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안 괜촤놔요.
65.
소민은 기지개를 켜며 쓰고 있던 다이어리를 내려다 봤다. 벌써 제운이 자신을 숨겨둔 이곳에 있은 지도 사흘이나 지나 있었다. 경치도 좋고 초호화 일류 호텔이지만 집이 아니다보니 편할래야 편할 수가 없었다.
비용이야 둘째 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볼까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으니 미치게 답답했다.
그냥 경치 좋고 환경 좋은 비싼 감옥에 갇혀있는 기분에 소민은 온 몸에 호텔 배치도를 그리고 프리즌브레이크를 찍고 싶을 정도였다.
민규는 가끔 퇴근을 하며 그녀가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다주고는 나가고 싶다며 투덜대는 그녀더러 복에 겨웠다고 타박했지만 얼핏 스치는 자신을 향한 안쓰러운 기색을 볼 때 아직도 세상이 시끄럽구나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제운은 자신이 상처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에게 문명과의 단절을 강요했기 때문에 그녀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방법은 없었다.
“부드러운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남자다운 면이 있었단 말이지. 다음에 작품 중에 마초물 이런 거 있으면 한 번 캐스팅 해볼까.”
다이어리에 메모를 하는 와중에 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저예요.”
“아, 잠깐만.”
다이어리를 치운 그녀가 문을 열었다.
“유찬씨, 왜? 무슨 일 있어?”
유찬이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왔다. 누가 제운의 매니저 아니랄까봐 그녀보다 1살 어린 유찬은 성격이 서글서글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사교성도 좋아서 그녀더러 곧잘 누나라고 불렀다. 틱틱대는 남동생인 민규와는 사뭇 다른 게 여자동생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누나, 좋은 소식 있어요.”
“뭔데?”
유찬이 빨리 말하고 싶은 간지러운 입을 참으며 몸을 비비 꼬았다. 그런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소민이 재촉했다.
“아, 빨리 얘기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누나 무슨 생각하는데요?”
“네가 나한테 반해서 고백하는 생각.”
“크크크크. 그게 뭐에요. 그게 좋은 소식이에요?”
“어. 네가 나한테 반하면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그건 누나한테는 좋은 소식인지는 몰라도 저한테는 헬게이트 열리는 소리거든요?”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내는 소민을 향해 유찬이 웃었다. 아마 제운은 그녀에게 고백을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녀를 여기 데려다 주면서 고백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녀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순간 도와줄까 생각도 했지만, 제운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싶었다. 괜히 끼어들었다 망칠까 걱정도 됐고, 그래서 결국 그가 가져온 소식만 알려주기로 했다. 그도 알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알지만 아직 그녀가 모르는 그 소식을.
“누나 있잖아요.”
“응응.”
눈망울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소민의 귀에 유찬이 몇 마디를 속삭이자 소민이 그를 쳐다봤다.
“진짜?”
“네.”
“정말?”
“네.”
“뻥 아니고?”
“네.”
삼세번은 확인하더니 소민이 꺅꺅거리는 비명을 질렀다.
“꺄악!!! 어떡하지? 어떡하지? 유찬씨. 나 나가면 하고 싶은 거 엄청 많았는데. 뭐부터 하지? 어? 어?”
방방 뛰는 소민을 잡아 앉힌 유찬이 말했다.
“일단은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부터요.”
“어. 맞아. 맞아. 근데 그게 안 돼! 나 가석방된 기분이야.”
하긴 죄인도 아닌데 죄인처럼 지냈으니 그런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리라. 덩달아 웃는 유찬의 핸드폰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누나.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어. 어. 그래. 그래.”
제운의 매니저인 유찬이 자신의 사건이 급마무리가 됐다고 전해준 소식에 소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운의 소속사 사장님이 힘을 쓴다고 하더니 어찌어찌 해결이 됐는가보라고 생각한 소민이 자축을 위해 룸서비스로 만찬을 시켰다.
“으으으!! 얼른 집에 가고 싶다. 이게 바로 최후의 만찬인가? 아니지 최후라는 단어는 안 어울리는데. 뭐라 그러지? 뭐라 그래야 하지? 몰라, 아무렴 어때. 오늘로 여기도 안녕이다.”
배실배실 웃으며 소민이 방안을 빙글 빙글 돌아다녔다. 얼마나 그렇게 돌아다녔을까. 유찬이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방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시킨 룸서비스가 들어왔다.
“음음. 역시 기쁜 일에는 샴페인이지.”
신나는 기분만큼 샴페인을 열심히 흔들고 있는데 유찬이 돌아왔다.
“유찬씨 이거 좀 따줘. 축하해야 돼. 빨리빨리.”
“어... 저...”
아까와는 달리 유찬이 머뭇머뭇 방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지자 소민이 그를 살폈다.
“어디 몸 안 좋아?”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소민의 눈이 유찬을 꼼꼼히 훑었다. 확실히 아파보이지는 않았지만 아까보다 낯빛이 훨씬 어두웠다.
“왜? 제운씨한테 무슨 일 생겼어?”
“어... 음... 네.”
“그래서 그렇구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괜찮을 거야. 잘 해결되겠지.”
그녀의 위로에도 유찬은 괜찮아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고민이 해결되자 소민은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면서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많이 심각해? 그래도 먹고서 고민해. 먹어 일단 먹자.”
유찬의 손에 포크를 쥐어주려는데 유찬이 손을 뒤로 뺐다.
