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원인은 한선유씨죠
63.
“아, 제운씨 왔어요?”
“소민씨 어디에요? 혹시 벌써 사람들이 왔어요?”
“네? 누가 와요?”
“내가 갈게요. 어디에요?”
“아, 여기 14층 스튜디오 앞인데요.”
“그럼 우선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을래요?”
“네?”
“그럼 금방 갈게요.”
여전히 다급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은 제운의 목소리에 소민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우선은 그의 말대로 엘리베이터 앞에 가서 서 있었다.
8층으로 올라온 엘리베이터에는 전화한 대로 제운이 서 있었다. 과연 그가 제운이라는 걸 알아 볼 수 있을까 싶게 꽁꽁 동여맨 상태이긴 했지만.
“어... 제운씨?”
“소민씨. 타세요.”
“네?”
반문하는 소민의 손목을 잡아끈 제운이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에 태웠다. 그리고 그녀를 엘리베이터에 태운 제운은 무슨 생각인지 자신의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더니 그녀에게 씌웠다.
그리고는 자신이 쓰고온 스냅백을 그녀의 머리에 씌우더니 자신은 후드티를 뒤집어 쓰는 것이었다. 그 모든 일을 끝낸 제운이 갑자기 느닷없이 모든 층의 버튼을 다 누르자 소민이 그의 손을 잡았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왜 장난을 하고 그래요?”
지금까지의 이미지와는 다른 제운의 행동에 소민이 묻자 제운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바라봤다.
“장난 아니에요.”
“장난이 아니면 이게 뭔데요? 이 에너지 낭비 때문에 여름에 땀을 한 바가지쯤 쏟고 싶어요?”
어린애 혼내 듯 자신을 혼내는 소민의 모습에 제운이 마스크 속에서 웃음 지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지만 아마 이게 그녀의 진짜 모습인 듯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처음 나오는 이런 모습이 그녀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즐기고 있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이제부터 조용히 해야 해요.”
“네?”
질문을 해도 엘리베이터가 가리키는 층수만 바라볼 뿐 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제운의 모습에 한숨을 쉰 소민이 결국 엘리베이터에 등을 기댔다.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멈추며 내려갔고, 그 덕에 내려가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러는 것도 잠시, 어느 순간 소민의 손을 잡아챈 제운이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 더니 비상구를 향해 달려 계단을 미친 듯이 내려갔다.
덕분에 소민도 턱을 덜덜거리며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얼마나 빙글대며 계단을 내려왔는지 마스크를 쓴 덕에 어지러워 침이 흘러나오는 걸 들키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2층이라고 표시된 계단참에서야 제운이 겨우 멈췄고 소민은 흘러나오려던 침을 후르릅 삼켰다.
“대체 어디 가는 건데요?”
그녀의 질문에도 제운은 검지를 치켜 입술에 갖다 댈 뿐이었다. 너무나도 긴박해 보이는 제운의 모습에 대체 이게 웬 뜬금없는 첩보영화 촬영씬인가 싶었지만 제운의 표정은 제임스본드마냥 진지했다.
그리고 그녀와 잠깐 멈춰 선 그가 어딘가로 전화했다.
“네. 유찬씨 저예요.”
유찬씨라면 제운의 매니저인데라고 생각하는데 제운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구겨지는 게 보였다.
“그럼 후문으로요. 빨리요. 2분 뒤에 나갈게요.”
그 말과 함께 제운이 전화를 끊었고 소민이 궁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소민씨. 조금 답답한 상황이 될지 몰라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제운의 말부터가 답답했지만 제운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지금 가게 되면 오래 걸릴 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 된다면 선유가 녹음을 끝마칠 때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그 두 가지였다.
“저... 한선유씨 매니저로 온 거예요. 한선유씨 일정 끝나면 같이 가야 하는데.”
그 말에 제운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 한선유씨 매니저가 곧 올 겁니다. 그러니까 한선유씨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해할 수 없는 제운의 말에 소민이 마스크 속에서 입술을 꼭 한 번 깨물고는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톡톡 찍었다. 그리고 소민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자마자 제운이 다시 소민의 손목을 잡았다.
“제가 셋하면 뛰어요. 알았죠?”
자신에게 손을 잡힌 채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민을 보며 마스크 안에서 제운이 다시금 씨익하고 소리 없이 웃고는 소민을 돌아보더니 낮게 외쳤다.
“하나, 셋!”
“으앗!!”
