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이제부터 잘 해보려고.
67.
“이 봐, 일어나지?”
유찬은 그를 깨우는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낯선 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고 팔 한 쪽에는 감각이 없는 건지 저린 건지 헷갈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선 검과 같은 시선을 보내는 두 남자의 눈빛이 느껴졌다.
“여기... 어디죠?”
자다 일어나 잠긴 그의 목소리에도 두 남자는 그저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서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그가 둘에게 물었지만 그 둘은 할 줄 아는 일이라곤 그를 노려보는 것뿐인 듯 계속 유찬을 노려봤다.
아마 눈빛으로 사람을 태울 수 있다면 유찬은 진즉에 12번은 더 활활 타 잿더미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형형한 눈빛들에 유찬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눈치였다.
“김제운만으로도 이미 충분한데. 넌 뭐냐.”
“유찬씨랑 라이벌이 되고 싶진 않아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대는 둘을 향해 유찬이 절규했다.
“대체 뭔데요~!!”
유찬의 반응에 그나마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인 제운이 손으로 그의 옆을 가리켰다.
“뭐요? 뭐!”
하고 시선을 옮긴 유찬의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소민이 그의 품에 안겨 팔베개까지 하고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우어억!!”
비명을 지른 그가 소민을 밀쳐내며 그녀의 밑에 깔린 팔을 빼냈다. 꿍! 소리와 함께 소민이 그에게서 멀어졌다. 꽤 요란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소민은 그저 잠시 뒤척이다가는 평온하게 잠을 계속 잤다.
“오해예요. 이건 오해라구요.”
유찬의 말에 제운이 혀를 찼다.
“유찬씨.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막 움직이면 어떡해요. 소민씨 머리 박았잖아요.”
꿈틀대기만 할 뿐 여전히 잘 자고만 있는 소민이 걱정되는 듯 제운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 둘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지 선유가 침대 위 베개를 들더니 그녀에게 베개를 받쳐 줬다. 그런 그의 모습에 제운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그답지 않게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선유씨 되게 웃기시네요?”
“뭐가.”
“그거 한선유씨가 어제 베고 잤던 베개 아닙니까?”
“그게 뭐.”
“근데 왜 그 베개를 베어주는 겁니까?”
“그러면? 쟤가 베고 잔거 베어주라고? 싫어.”
턱짓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선유를 향해 실소를 보이며 유찬이 유치한 싸움을 하는 그 둘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치 누가 더 유치한지 내기라도 하는 듯 투닥대는 그 둘은 찰떡궁합이 따로 없었다. 적어도 제운은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사람이 변하는 건 참 순간인 듯 싶다.
“형. 지금 뭐해요?”
그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투닥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딜 봐서 저 둘이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들이라 하겠는가. 그냥 동네에 예쁜 아가씨를 두고 경쟁하는 백수 1,2같아 보였다.
“우우웅”
그들이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에 소민이 옅은 신음소리를 흘리자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그 둘이 일순 딱 멈췄다. 들릴까 말까하는 그 소리에 반응을 하다니 저들은 채소민전용 소머즈귀라도 가진 듯 했다.
“기가 막히네.”
중얼거리는 유찬을 향해 제운이 검지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형님들.”
조용히 하라는 신호에도 불구하고 유찬이 그들을 부르자 선유가 그를 쳐다보더니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왜, 왜 이러세요.”
“따라와. 김제운이 너도.”
선유가 더 이상 떠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뒤돌아섰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 셋은 옹기종기 욕실에 모여 있었다.
“근데 대체 왜 우리가 여기 있어야 하는 겁니까?”
제운과 함께 욕조에 걸터앉은 유찬이 투덜거렸다. 분명 욕실이 좁지는 않았지만 굳이 이곳으로 들어올 이유는 없었다. 그냥 다른 방에서 이야기해도 될 일인데 선유는 그들을 끌고 욕실까지 온 것이었다.
“다른 방은 채소민이 자는 방하고 너무 가깝잖아. 목소리가 조금 커지면 들릴지도 모르니까 가장 먼 데로 오는 게 당연하지.”
변기뚜껑을 덮고 그 위에 앉은 선유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고 대체 뭐가 당연한 일인지 제운은 그 말에 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유찬이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문질러댔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던 제운은 유찬더러 정말 술 깨는 약을 사오라고 하더니 바로 호텔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형님. 지금 가 봐야...”
“늑대랑 토끼만 둘 수는 없어.”
