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그녀를 사랑합니다
62.
“바라는 거요?”
선유의 말에 소민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진지함을 넘어서 심각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 채소민이 그랬잖아.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한다고. 지금 이건 무슨 목적이야?”
이용당한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제 마음 하나 너덜너덜해지는 거야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알고 싶었다.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래야 더 빨리 줄 수 있을 테니까.
“안 알려줄 건데요?”
“뭐? 왜?”
“알려주면 도망갈까 봐요.”
“어차피 여긴 내 집이야. 도망을 갔다가도 돌아오는 데야. 여기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선유의 답에 소민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지금은 안 알려 줄래요.”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왜 안 알려주는데?”
“한선유씨도 그랬잖아요.”
“뭐?”
“한선유씨도 나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안 알려줬잖아요.”
긴 속눈썹으로 눈 밑 언저리에 그늘을 드리우며 눈을 착 내리감은 그녀가 새치름하니 그렇게 말했다.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건가?”
“미천한 제가 어떻게 고귀하고 깊은 뜻을 가지신 한선유님께 복수를 하겠어요?”
누가 봐도 나 빈정 상했소하는 어투로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한동안 바라보던 선유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래. 그럼 안 묻도록 하지.”
“에?”
“답해 줄 생각이 없는데 뭣하러 묻겠어.”
돌려 말했지만 분명한 거절이었다. 답해줄 생각이 없으니 묻지 말라는.
일단 되는 대로 던져보자는 생각으로 던진 거긴 했지만 생각보다 단호한 철벽에 소민이 선유의 앞에 있던 접시를 낚아채고는 말했다.
“갑시다. 스케줄하러.”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휭하니 뒤돌아 나가는 소민의 뒷모습을 보며 선유가 쓴웃음을 지었다.
“도망가라니까. 말 안 듣네.”
선유의 앞에서는 씩씩한 척 돌아섰지만 소민의 눈가에는 어느덧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씨. 나는 뭐 자존심도 없는 줄 아나. 안 좋아해. 안 좋아하면 될 거 아니야.”
차문을 쾅 닫아 운전석에 앉은 소민이 앞을 노려봤다.
“채소민 멍청이. 안 좋아 하는게 하루 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마음 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걸 하겠다고 해가지고.”
가슴에 상채기만 늘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는 변명이 자꾸만 선유를 감싸고 돌았다.
“몰라, 준영씨가 해달라고 했으니까 하는 거야. 준영씨가 휴가 끝나고 돌아오기만 하면 모르는 척 할테다.”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우고 소민이 눈물을 말리려 눈을 부릅 뜨고 있을 때였다.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뭐예요?”
“내려.”
“왜, 왜요?”
금세 잊겠다고 해놓고 선유가 내리라고 하는 말 한 마디에 또 쫓아내는 건가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했잖아. 난 여자는 운전 안 시켜. 내려.”
다행히 내리란 말이 내 앞에서 사라져란 주문은 아니어서 삽시간에 또 안심이 된 소민이 뽀르르 보조석으로 갔다. 소민이 안전벨트를 한 것까지 확인을 하고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라디오 켜도 돼요?”
침묵을 지키는 선유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소민이 그렇게 묻자 선유는 고개만 끄덕했다. 선유의 허락이 떨어지자 소민이 손가락을 뻗어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 제운씨가 게스트로 나오는 건가?”
소민이 볼륨을 올리자 선유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볼륨을 낮췄다.
“왜 그래요? 제운씨가 뭐라고 하는지 좀 들으려고 하는데.”
“너무 시끄러워.”
낮게 중얼거리는 선유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소민이 귀를 쫑긋하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제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 새 작품을 하신다구요. 조연 역할이던데 만족하시나요?”
여자 진행자의 물음에 답하는 제운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나왔다.
“만족 못한다고 해야 재미는 있을 텐데... 만족합니다.”
“역시... 팬들 사이에서 무소유 제운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크게 욕심이 없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봐요.”
그 말에 크게 웃은 제운이 말을 받았다.
“제 팬들이 몰라서 그렇지. 저 욕심 많은데요. 그리고 이 작품은 또 이 배역에 제가 딱 어울린다고 말씀해주신 분이 계셔서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나거든요.”
제운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말고 또 누가 그런 말을 했을까 싶었다.
“배역에 어울린다고 말씀하신 분 때문에 더 잘하고 싶다... 제운씨 표정으로 봐서는 남자분은 아닌 것 같고, 여자분이세요? 그럼 여자친구?”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여자 친구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네요.”
“네. 여자 친구는 아니고 여자사람인 분. 그럼 제운씨가 좋아하는 건가요?”
“글쎄요?”
스피커 너머로 능숙하게 진행자의 말을 받아치는 제운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상하네. 제운씨 이 작품한다고 계약서 쓴 것도 얼마 전인데 나말고 또 누가 알고 잘 어울린다고 말을 했을까?”
소민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선유가 긴 팔을 뻗어 라디오를 꺼버렸다.
“어? 왜 꺼요? 그 사람에 대한 힌트가 나올 수도 있는데!”
“왜? 알고 싶어?”
