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이 얼간아! 이 화상아!
70.
“정리를 좀 해보죠. 어제 나는 내가 꽃뱀이 아니라는 누명을 벗었는데, 김제운씨랑 느닷없이 열애설이 터졌고. 또 한순간에 나쁜 사람이 됐어요. 그러다가 또 한선유씨가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기사가 터지고 김제운씨도 사실은 열애가 아니라 호감이다. 뭐 이런... 상황이 됐다는 거죠?”
“그래.”
“그리고 어제 제운씨가 나한테 고백도... 하아... 정말 다사다난하네.”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깊은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복잡하긴 하겠지만... 너도 입장표명이란 걸 해야 해. 사실 이 세계 사람이었으면 기사 나가고 몇 시간 안에 정리했을테니까. 어떻게 하고 싶어?”
“뭐를요?”
소민의 질문에 선유가 복잡한 눈빛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나, 그리고 김제운 말이야.”
선유의 말에 입술을 꼭 다물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소민이 고개를 들고는 선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선유씨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거야.”
“물론 결정은 제가 하는 거죠. 근데 지금 제 기분이 어떤지 아세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봤다.
“제가 무슨 드라마나 순정만화에 나오는 캔디나 신데렐라형 캐릭터가 된 기분이에요.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저를 그렇게 볼 거 아니에요. 남자 하나 잘 구해서 현실에서 탈피하는 그런 여자. 근데 그거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피식하고는 웃었다. 그게 걱정이라니 채소민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왜, 왜 웃어요?”
“지금 사람들이 채소민 그 쪽을 어떻게 보는지 전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지. 그리고 남들이 어떻게 보든 적어도 나는 채소민씨 그렇게 안 봐.”
“위안은 안 되지만 그것 참 고맙네요.”
선유가 자세를 고쳐 소민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금 그 쪽은 칼자루를 쥔 사람이야. 그리고 그 칼로 누구를 후려갈길지는 채소민씨가 결정하는 거라니까?”
“무슨 소리예요?”
“나는 결정권을 당신한테 넘긴 거라구. 간택을 기다리는 건 나랑 김제운이란 소리야.”
그렇게 말한 그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창을 띄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기사 말고... 댓글 봐봐.”
선유가 내민 핸드폰과 선유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번갈아 보던 소민이 겨우 손을 내밀어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완전 나 팜므파탈 됐네요.”
제운까지 정정기사를 낸 덕에 그녀는 지금 두 남자의 마음을 양 손에 움켜쥔 그리고 심지어 말 그대로 매력이 넘치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의외로 사람들은 호의적이었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본 기사 타이틀마저 ‘그것이 알고 싶다-그녀의 끝없는 매력’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에서 자신은 불쌍한 신데렐라 내지는 캔디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커리어 넘치는 현대여성이었다.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선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간택을 기다리는 건 우리라고.”
“그러네요. 근데 왜 그랬어요?”
“또 뭘?”
“한선유씨네 회사에서 갑자기 그런 기사를 낸 이유요.”
선유 역시 그게 궁금하긴 했다. 대체 왜 갑자기 자신이 소민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기사를 낸 것인지. 물론 소민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속사에서 기사가 나간 거라면 백대표가 기사를 냈다는 소리인지라 자신의 이미지 쇄신 때문이라곤 해도 소민을 이용하는 거라면 여태까지와 별 다를 게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네가 입장표명하고 나면 나도 백대표한테 확인해 볼 생각이야.”
선유의 말에 소민이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그게 선유가 알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호감이 있다는 그 기사를 그녀는 신뢰할 수가 없다는 소리였고 결국 확인을 하기 위해서는 직접 물어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본인은 몰라도 소민은 선전포고도 한 상태고 물어보기로 했다. 자고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랬으니까.
“한선유씨는요?”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네 말에 따라 사람들 반응이 확연히 차이가 나게 될 테니까...”
“아니,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에요.”
소민이 선유를 올곧은 눈으로 바라봤다.
“한선유씨 마음은 어떠냐구요.”
