잘 알았다. 그녀가 그렇게 했으니까.

“그런 셈이죠. 우선 제작사 통해서 한선유씨가 출연할 드라마 홍보기사랑 제운씨 영화 홍보기사를 냈어요. 그리고 짧게 제 입장을 밝혔구요. 그래도 두 분이 워낙 인지도도 있고 두 분 팬들도 많아서 관심 돌리기가 조금 수월했어요. 두 분 팬 다 합치면 대한민국 국민 80%는 넘겠던데요?”

아무렇지 않은 듯 종알거리는 소민이었지만 그는 꽤나 화가 났다. 물론 그녀가 자신 때문에 마음 졸였다는 말은 듣기 좋은 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민은 애써 그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던 방향을 순식간에 틀어버렸다. 게다가 뭐? 두 분 팬이 많아서 쉬웠다니?

여론은 첨예하게 나뉘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쪽과 소민을 욕하는 쪽. 막상 제운과 사귀겠다하면 분수에 넘치네 어쩌네 주절거렸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그녀가 제운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자 제까짓 게 뭔데 우리 오빠를 차냐며 난리 부르스를 췄다. 그의 팬은 제운의 팬보다 한술 더 떴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일반인 입장에서 부담스러웠을 거라고, 바람둥이는 나도 싫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하나 딱히 그녀를 변호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주제파악도 못하고 까분다며 그녀를 욕하는 사람들. 그런 그들의 비난에 그녀를 변호하지 않는 것은 제운의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와 제운이 먹었을지도 모를 욕까지 그녀는 혼자서 감내하려는 듯 했다. 근데 그게 눈에 보여서 더 화가 났다. 그녀가 애쓰는 게.

“누가 이러라고 했는데? 누가 대신 비난을 받으라고 했는데? 기껏 너 욕 안 먹게 하려고 죽기보다 싫은데 임지유 만나서 기사 내려놨더니. 왜 도로 그걸 바꿔놔. 대체 왜?”

“그래요. 고마워요. 근데요.”

근데요? 선유가 다음을 재촉했다. 대체 그녀가 왜 그랬는지 알아야 했다.

“한선유씨나 김제운씨는 이미지로 먹고 살아가는 공인들이에요. 나는 그 두 사람 모두의 이미지를 망쳐놓을 수 없어요. 잊었어요? 내가 캐스팅디렉터라는 사실을?”

“그래서 직업 특성상 우리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고? 그럼 채소민 당신은?”

“저한테도 오히려 이게 나을 거예요.”

“뭐?”

“캐스팅디렉터는 연예계 안에서 여러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조율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제가 누군가의 이미지를 망친다면 저도... 일 일하기 힘들테니까요”

소민의 말에 선유는 입술을 꾹 다물어다. 어쨌든 그의 감정과는 별개로 그녀 역시 엄연한 인격체라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자신의 일에 일종의 사명감까지도 갖고 있으니까 그녀의 결정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그녀가 욕먹는 상황을 원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한다고?”

“제가 새디스트도 아니고 욕먹으면 좋아하겠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어쩔 수 없다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소민을 바라보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몹시도 마음에 안 드는 말, 하나뿐이었다.

“미안해.”

“음... 고마워요.”

“뭐가?”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그에게 소민은 외려 고맙다고 그런다. 대체 무엇이?

“날 위해서 그렇게까지 애써줘서요. 한선유씨 임지유씨랑 잘은 모르지만 안 좋은 일 있었던 거, 맞죠? 그런데도 나 때문에 임지유씨도 만나고. 기사도 내려주고. 근데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이거예요. 대신 욕먹어 주는 거. 나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 있는 사람이지만... 한선유씨는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선유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렇게 말하는 여자를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이미 저 작은 손에 심장을 쥐어준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몰랐다.

소민을 향해서 펄떡거리는 심장은 거리를 둔다고 해서 쉬이 멎을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디 있든 자신의 이성과는 별개로, 거칠게 쉼 없이 뛸 거라면 심장이 있는 곳, 소민의 옆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저 따스함에 백대표 말대로 고치를 벗고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안 되겠다.”

“뭐가요?”

“연기가 안 돼.”

“네? 무슨...?”

그렇게 묻는 소민을 향해 선유가 성큼 다가왔다.

“어떻게든 숨기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그렇게 말한 선유가 소민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왜, 왜 그래요?”

“잠깐... 안아보자.”

소민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민을 품에 안은 그가 그녀의 목에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자신에게 기대는 그를 소민이 어색하게 토닥였다.

“왜 그래요? 힘든 일이라도 있어요? 내가 도와줄까요?”

이래서 밀어내기가 어려운 거다. 당장 자기 문제보다도 그를 더 생각하는 게 빤히 보이는 그녀를 어떻게 밀어낼까.

“따뜻하네.”