“누나! 제가 대신 정말 죄송해요!!”
뜬금없는 사과에 소민이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과도 아니고 대신이라니? 그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리고 왜 그녀에게 사과를 한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유찬씨. 알기 쉽게.”
그녀의 말에 유찬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나. 제운이형도 일이 이렇게 진행이 될 줄은 몰랐을 거예요. 그런데 저... 저희 사장님이...”
유찬은 여전히 그녀의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유찬이 하는 말마다 도통 그녀는 이해불가였다. 분명 둘은 같은 언어로 대화 중인데 말이 통하지 않았다.
“유찬씨. 무슨 소리야??”
“그게...”
더 이상의 설명은 무리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차마 말을 할 수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말 대신 유찬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앞에 사흘 만에 인터넷 창이 다가왔다.
유찬이 아무 말도 없었지만 소민은 단번에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고, 유찬이 뭐라고 더 말을 했을지라도 귀에 닿지는 않았을 터였다. 심각한 아노미 상태가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이건 꽃뱀보다 더 심각했다. 꽃뱀 사건 때 그녀가 300만 안티를 양성했다면, 이번에는 국민의 절반이 그녀의 안티팬이 되지 않았을까?
“대, 대체 이게 뭐야?”
사흘 만에 그녀는 또 다시 인터넷 검색어 1순위에 빛나고 있었다. 제길, 그녀는 고소공포증이 있었고 이 높디 높은 검색어 순위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구뤠서?”
“그... 그러니까요.”
유찬은 누가 자신을 좀 구해줬으면 싶었다. 어둠의 자식 같은 그녀로 인해 주변의 공기가 부식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두운 기운을 뿜는 여자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밝고 상냥하던 소민과 지금 그의 앞에 여자가 동일인이라니 이건 꿈이지 싶다.
인터넷 기사를 본 그녀가 룸서비스에 전화를 하더니 소주를 주문할 때 알아봐야 했다. 그녀는 아까 시킨 룸서비스를 안주삼아 아무 말도 없이 쉬지 않고 소주를 들이키더니 얼굴이 붉어진 채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기운이 센 건 아니었지만 술에 취한 그녀가 비틀거릴 때는 늘어지는 그녀의 체중이 온전히 실리는 탓에 그도 같이 비틀거렸다. 거기다가 왜 이렇게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자꾸 주저앉으면서도 일어서려고 낑낑거렸다.
“돼최 이리 왜 일케 돼쓰까?”
“그건 저도 잘...”
“왜 몰롸!!”
버럭 소리를 지는 그녀를 유찬이 물기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술 취한 사람을 이기는 장사는 없었다.
“죄송해요!!”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유찬의 모습에 그녀가 순간 흠칫했다.
“유촨씨. 암 쏴리. 똥 쿠롸이.”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유찬이 괜찮다고 말하는 모습에 양심이 따끔거렸지만 지금 그녀의 머리는 이미 폭발할 만큼 터질 지경이어서 유찬의 기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술기운이 올라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아 놔 이것두를.”
비척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다 넘어질 뻔한 그녀를 유찬이 아닌 어느 새 온 선유가 부축해 안았다.
“이것들을 뭐?”
오랜만에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구미호씨,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에 보는, 더군다나 정말 반가운 듯 미소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어색해 목소리가 절로 딱딱해지는 걸 알았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치 로봇이라도 된 것 같았다. 차라리 노란 오토봇처럼 목소리가 고장 나서 라디오방송으로 말을 대신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뭐워야. 원제 왔어. 이 싸뢈?”
찬유를 향해 소민이 물었지만 찬유는 이미 그런 소민의 시선을 피해 있었다. 본인은 바르게 말하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이미 꽤 혀가 꼬인 그녀의 발음에 선유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여자, 얼마나 마셨냐?”
“딱! 두 병이요.”
유찬이 선유에게 잽싸게 소민을 떠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스타에게 저 꼬장 덩어리를 맡기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은 한선유에게 넘기는 게 나아 보였다.
“소민씨... 괜찮아요?”
언제 들어왔는지 제운도 들어와 서 있었다. 왠지 모를 민망함에 소민이 뻘쭘하니 웃어보였다.
“헤헤. 제운씨 왔어열?”
자신을 대할 때와 제운을 대할 때의 다른 태도에 선유가 다시 미간을 구겼다.
“괜찮아요?”
반복된 제운의 말에 소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걸 얘기하는 걸까? 술 마신 거? 아니면 기사난 거?
하긴 어느 쪽이든 딱히 상관은 없다. 둘 다 전혀 괜찮지 않아서 대답은 같으니까. 평범하게 자신의 일만 열심히 하고 살던 그녀에게 이게 웬 날벼락인가 말이다.
“기왕 맞을 벼락이면 돈벼락이 좋은뒈, 이게 뭐약.”
그녀가 꿍얼거리며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나 하나토 안 괜촤놔요.”
“미안해요. 나도 이렇게 됟 줄은 몰랐어요.”
“모르긴 뭘 몰라. 여태껏 사고 한 번 안 쳤던 놈이 영화 촬영하다 뛰어 올라오고, 소속사에다가 수습 좀 빨리 해달라고 졸라대면 소속사가 보든 누가 보든 저 놈이 저 여잘 좋아하는구나 대번에 알지.”
제운의 말에 선유가 퉁명스레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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