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64화 (63/105)

64. 계약 연애, 안 해

64.

기사가 뜬 지 사흘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의 흥분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채소민, 그녀의 행방도 묘연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소리를 수천 번도 넘게 들은 것 같았다.

마지막 문자는 제운과 같이 잠시 나간다는 문자였고,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발 담그고 있는 이 더러운 현실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제운이 움직였다는 것.

당장이라도 제운을 찾아가 소민이 어디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게 해결책이 아니라는 게 그의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그보다 먼저 해결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는 가능한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어느 누구의 손을 빌려서가 아니라 그가 직접. 그래서 사흘을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는 몸을 움직였다.

자신의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는 선유의 굳게 다문 입매와 꽉 진 주먹에 솟아 있는 푸른 핏줄이  지금 이 장소가 그에게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 펜트하우스로 향한 그가 지체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으로 벨을 눌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사람, 그 사람은 임지유였다.

“왔어? 들어와.”

태연하게, 아니 미소까지 지으며 그를 반기는 그녀를 선유가 한 번 노려보고는 그녀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쪽지는 그저께 보낸 것 같은데.”

그 안에 어느 것에도 닿기 싫은 듯 우두커니 서 있는 선유를 보며 지유가 미소를 지었다.

“앉아. 쇼파가 너 잡아먹지는 않을 거니까. 어떻게 지냈어? 요새는 예전보다 기사 반응속도가 빠르지? 인터넷강국에 산다는 게 이렇다니까?”

“기사 당장 정정해.”

태연스레 말하는 그녀에게 그가 건넨 말은 그것 뿐이었다. 인사도 아닌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닌 그저 요구.

그의 말에 멈칫했다가 이내 해사한 미소를 문 그녀가 그를 바라봤다.

“왜? 이제라도 시작해보자. 네 고백에 대한 답이 이제야 닿은 거라고 생각해. 그럼 쉽잖아. 안 그래?”

무감한 표정을 지은 선유가 뻔뻔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지유를 바라봤다. 쇼파에 앉은 그녀는 여왕처럼 앉아 있었고, 저 앞에 무릎을 꿇고 싶어 하는 이가 많다는 것도, 이 바닥에서 그녀와 연인관계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녀는 그저 상처, 상처였다.

“목적이 뭐야.”

“목적이라니? 둘이 좋아한다는데 목적이 있어야 해?”

“그래.”

선유의 말에 지유가 미간을 좁혔다.

“많이 변했네? 예전에는 그런 거 없었는데.”

“그 때도 있었어.”

“뭐?”

되묻는 지유를 선유가 똑바로 노려봤다.

“너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는 어렵게 그걸 말했을 때는. 너랑 평생 행복하게 사는 게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게 내 목적이었어.”

“몰랐네. 이제라도 알았으니 잘해 볼까?”

“지금은 바뀌었어.”

“뭐?”

“지켜내는 거야.”

“고맙네. 네가 내 흑기사 같다.”

지유가 많은 이들이 매력적이라고 부르는 그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선유의 표정은 그저 서늘하기만 했다.

“착각하지 마. 너한테서 그리고 나한테서 지켜낸단 소리니까. 그리고 그 대상이 네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겠지.”

선유의 말에 지유가 노려봤다.

“내가 기사 안 내리겠다고 하면 어쩔건데?”

“나 혼자서라도 정정기사를 내야지. 지금 이건 너를 용납해 주겠다는 게 아니야. 그저 네 자존심 지킬 기회를 주는 것뿐이야. 네가 매수했던 기자들도 지금 다 접촉 중이니까. 너 나만큼 크게 되겠다고 나가더니 아직 나만큼 크질 못했나봐. 다들 내 이름 실린 기사 그만 올리고 싶은지 물어보니까 네 쪽은 포기하겠다고 하는 걸 보면.”

선유의 말에 지유가 소파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얼마나 세게 움켜 잡았는지 마른 손에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내려. 내가 끌어내리기 전에.”

“네가 그런다고 그 여자애가 알기나 할 것 같아? 그리고 설령 안다고 한들 네가 또다시 네 과거를 다 들춰 보여줄 수 있을까?! 아니, 넌 못해. 그건 아직도 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란 소리야.”

지유의 발악이 섞인 외침에 선유가 움직이지 않던 다리를 움직여 지유에게 다가갔다. 그 기세에 지유가 순간 주춤했고, 어두운 아우라를 흩뿌리며 선유가 말했다.