“사람체온이 다 그렇죠, 뭐.”

“그거보다도 훨씬 따뜻해.”

그 말에 소민이 파묻혀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아주 지척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한테 녹고 싶을 만큼.”

그렇게 말한 선유가 이번에는 반대로 그녀를 자신의 품에 품어버렸다. 바르작거리는 그녀를 더 품에 꼭 끌어안으며 그가 그녀를 불렀다.

“채소민...”

“왜요.”

“좋아해.”

그의 입에서 나온 세 글자에 소민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바르작거리더니 그를 조금 밀어냈다. 겨우 생긴 틈으로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구요?”

“좋아해.”

어느 때보다 진지한, 그리고 진지한만큼 달콤한 눈빛이 그녀를 담고 있었다. 눈빛은 진심이지만 소민은 왠지 덜컥 겁이 났다. 저러다가 또 갑자기 순식간에 차가워질까봐서. 그래서 또 한참이나 그렇게 냉랭한 그에게 다가가기조차 힘들어질까봐서.

“내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만큼, 그의 팔에 닿아있는 손이 여리게 떨려왔다. 왠지 소민의 마음이 헤아려져서 선유의 눈빛이 짐짓 어두워졌다.

“내가... 그 말을 믿어도 돼요? 여태까지 나한테 그렇게 해놓고 갑자기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아 그래요? 고마워요.’ 이럴 것 같아요? 오늘만 해도 어디로 사라져서 이제야 나타나 놓고?”

그렇게 말하는 소민의 목소리는 방금 고백을 받은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설렘 대신 덜컥 겁이 난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지만 소민의 반응에 선유는 입맛이 썼다. 애시당초 그가 못나게 굴지 않았으면 소민이 그의 감정을 오해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니 답답해왔다. 그렇다고 지금에서 저렇게 겁을 내는 그녀에게 무작정 믿으라고 강요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 이해해. 당장이라도 좋아한다고 한다면 좋겠지만 어렵겠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한데 채소민이야 더더군다나 내가 믿기지 않을 수도 있고.”

“진심이에요? 장난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마음... 이해는 가지만 장난 아니야. 진심이야.”

그 말에 소민이 그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없이. 그 침묵이 불안해서 선유는 소민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채소민 하고 싶은 대로 해.”

불안해 한다면, 불안해 하지 않게 하면 된다. 여태껏 제 멋대로 해왔다면, 이번엔 소민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면 되지 않을까. 선유의 말에 소민이 시선을 내리고는 바닥을 내려다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럼. 그럼 떨어져 있어요. 우리.”

하자는 대로 한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가혹한 요구에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선유의 한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민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증명해 봐요. 한선유씨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는 거.”

그 말에 선유가 답답한 마음 대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 그런 거 잘 못해.”

“왜요? 명색이 카사노바면서. 나한테는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한차례 한숨을 쏟아냈다.

“그런 게 아니라... 하... 어쨌든 증명하라고. 이걸.”

“그래요.”

물론 그가 하는 행동들을 보자면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일부러 밀어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또 그만큼 그녀를 밀어내기도 했던 터라 이 고백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언제 또다시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서 이러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고집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민은 정말 선유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을 갖고 싶어서. 다른 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직접 증명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증명하라면... 해야지.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믿을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새치름한 소민의 말에 선유가 한숨을 쉬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일단 알았어.”

그렇게 말한 선유가 밖으로 나서다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내가 증명하면?”

“증명하면 뭐요?”

“채소민은 어떻게 할 건데?”

“일단 증명이나 하시죠, 한선유씨?”

소민의 말에 선유가 시무룩하니 밖으로 나서자 소민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떡해. 꽉 안아줘야지. 어디까지나 진심을 잘 보여줬을 때지. 아주 자알~ 보여줬을 때.”

목소리는 제법 단단한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양 볼을 홍조를 머금고 있어서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발그레하게 있던 소민이 문득 불안한지 중얼거렸다.

“근데 어떻게 증명하려고 여기서 바로 저렇게 담담하게 나가? 사실은 이것도 다 뻥인 거 아니야? 그러기만 해봐라. 내가 진짜. 진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뒷 말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 왜 좋은 게 생각이 안 나.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뒷말이 생각이 나지. 생각만 해도 심장에서 난리블루슨데 괴롭히기는 개 뿔. 나쁜 놈.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지 혼자 덤덤해요.”

증명하래놓고서도 불안한 소민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 무조건 무조건이야~♬

어김없이 민규가 바꿔놓은 벨소리가 울렸다.

“달려가긴 뭘 달려가? 무조건 같은 소리하네. 무조건은 안 가! 안 간다고! 한선유가 증명하면 갈 거라고!”

애꿎은 벨소리에 화풀이를 하던 소민이 액정을 확인하고는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몇 마디 나누지 않고 전화를 끊은 소민이 외출준비를 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