“지금 내 마음은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네가 다치지 않는 게 중요한 거야. 하지만 분명한 건 둘 중 하나는 부정을 해야 네가 덜 다친다는 거야.”
“내가 만약 한선유씨를 부정하면 한선유씨 마음이 어떨 것 같냐구요. 그래도 돼요? 괜찮아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손톱으로 손바닥이 지압이 될 만큼 주먹을 꽉 쥔 채로 선유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입술이 다시 열렸어도 목소리가 나오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에 달린 추는 목소리를 몸 안으로, 나가지 못하게 잡아끌고 있어서 그걸 억지로 끄집어내는 게 힘에 겨웠다.
“... 돼.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안 다치려면 그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기사가 이상하게 나지 않게 도우라고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는 선유를 소민이 올려다봤다.
“나 싫어요?”
“뭐?”
선유의 잘생긴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쪽이 찌그러지는 모습을 소민이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요. 나랑 김제운씨랑 한선유씨랑 삼각관계라는데 어떻게든 발을 빼려고 하는 모습인데 내가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아, 나랑 엮이기 싫은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래. 나는 네가 나랑 엮이는 게 싫어.”
선유의 입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망설임 없이 새어나온 몇 되지 않는 말마디에 심장이 눈 앞에서 토막나는 기분이었다. 침대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소민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유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괜히 나랑 엮여서 네가 어떤 일을 겪을지 짐작이 안 되거든. 네가 무슨 수모를 겪을지 모르고, 네가 겪을 수모를 내가 다 막아줄 수 없을 게 분명하니까. 어디선가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내가 지켜주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보단 엮이지 않는 편이 나아. 그런 일을 겪다가 언젠가 네가 나한테 왜 그 때 말리지 않았냐고 이기적인 놈이라고 하겠지. 그럼 내가 나한테 오만정이 다 떨어진 너를 놔줘야 하는데 못 놔줄까봐, 너한테 정말 이기적인 놈이 될까봐. 그래서 너랑 엮이기 싫어. 엮이면 안 돼.”
“한선유씨 누구한테 위협받는 건 아니죠? 날 누구한테서 지켜줘야 하는데요?”
선유가 먹먹한 눈으로 소민을 내려다 봤다. 자신을 지켜줘야 한다는 말에 누구한테 해꼬지를 당할까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되려 그를 걱정하는 이 여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에게 그걸 말하는 일이 쉬웠다면 애초에 거리를 두려고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나랑 엮일 일 없을테니까 몰라도 돼.”
분명 자신을 밀어내는 말이지만 그 내용은 아니었다. 온통 그녀가 걱정돼 죽겠다고, 멀어지라고 당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걱정을 늘어 놓으면서 눈빛은 절절히 숨겨온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애틋한지 소민은 그가 열렬히 세레나데를 부른 것도 아닌데 온 몸이 녹작녹작해지는 게 어제 먹었던 술보다도 더 얼큰하니 취하는 느낌이었다. 술 취한 것처럼 사람들을 붙잡고 털어놓고 싶었다.
저 남자가, 누가 봐도 잘난 저 남자가 애틋한 눈빛으로 내가 다칠까봐 밀어낸다면서 거절인 듯 사랑고백인, 고백 아닌 듯 고백인 말을 늘어놨다고. 혼자 하는 사랑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그렇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요? 알았어요.”
그렇게 말한 소민을 선유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알았다고 했다. 이제 더 밀어낼 필요도 없이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허전해져왔다.
“한선유씨, 좀 나가줄래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어조로 그에게 나가라고, 그의 말대로 자신을 밀어내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에 담고는 그가 돌아섰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자신의 재킷을 챙겨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선유의 뒷모습을 보며 소민이 중얼거렸다.
“왜 저렇게 아련하게 나가고 난리람? 내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 다 한선유 탓이야.”
*
“야! 이 얼간아! 이 화상아! 밥상을 차려줬는데 왜 못 떠먹어!!”
