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뭐 바라는 거 있어?
61.
“준영씨!!”
“소민씨!”
“안녕하셨어요.”
선유의 집에서 나오는 준영을 골목에 서 있는 빨간 스포츠카에서 내린 소민이 불렀다.
“딱 맞춰 오셨네요. 아니면 기다리셨어요?”
“아니에요. 지금 왔어요.”
“네. 안 그래도 어디쯤 오셨나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잘 됐네요.”
“그러게요. 그런데 어쩐 일로 연락하셨어요? 혹시 한선유씨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소민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망설이며 물었다.
선유가 들었다면 “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길 바라는 건가?”라고 대꾸했을 게 뻔했다. 그야 뭐, 선유는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데다 사람을 대하는 법에 대해 서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준영은 달랐다. 그가 선유의 곁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건 끈질긴 성격도 있지만 타고난 촉과 빠른 눈치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게 아니더라도 누가 봐도 소민의 모습은 썸 타는 사이인 여자가 남자를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온 듯 한 모습이었다. 물론 계기를 준 건 자신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어요. 아까 문자 받으셨죠?”
“네. 그래서 오긴 온건데... 한선유씨 일 때문 아니에요?”
“그것도 있긴 한데요. 여자친구한테 바람맞았거든요.”
“아, 준영씨 여자친구 있었어요?”
“네. 사실은 선유형님 코디요.”
속닥속닥 킥킥거리며 준영이 한 말에 소민이 또 한 번 놀랐다.
“정말요? 몰랐어요.”
“비밀연애니까요.”
“왜요? 한선유씨 때문에요?”
“아니요. 그냥 제 여자친구가 스릴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요.”
“아... 그렇구나.”
“아무튼 바람맞은 저랑 놀아 주세요.”
“네? 여자친구가 뭐라고 안 할까요?”
“제가 바람피는 것도 아니고 소민씨 얼굴도 아는데요, 뭐. 그럼 가시죠?”
그렇게 말한 준영이 앞장 서 소민을 이끌었다.
“어, 어디를요?”
“아, 그러네요? 음... 저녁 안 드셨죠?”
“아직이긴 한데...”
“그럼 저녁 드시러 가요.”
앞 뒤 설명 없이 준영이 끌고 온 곳은 시골 뒷골목의 허름한 고깃집이었다. 허름하긴 했지만 사람이 꽤 많은 터라 좁은 가게 안이 복작복작했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나는 맛집이 여기밖에 없어서 이리로 오시자고 하긴 했는데 생각이 짧았네요. 형님이랑은 편하게 왔는데 여자분이랑 오기에는 아무래도...”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런 분위기 좋은데요, 뭘. 근데 그... 한선유씨가 이런 데서 뭘 먹어요?”
“선유 형님은 이런 데 안 좋아할 것 같아요?”
“네? 뭐... 한선유씨라면...”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이내 눈꼬리를 잡아 올리더니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어디 이런 음식점에 날 데리고 와? 여기 스테이크는 되? 나보고 이런 걸 먹으라고? 와인은 있냐? 이럴 것 같았거든요.”
“풉! 안 똑같긴 한데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네요. 근데 그거 완전 오해예요.”
“오해요?”
“형님이 생긴 게 약간 부르주아 느낌에 귀공자 느낌이 나서 그렇지 얼마나 찌질인데요.”
“찌... 찌질...”
대놓고 자신이 케어하는 소속배우를 그렇게 표현하는 준영을 소민이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영은 태연자약하게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생긴 거나 성격이 찌질하다는 게 아니라 형님이... 음... 약간 자존감이 약해요.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죠.”
“한선유씨가요?”
“아닐 것 같죠? 센 척해도 사실은 그게 다 뻥이거든요. 자존감이 모자라니까 더 센척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쌀쌀맞게 굴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요?”
“네. 자기 얘기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오해도 많이 사는 편이고. 아무튼 그런데도 붙어있는 사람이 있으면 신기한 거죠.”
“그럼 준영씨는 엄청 신기한 사람이네요?”