운전 중인 선유가 고개는 여전히 전방을 주시한 채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궁금하잖아요. 같이 일도 했는데. 한선유씨도 예전에 그랬잖아요. 같이 일하던 사람이니까 누가 물어보면 답하려고 그런다고. 아, 혹시 한선유씨는 알아요?”
적색신호에 맞춰 떨어진 소민의 질문에 선유가 고개를 돌렸다.
“몰라, 알아도 안 가르쳐 줘.”
“와~ 알긴 안다는 소리네요? 누구예요?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알려줘 봐요.”
“조용히 해. 운전하는데 집중하게.”
그렇게 말한 선유가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누가 보면 운전면허시험이라도 보는 줄 알겠네.”
소민이 옆에서 꽁알거려도 선유는 전방만 주시했다.
“제가 많이 좋아하는 분이에요.”
제운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 눈빛.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전에는 그저 극중에서 연기할 때 봤겠거니 했다.
“거울에서 보던 눈빛이었어.”
선유가 낮게 중얼거렸다. 채소민을 생각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빛과 같은 빛을 띤 눈빛이었다.
라디오에서 얘기한 게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당당히 그 여자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소민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기분이 가라 앉았다. 저조한 분위기에 소민도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방송국에 도착한 선유가 자신을 따라 방송국 안으로 따라 들어오는 소민을 보며 말했다.
“여기 2층에 커피숍 있어. 가서 커피라도 마시던가. 시간 때워. 그게 싫으면 집에 가도 되고.”
“어? 왜요? 원래는 매니저가 옆에서 지켜보고 서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언제 끝날지도 모를 나레이션하는 장소에 너도 같이 있겠다고?”
“네.”
그렇게 말한 소민이 앞장서 걸어갔다. 소민의 답변에 선유의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졌다.
“왜? 김제운이 나오는 라디오 듣지?”
“나는 지금 한선유씨 매니저잖아요.”
떠보듯 한 말에 소민이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말할 수는 없어도 선유의 기분은 꽤 좋아졌다. 단순히 일을 부탁받아 곁에 있는 거긴 하겠지만 그가 제운보다 자신을 우선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선유가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을 위해 녹음실로 들어가고 소민은 선유의 목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와 달리 부드러운 얼굴빛을 하고 있는 선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스르르 미소가 나왔다.
“중증이네. 중증이야. 일관계라고 잘라내는 남자 목소리만 들어도 이렇게 좋으니.”
혼잣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며 선유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볼 때였다. 녹음에 방해가 될까 진동으로 바꿔둔 그녀의 핸드폰이 주머니 속에서 우웅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스튜디오를 벗어난 소민이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소민씨, 지금 집이예요?
“제운씨?”
- 지금 집이예요?
뜻밖에도 제운이 그녀에게 자꾸만 행방을 묻고 있었다.
“아니요. 저 M본부에 와 있는데요?”
- M본부요?
“왜요?”
- 급한 일이예요. 내가 갈 때까지 어디 숨어 있다가 20분 있다 내가 전화 하면 바로 현관으로 내려와요.
“네?”
- 꼭이요!
다급한 그의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기고 소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운씨는 목포에 있어야 하는데? 설마... 무슨 일이 생겼나?”
전화기를 한 번 내려다 본 그녀가 다시 스튜디오로 향했다. 제운이 숨어있으라고는 했지만 무슨 일인지도 알 수 없었고, 선유를 볼 수 있을 그 시간을 다른 데에 아깝게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다큐멘터리에 맞게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제운의 전화가 언제 있었는지도 모를 일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넋을 놓고 선유를 바라보는데 화면을 바라보던 선유가 고개를 들더니 그녀를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레이션.
“사랑, 이 짧은 두 글자가 순간이든 영원이든 얼마나 빛나는 말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겐 그녀가 무엇보다도 빛이 나나 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어떤 것보다 빛이 나는 존재, 그래서 그는 지금... 그녀를 사랑합니다.”
선유가 그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그저 다큐멘터리에 나레이션이라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솜사탕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지고, 너무 가벼워서 곧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소민을 보며 설핏 떠오른 것처럼 보였던 희미한 미소. 그 미소에 순간적으로 세상이 잠잠해진 듯, 그의 목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을 만큼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레이션에 높이 높이 솟았던 만큼 심장은 더 깊이 아래로 쿵하고 내려 앉았고, 그 만큼의 충격에 소민의 정신이 멍해졌다.
“웃은 건가? 아닌가? 웃었나? 그럼 왜 웃은 거지?”
멍한 정신을 애써 추스러 그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지만 그는 진지한 얼굴로 대본만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녀가 정말 그의 미소를 본 게 맞는지 궁금지만 지금은 궁금해도 물을 수 없었다. 그는 저 안에, 그녀는 이 바깥에 있으니까.
“이따가 나오면 물어보지 뭐.”
간신히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다시 나레이션에 집중하려고 할 때였다. 주머니 속에 핸드폰이 그녀를 불러댔다. 액정에 뜬 이름에 소민이 스튜디오를 나섰다.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 시간이 꽤 길어질 거란 사실을 전혀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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