둘도 없이 하나 다음에 셋을 외친 제운 덕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소민이 제운이 이끄는 대로 달리기 시작했고, 뒷문에는 제운이 타고 다니는 밴이 아닌 웬 승용차가 문이 열린 채 대기 중이었다. 차를 향해 쉬지 않고 돌진한 제운이 소민을 차에 태우고는 자신이 타자마자 문을 닫았다.
“유찬씨. 출발해요.”
짙게 선팅된 차량이 방송국을 빠져나가고 소민은 방송국 앞에서 웅성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오늘 음악프로그램 촬영이 있나? 왠 사람들이 저렇게 많지?”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제운을 돌아봤다. 차 안에 와서야 자신을 가리고 있던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은 제운을 본 소민이 자신도 마스크를 벗고 제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이 상황 뭐예요?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빨리 답을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그녀의 모습에 제운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걸 전해줘도 될까 하는 얼굴로.
“대체 뭔데요? 저는 제운씨 믿고 이만큼 따라줬잖아요. 그러니까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제 알려줘요.”
“그 전에 소민씨 핸드폰 좀 줄래요?”
“제 핸드폰이요? 왜요?”
“그것만 주면 다 알려 줄게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며 소민이 자신의 핸드폰을 제운에게 넘기자 제운이 배터리 커버를 열더니 배터리를 빼내 버렸다.
“어? 뭐하는 거예요?”
배터리는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핸드폰만을 내민 그의 행동에 소민이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후회하지 마요. 나는 그래도 나름 캐스팅디렉터로서 여태까지 예의를 갖췄어요?”
“네?”
반문하는 제운을 향해 소민이 힘차게 자신의 머리를 날렸다. 그리고 제운은 대낮에 별이 자신에게 쏟아져 내리는 기이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
“괜찮아요? 미안해요. 그러게 그냥 얘기하고 끄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녀는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괜찮아요? 미안해요만 30번쯤 반복하고 있었다. 이미 진작에 통증이 사라진 제운이 괜찮다는 듯 웃어보였지만 소민은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그 손길이 좋은 제운은 그저 가만히 웃음만 지어 보였다.
“크흠.”
매니저인 유찬의 헛기침 소리에야 아쉬운 듯 소민의 손을 잡은 그가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저는 괜찮아요. 소민씨야말로 괜찮아요?”
제운의 말에 소민이 자신의 무릎에 있는 제운의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 봤다. 얼마 전 인터넷 검색어 1위를 장식했었는데 또다시 그녀가 검색어에 올라 있었다.
신문에는 ‘한선유, 한량이 꽃뱀에게 당할 때’라는 타이틀과 함께 여자 사진 하나와 또 다른 검은 실루엣의 여자모양 위로 흰색의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너무 걱정 말아요. 사실 아니니까 금방 해결될 거예요.”
제운이 또 다시 말을 걸었지만 그녀의 머리에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그것만이 궁금했다. 기사는 자신을 유명 여배우 A와 한선유의 사이를 갈라놓은 꽃뱀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인터넷 기사나 증권가 찌라시에서 자주 보던 B양이 된 기분은 실로 시궁창 같았다.
“근데 제운씨는 이거 어떻게 알았어요?”
“기획사들은 다 신문사에 전담 기자들 한 명씩 있어요. 가끔은 그쪽 사람들하고 기사 수위가지고 딜하기도 하고.”
“그럼 기자들은 이게 저라고 생각한다는 소리네요?”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제운을 본 소민이 실소를 머금었다.
“왜요? 기분이 그렇게 나빠요?”
“아니, 그냥요. 저는 연예인도 아닌데, 제 신상이 다 털릴 수도 있네요?”
“그냥 털린 거 아닌데요?”
“네?”
“소민씨 얼마 전에 한선유씨랑 화보찍었잖아요.”
“아... 설마...”
“원래 설마가 늘 사람을 잡는 법이죠.”
자신이 예전에 그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제운을 향해 소민이 쓰게 미소 지었다.
“결국 원인은 저였네요.”
“아니죠.”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제운에게 소민이 ‘그럼 누군데요?’라는 시선을 보냈다.
“원인은 한선유씨죠.”
“무슨...”
“한선유씨가 여지껏 카사노바처럼 지내고,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이라고 봐야죠.”
“그래도요.”
“괜찮아요. 제가 기획사 사장님한테 얘기해놨어요. 우리 사장님도 소민씨가 그런 사람 아닌 거 아니까 힘 좀 쓰신다고 했어요.”