유찬이 보기엔 소민도 선유를 좋아하는 듯 보였는데 제운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한숨을 내쉰 유찬이 마지못해 제운의 뒤를 따라 호텔로 들어왔고, 그들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선유의 품에 안겨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잠이 든 소민과 그 밑에서 그녀를 토닥이고 있는 선유의 모습이었다.
유찬이 보기엔 이미 범접 불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 제운은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안으로 발을 디뎠다.
“뭐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도 선유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더 소민의 등을 토닥이다 살며시 움직여 소민을 침대로 눕혔다. 그 와중에 소민은 꿍얼거리며 멀어진 선유의 온기를 찾아 그의 허리를 팔로 감아 안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선유를 노려보던 제운도 그 순간만큼은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소민의 미소가 너무 편해 보여 마음이 아파왔다.
그렇게 소민에게 자신의 허리를 기꺼이 내어준 채로 선유가 제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왔어?”
머릿속에 골짜기라도 들어선 건지 왔어?라는 선유의 말이 메아리쳤다. 너무나도 태연자약한 그 모습에 제운이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피고는 말했다.
“지금... 술에 취해서 정신 없는 사람한테 뭐하는 짓입니까?”
“멀쩡한 사람이 술에 취하도록 만든 사람한테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애시당초에 한선유씨가 여자관계만 잘 관리했어도 없을 일 같은데요.”
“그래, 그래서 이제부터 잘 해보려고. 여자 관리.”
용호상박. 둘 사이에는 고전압의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어... 어쨌든 소민씨 잠드셨으니까. 일단 오늘은 갈까요?”
유찬이 그렇게 말하는데 선유는 양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여전히 소민이 허리를 잡고 있는 상체를 뒤로 살짝 젖히며 말했다.
“난 못 갈 것 같은데?”
선유의 시선은 도발적이었고, 그 시선의 끝에는 제운이 서 있었다.
“보시다시피... 누가 잡고 계셔서.”
일어서기만 하면 끊어질 듯 여려 보이는 그 손수갑을 핑계로 대며 선유가 그렇게 말했고, 그 말에 제운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럼...”
그렇게 말하는 제운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말한다.
“저도 여기 있는 걸로 하죠.”
“뭐?”
“네?”
선유와 유찬이 동시에 같은 뜻을 담은 단어를 뱉어내거나 말거나 제운은 척척척 걸어와 선유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선유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눈동자를 한 채.
그냥 두면 서로를 갈아 마실 듯 바라보는 그 둘을 중재하기 위해 유찬도 어쩔 수 없이 여기 남았다.
그리고 지금, 눈을 떴을 때는 어찌 된 일인지 따로 자던 소민이 그의 옆에 자고 있었고, 둘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그 때 유찬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집어든 그를 향해 선유와 제운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소민이 잠에서 깰까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닌 듯 구는 두 남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을 벗어나 전화 통화를 하던 유찬은 상대방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건...”
움직이기 시작하던 그의 입술이 일순 멈췄다.
“방금... 뭐라고요?”
상대방이 다시 한 번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유찬의 발길이 황급히 다시 방으로 향했다.
“빨랑 나가.”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너 지금, 내가 선배라는 거 알면서도 나 무시하는 거지?”
“좋아하는 여자 앞에 두고 선, 후배 따질 정도로 제정신은 아니어서요. 진즉에 제정신이길 포기했거든요.”
“잘 됐네. 나도 미쳤는데.”
침대 위에 꿈나라를 여행 중인 여자가 혹시 여행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올까 낮은 목소리로 서로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길 주장하는 두 남자를 향해 유찬이 달려들었다. 전화로 들은 질문이 사실이라면 선유도, 제운도 지금 꽤나 심각한 상황이었으니까.
“형님. 솔직히 형님이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니거든요.”
한숨을 내쉰 유찬이 선유를 돌아다봤다.
“일을 왜 크게 벌이고 그러세요? 밤새 아주 사고를 한 건 크게 치셨더구만요?”
“뭐? 내가 뭘?”
천연덕스런 선유의 말에 유찬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
“뭘? 지금 인터넷에 현실판 삼각관계의 주인공들이 되셨는데 이 사태를 어쩌실 거예요?”
“뭔소리야?”
그렇게 중얼거린 선유가 핸드폰을 들었지만 핸드폰은 먹통이었다.
“아, 배터리 없나본데?”
“켜지 마세요. 켜지 마시고 제 핸드폰으로 보세요. 어차피 켜봐야 전화만 쉴 새 없이 들어오고 인터넷은 보지도 못하실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유찬이 선유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들어온 기사 내용에 선유는 입을 떡 벌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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