“그런 셈이죠. 그런데 그렇게 신기하게 붙어있으려면 선유형님을 어지간히 좋아하지 않고는 힘들거든요.”
“그렇겠죠.”
소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소민을 보며 준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근데 그건 소민씨도 마찬가지죠?”
“네?”
준영의 말에 소민이 놀라 되물었다. 그런 소민의 앞 접시에 이제 막 익은 고기를 잘라 옮겨 주며 준영이 소민을 바라봤다.
“저희 형님한테 포기하지 않고 잘 붙어 있었잖아요. 단순히 일 때문이에요?”
“그... 그게... 어... 음...”
소민이 당황하여 준영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자 자신의 기대대로 예상 행동을 보이는 소민을 음흉한 미소를 띠고 보던 준영이 이내 표정을 바꾸고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아, 제가 주제 넘었네요. 오늘 뵙자 그런 이유는 따로 있었거든요.”
준영이 능구렁이처럼 화제를 전환하자 소민이 생각에서 벗어나며 물었다.
“뭔데요?”
“부탁드릴 게 있었거든요.”
소민에게 귀 좀 빌려달라는 시늉을 하는 준영의 행동에 소민이 귀를 갖다 대자 준영이 뭐라 뭐라 속삭였다.
“네?”
“부탁 들어 주시면 누님으로 모실게요. 제가 형님 모시듯이 충성할게요. 제발 들어주세요.”
“아, 아니... 그래도... 괜찮아요?”
사실은 꽤나 혹했다. 거절하고 싶지 않은 기회지만 혹시나 선유가 싫다고 쫓아내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네. 괜찮아요.”
그녀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준영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소민이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준영에게 부탁받은 거긴 했지만 막상 하려니 덜컥 걱정이 앞섰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삑삑삑삑. 삐리리- 열렸습니다.’
솔톤의 여자음성과 함께 미지의 세계가 철컥하고 열렸다.
‘삑삑삑삑. 삐리리- 열렸습니다.’
하는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선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휴가라던 준영이 걱정이 돼서 온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휴가라던 말이 거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챙기는 그의 태도에 흡족한 마음에 마중을 나간 길이었다.
“김준영, 오늘 휴가라더니 어쩐...”
“꺄아아아아악!!!!!!!!!”
“뭐, 뭐야!!”
소민이 8옥타브를 건너뛴 솔음으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아섰고, 뜻밖의 등장인물에 선유는 돌처럼 굳어 서 있었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지, 지금 그게 중요해요? 빨랑 옷 안 입어요!!”
정신이 번쩍나게 하는 소민의 짜랑짜랑한 목소리에 허겁지겁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심장이 곧 바깥으로 나오기라도 하려는지 거칠게 갈비뼈를 노크하는 기분이 들었다.
“채, 채소민이 왜 내 집에 있어?”
멍한 머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선유가 테이블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어 사건의 원흉, 매니저 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파에 누워 영화를 보던 준영은 선유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 한 전화기를 뒤집어 소리를 죽였다.
“형님, 도와주면 좀 받으세요. 그렇게 자꾸 뒤로 빼서 죽기 전에 결혼은커녕 연애나 하겠어요?”
“선유 오빠야?”
“어. 숟가락으로 떠서 입 앞에 갖다 줘도 못 먹고 난리 블루스다.”
화장실에 갔다 와 말끔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자신의 여자 친구를 준영이 잡아끌었다. 준영이 끄는 대로 딸려온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혀를 찼다.
“으휴, 선유 오빠 바보.”
“됐어. 우리는 우리끼리 놀아. 이게 얼마 만이냐.”
준영이 자신의 여자 친구이자 선유의 코디인 하나를 끌어안으며 말했고, 하나는 킥킥거리며 준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선유가 받지 않는 전화기 너머 준영을 향해 절규할 때였다.
‘똑똑똑’
“언제 나와요?”
“왜, 왜?”
“스케줄 안 갈 거예요?”
“내, 내 스케줄을 왜 당신이 걱정하는데?”