“아니, 뭐 예고라도 해주던가. 뭔데? 채소민이랑 계약 연애라도 해야 하는 거야? 미리 말해두는데 안 해.”
“누가 언제 너더러 계약 연애 하래? 말했지? 이미지 바꿀 거라고. 그냥 연애하라고. 연.애. 남들처럼 평범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애 좀 해보라고.”
“내 주제에 무슨.”
선유가 백대표의 말에 쓰게 웃으며 중얼거리다 이내 백대표를 향해 억울한 듯 소리쳤다.
“왜 묻지도 않고 일을 벌려! 그래놓고 왜 나를 들볶고 그래!”
“오죽 답답하면 내가 그랬겠냐. 아니, 이게 계약연애 몇 년하더니 연애고자가 되가지고는. 숟갈로 코 앞에 들이밀어줘도 못 먹어요. 너 그러다 장가는 어떻게 갈래?”
“장가는 무슨.”
“왜? 너희 어머니가 점찍어 주는 여자랑 결혼할 생각이야?”
“안 해. 불행한 인생은 나 하나로 족하니까.”
선유의 말에 백대표가 입을 다물고는 그를 노려봤다.
“못난 놈.”
“또 왜.”
“틀 안에 갇혀서 깰 줄을 모르지. 이 병아리만도 못한 놈아.”
어지간히 속이 답답한지 백대표가 그의 머리에 진심이 담긴 꿀밤을 선사하자 선유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아파! 왜 그래, 대체!”
“정말 좋아하면 용기를 내야지! 뭔 일이 있더라도 덤벼봐야지. 언제까지 고치 안에 갇혀서 살 거야. 그래, 어려웠겠지. 어렵게 낸 용기였는데 그 빌어먹을 임지유가 도로 고치 안에 집어넣고 포장까지 꽁꽁 잘 해줬겠지. 근데!! 그렇게 고치 안에만 있으면 백날 천날이 가도 하늘을 못 날아. 네가 날고 싶은 대로 못 간다고! 그렇게 평생 살래? 그 쥐똥같은 임지유 때문에? 앞으로 너보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너희 어머니 때문에?”
신랄하게 그렇게 말하는 백대표의 말에 선유가 반박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더러. 나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칠지 몰라도 일단 들이 덤벼? 그러다 나중에 상처가 나서 너덜너덜해지면? 그래서 나를 원망하게 되면?”
“그건 그 때 생각해야지! 그렇게 주저앉아서 고민만 하면 인생은 왜 사냐? 내일 교통사고가 날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낙석이 떨어져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내일 운석이 지구에 충돌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계속 지금처럼 나 답답하게 할 거면 우리 계약 해지하자. 내가 위약금 줄게. 해지해.”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백대표를 선유가 쳐다봤다.
“쳐다보면 어쩔 건데? 계속 그렇게 고치 안에 있는 놈을 내가 왜 품고 있어? 나비로 날아갈 놈을 품어야지. 매미처럼 시원하게 울 놈을 품던가.”
선유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언제까지고 저렇게 있는 게 능사는 아니기에 거칠게 몰아붙이는 백대표를 향해 선유가 입술을 꽉 다물어 보였다. 저도 꽤나 답답한 노릇인지 선유가 머리를 쓸어 넘길 때였다.
“대, 대표님!!”
다급한 목소리의 준영이 선유와 대표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그... 형님... 소민누님...”
“그래. 그래서 지금 차려준 밥도 못 떠먹는다고 욕하고 있어.”
“그, 그게 아니랴요. 기사... 기사요.”
“뭐, 왜? 기사가 뭐 또 났어?”
백대표의 말에 준영이 한달음에 책상으로 오더니 새로 뜨는 기사를 창에 띄웠다. 그리고 기사를 눈으로 빠르게 훑은 선유가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나마 아주 샌님은 아니라서 여지껏 데려온 줄 알아라. 인마.”
선유의 움직임의 후유증으로 덜컹거리는 진동으로 파르르 떠는 문을 바라보며 백대표가 중얼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