“유사장님한테 그런 일을 하시라고 할 수는 없는데...”
“일종의 뇌물이에요.”
“뇌물이라니요?”
자신에게 무슨 뇌물이냐는 듯 쳐다보는 소민을 끌어안아 괜찮다고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제운이 말했다.
“앞으로도 저희 C엔터 잘 부탁한다구요. 소민씨가 캐스팅하는 작품마다 거의 대박 터지잖아요. 덕 좀 보자는 거죠.”
“그게 어디 제 덕인가요. 하시는 분들이 잘하셔서죠.”
제운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화를 낼 만도 한데 그러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는 소민이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무튼 일단은 한선유씨가 관련돼 있으니까 그쪽 소속사에서 손을 쓸 테고, 그럼 가라앉을 거예요. 그동안은 일반인인 소민씨만 시달리고 기자들 먹잇감이 될 수 있으니까 조금 잠잠해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봐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녀의 머리에 어떤 의문이 맴돌았다.
“근데 제운씨 촬영은 어떻게 하고 왔어요?”
제운이 고민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여자친구가 아프다고 하고 올라왔어요.”
“네에?!!! 감독님이 허락을 해주셨어요?”
“네.”
믿기지 않는다는 소민의 눈빛에 제운이 하하 웃었다.
“소민씨가 제 여자 친구라고 하니까 믿으시던데요? 가보라고 하셨어요.”
제운의 말에 소민의 입에서 헉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럼 어떡해요. 제운씨 지금 사고친 거 알죠?”
“네. 압니다. 안 그래도 유찬이한테 올라오는 내내 쿠사리 먹었거든요.”
“왜 그랬어요.”
“뭐가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되묻는 제운에게 소민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무리 모르고 몰라도요. 지금 제운씨가 갯벌, 아니지 똥구덩이에 스스로 몸을 던진 거라는 건 알아요. 지금 이 기사대로라면 저는 잘 사귀고 있던 커플을 헤어지게 만든 커플브레이커인 셈인데, 제운씨가 그렇게 말을 하면 어떡해요.”
“괜찮다니까요? 저희 기획사 사장님 실력 못 믿어요?”
“그런 게 아니잖아요.”
“소민씨. 너무 걱정 말아요. 그리고 나는 여태껏 어떤 트러블도 없이 청정하게 살아왔잖아요. 다른 사람의 허물도 정화시킬 수 있어요. 굳이 비교하자면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 같은 사람인거죠.”
“제운씨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잖아요.”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민을 향해 제운이 미소지었다.
“저 이유 없이 소민씨 도와주는 거 아닌데요?”
“네?”
“저도 지금 뇌물 바치는 거예요.”
뇌물이라는 소리에 소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운씨가 왜요? 작품욕심이 그렇게 많아요?”
“아니요. 작품 말구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고백을 하고 싶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녀에게 날름 고백을 한다면 그에게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혼란이 가중될 뿐이었다. 그렇게 비겁하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지금 이 상황이 가라앉으면 그 때 얘기해줄게요.”
“뭔데 그래요?”
자신의 욕심을 애써 내려놓으며 제운이 미소 지었다.
“소민씨가 깜짝 놀랄만한 일이 될 거예요. 어쨌든 내가 지금 뇌물 바친 거 잘 기억해 줘요. 나중에 내가 얘기해 줄 때 내가 뇌물준 거 감안해서 결정해줘요.”
제운이 그녀가 당분간 있을 곳이라며 호텔의 룸키를 그녀에게 넘겨줬다.
“내 이름도, 소민씨 이름도 아니고 유찬이 동생 이름으로 예약한 룸이에요. 아마 아무도 모를 거예요. 당분간 여기 있어요.”
빙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제운의 모습에 소민이 어설프게 따라 웃었다. 제운이 쉬라며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 끌며 방을 떠났지만 소민의 눈에는 그게 들어오지 않았다.
제운이 사라지자 제운을 따라 웃고 있던 입꼬리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그래, 정확히는 미치기 직전이다.
대체 이런 기사를 낸 게 누구일지, 무슨 의도로 이런 기사를 낸 것인지 알 수 없음이 답답했다. 그리고 선유는 지금 이 기사에 대해 뭐라고 할지 아니면 벌써 뭐라고 했을지 궁금했다.
무엇하나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더 없이 답답하게 느껴진 소민이 침대에 벌렁 누웠다.
“하, 현실은 시궁창인데, 침대는 드럽게 푹신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