“말했잖아. 나한테서도 지켜낸다고. 그러니까 두 번 세 번 말하게 하지 마. 네가 나한테 특별한 존재여서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선유가 미련 없이 돌아서 문고리를 잡았다.

“하루 준다. 내려.”

그렇게 말한 선유가 문고리를 잡아 내릴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지유가 그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래! 그럼 계약하자. 계약 연애! 너 많이 했잖아. 지금까지 여자연예인이랑 스캔들 난 거 다 계약이랑 연관돼서 기사 낸 거였잖아. 길게는 안 할 게. 6개월 아니 3개월이라도. 그건 너도 괜찮잖아. 우리 둘이면 광고 엄청 들어올 거야. 그 여자애 따위는 너한테 너 하는 일에 별로 도움 안 되잖아.”

그 말에 선유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도 더 서늘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 따위라고 표현할 사람도 아니고 여자애도 아니야. 채소민은 나한테 여자야. 그리고 이제 네가 말하는 계약 연애, 안 해.”

“왜... 왜...”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지유를 향해 선유가 문고리를 당겨 밖으로 나서며 덧붙였다.

“소속사 방침이 바뀌었거든.”

문이 닫히고,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지유가 쇼파에 주저 앉았다.

“왜... 왜... 그 여자애 이름을 그렇게 쉽게 부르는데? 안 불렀잖아, 내 이름도. 아무도 안 부른다며. 여자 이름은! 여자라며!! 근데 왜? 대체 왜!!!”

낮은 읊조림이 끝에 이르러서는 새된 비명으로 터져 나왔고, 거친 숨소리가 뒤따라 나왔다. 한참이나 숨을 몰아쉰 끝에 평이한 숨소리를 되찾은 지유가 주먹을 쥐었다.

“그래, 지금은 내려줄게. 이건 예고편이라고 생각해. 네가 아니라 그 기집애가 너한테서 떨어져 나가게 하면 되니까. 그리고 그 빈자리를 내가 채우면 돼. 조금 시간을 늦췄을 뿐이야. 그것 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지유가 선유가 나간 문을 노려봤다.

정확히 6시간 후, 정정기사가 내려갔다. 좋은 동료배우일 뿐이라는 기사에 선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는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가 올라간다고 해서 사람들의 의심의 눈초리가 완전히 걷히는 건 아니었고, 그 사실을 알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지독히도 걱정되는 마음을 완전히 거두는 방법은 하나였다.

“봐야겠어.”

“형님. 오셨는데 안 올라오시고 아래 차에 계시네요?”

“어차피 나갈 거야. 그러니까 넌 가서 사장님한테 마무리 잘 부탁한다고 좀 전해줘.”

“네.”

준영이 방문자가 있음을 알리기가 무섭게 일어선 선유는 잰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 나와 아래로 내려갔다.

차 안에 앉은 두 남자 사이에, 더 무거울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이 상황에서 불리한 쪽은 선유였다. 그는 지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 결국 목마른 놈이 우물판다는 심정으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황상 김제운씨가 채소민 감춰둔 것 같은데, 어디 있지?”

“편안한 곳에 있습니다.”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히 안도가 되기는 했다. 지금 이 상황에 편안한 곳이 어디일지는 짐작이 어려웠지만 제운 역시 이 바닥에 있는 사람이었고, 알아서 처리했을 거란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일이 해결된 거는 아나?”

“아마 알겁니다.”

"아마라니?"

세간이 떠들썩한데 아마라니? 그의 미간이 구겨지는 걸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며 제운이 말을 받았다.

"악플이 너무도 많아 그 동안 인터넷을 비롯해 어떤 소식도  못 들어가게 차단했었습니다."

"설마 핸드폰도?"

"핸드폰도요."

제운이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말에 선유의 마음이 안도감에 젖었다. 일일이 다 보고 상처를 받는 것보단 아예 보지 못하는 게 나은 일이었고,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 매니저가 전하러 갔으니 곧 알게 되겠죠."

이어지는 제운의 말에 그가 긴 한숨을 내쉰다.

“정확히 어디 있어?”

가운데 사람을 두고 이야기 하려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를 직접 만나서 해명하고, 묻고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그녀에게는 낯선 일일 테니까.

그렇지만 같은 질문을 반복해도 제운은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 굳게 다문 입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어디 있냐고?”

거듭되는 채근에 제운이 마지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공평한 게 좋으니까. 같이 가죠.”

그렇게 말한 제운이 차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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