“왜긴 왜예요. 준영씨가 휴가간다고 나더러 대신 매니저 일 좀 해달라던데요?”
소민이 집에 들어 왔을 때부터 설마 설마했지만 준영이 정말 소민에게 부탁을 하고 갔다는 말에 선유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일단 기다려. 옷 갈아입고.”
“그래요.”
소민의 답에 선유가 무너지듯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다가는 스케줄을 늦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린 선유가 겨우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오자 소민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간 건가 싶었는데 주방에서 달그락달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하니 소민이 까치발을 하고는 찬장에 있는 그릇을 꺼내려 낑낑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러다 다친다.”
소민의 뒤로 다가간 그가 손을 뻗어 소민이 꺼내려 하는 그릇을 꺼내주며 그렇게 물었다. 갑작스런 선유의 목소리와 등장, 그리고 그보다 더 자극적인 뒤에서 안기는 듯 한 모양새가 된 자세에 멈칫 굳었던 소민이 이내 태연스레 그 굴레를 빠져 나오며 선유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저기 앉아요. 거의 다 됐거든요.”
“뭐가?”
선유의 물음이 들리지도 않는지 소민이 이리저리 싱크대 찬장을 열었다 닫았다 분주히 움직였다.
“내 집에서 뭐 하는 거야?”
“뭐 좀 찾고 있어요.”
“뭐 찾는데?”
끈질긴 선유의 질문에 몸을 숙여 찬장을 뒤지던 소민이 허리를 펴고는 선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잼이나 버터 같은 거 없어요?”
“잼? 버터? 없을걸. 근데 그건 왜?”
“뭐라도 먹고 나가야죠.”
선유의 말에 찬장을 닫은 소민이 선유가 꺼낸 그릇에 무언가를 담아 그의 앞에 내왔다. 그러고 보니 뭔가 달콤하면서도 구수한 듯 한 향이 나고 있었다.
“뭐, 밥을 먹고 나가긴 시간이 촉박하고 일단 이거라도 먹어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빙그르 돌아 냉장고로 가더니 중얼거렸다.
“주스가... 음... 없네. 주스가 없으면 우유!”
그렇게 조잘거린 소민이 우유를 꺼내오더니 잔에 가득 따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버터나 잼이 있으면 좋은데 어쩔 수 없죠. 아무튼 우유랑 먹어요. 꼭꼭 씹어서.”
그렇게 말한 소민이 선유의 앞에 내어 놓은 것은 잘 구운 토스트였다.
“이건... 왜?”
의아하게 묻는 소민에게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말했다.
“먹어야 힘이 나죠. 힘이 나야 촬영이든 뭐든 스케줄을 잘 할 거구요. 빨리 먹어요.”
소민의 말에 물끄러미 토스트를 내려다 보던 선유가 물었다.
“채소민은 안 먹나?”
“전 원래 아침 안 먹어요. 드세요. 저는 드시는 동안 준영씨가 의상체크 부탁한 거 확인하고 있을게요.”
“나 혼자 이걸 먹으라고?”
“그럼 혼자 먹지 먹여드려야 해요?”
“같이 먹어. 먹고 죽지는 말고.”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 말 몰라요? 잘 먹고 죽으면 다행인거죠. 아, 이게 아니라 내가 요리로 테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먹고 죽긴 왜 먹고 죽어요? 안 죽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그래. 너는 다르지.”
선유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소민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다만 선유가 짓는 쓸쓸한 표정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소민이 다시 앉았다.
“아, 알았어요. 같이 먹어 줄게요. 근데 많이는 못 먹어요. 원래 안 먹어 버릇해서.”
“먹고 다녀. 몸에 안 좋아.”
“어? 지금 내 걱정해주는 거예요?”
“과학적인 사실을 말하는 거야.”
“그래요. 근데 지금 나 하나 더 알려준 거예요.”
“뭐?”
“나 아침 안 먹고 다니는 거요. 나에 대한 정보 하나 더 알려 줬다구요.”
그렇게 종알거리며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무는 소민을 선유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한테 왜 그래?”
“뭐가요?”
“뭐 바라는 거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