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60화 (60/105)

60. 알고 싶어졌어요

60.

“그래서?”

아까와 같은 질문. 네가 싫어한다면 부르지 않겠다는 듯 묻는 선유를 향해 소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다고?”

싫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서 그의 체취가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해서 흥분됐다. 그리고 그에 반응해 무섭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가 들릴까봐 겁이 났다.

“왜... 내 이름 부른 거예요? 여자 이름 안 부른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소민을 선유가 꽤나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묻지 마. 안 가르쳐 줄 거야.”

정면을 응시하며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목소리는 지난 번처럼 선을 긋고 있었다. 소민이 선유의 옆모습을 봤다.

“왜요?”

궁금했다.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물어도 답을 해주지 않겠다는 이유가 뭔지. 새삼스레 그리고 단 몇 초만에 갑자기 태도를 바꿔 그녀와 선을 긋는 이유는 뭔지.

정면을 응시하던 선유가 고개를 돌렸다. 선유를 바라보던 소민의 시선과 선유의 시선이 정면으로 맞닿았다.

“알면 정 떨어질까봐.”

“누구한테요?”

“나한테.”

“왜요?”

선유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다 이내 손을 뻗더니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입을 열었다.

“안 알려준다고 했잖아.”

지독히도 씁쓸한 그 말투에 소민이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입술로는 선을 그으면서도 그 손길은 금을 긋는 선과는 다르게 다정해서 소민은 그 모순된 감정의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그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지만.

“비겁하네요.”

“그래서 욕할 거야?”

뭔가를 말하려는 달싹이던 소민의 입술이 이내 닫혔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소민에게 뻗어있던 손을 거뒀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선유의 손을 소민이 다시 잡았다.

“욕을 왜 해요. 생각해보니까 한선유씨 못지 않게 나도 비겁한데.”

“뭐가?”

“비밀이에요. 우리는 예전부터 기브 앤 테이크인 사이잖아요. 내 비밀이 궁금하면 한선유씨도 말해줘요. 왜 내 이름 불렀는지.”

그 말에 선유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내 답했다.

“아니. 됐어. 서로 못 들은 걸로 하지.”

“이럴 거면 내 이름을 왜 불러요? 궁금하게.”

“그거라도 말해야 속이 뚫릴 것 같아서.”

선유의 말에 소민이 약간은 허무한 표정으로 선유를 노려봤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이 설레는 것까지는 맞지만 그에게는 그런 의미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민은 그 상태로 멀쩡한 얼굴로 안녕하고 인사할 수는 없었다.

“한선유씨 속 시원하자고 그런 말 했다고요? 여자 이름 안 부른다던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는데 나는 어떨 것 같아요? 한선유씨 논리대로 생각하면 넌 여자도 아니다 하는 건데.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나 주민번호 앞자리 2로 시작하거든요?”

“미안하군.”

“그게 끝이에요?”

“그래.”

선유의 말에는 미련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선유를 가만히 쳐다보던 소민이 입술을 한 번 앙다물었다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그럼, 좋아요.”

“뭐가?”

“기브 앤 테이크라 그랬잖아요. 나도 속 시원할지 안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는 말해야겠어요.”

선유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기세 좋게 시작했지만 망설이던 그녀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 당신이 많이 궁금해요. 막 계속 알고 싶어요. 무 말고 못 먹는 건 없는지. 또... 나한테 키스는 왜 했고, 그 다음에는 왜 나한테 차갑게 구는지 아니, 당신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고 싶어졌어요.”

선유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고 생각을 숨기지 않고 다가오려 하는 소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마 이런 식으로 계속 소민이 다가오면 그는 순순히 그녀에게 항복할 지도 몰랐다. 아까처럼.

소민이 그런 상태만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터였다. 하지만 맹수 앞에 떨고 있는 어린 짐승 같은 그녀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래,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단둘이 차 안에서 있는 상황은 피했어야 했다. 그녀 말대로 그녀의 차로 데려다 줬으면 그만이었을텐데...

한 번 잡은 온기를 조금 더 바란, 그의 욕심이 지금 이 상황을 초래했다. 소민이 그에게 더 다가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됐다. 자신의 욕심을 잘라내기라도 하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가 몸을 물리며 지금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해 하지 마. 어차피 일 때문에 만난 거였으니까.”

그렇게 말한 그가 잡을 시간조차 없이 빠르게 차에서 내리더니 멀어졌다. 그리고 선유가 걸어가는 모습을 소민이 바라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내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에요.”

그녀는 지금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요. 거짓말 했어요. 나는 당신이 궁금한 정도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한선유씨, 당신. 잘못 걸렸어.”

선유가 앞에 있는 듯이 소민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당사자 모르게 선전포고가 이뤄졌다.

*

“김준영.”

“헉! 형님.”

“뭐하다 그렇게 놀라냐?”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뭔데? 뭔데 그렇게 뒤로 숨겨?”

“수, 숨기기는요.”

요 며칠 준영이 영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줘 봐.”

학생 주임선생님처럼 단호한 선유의 말투에 준영이 쭈뼛거리면서도 뒤에 숨겼던 것을 내 보였다.

“뭐야? 네 전화기잖아. 이게 뭐라고.”

“그러니까 숨기는 거 없댔잖아요.”

눈을 영 마주치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준영을 선유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었다. 그렇다고 개인 사생활이 있는데 매니저더러 폰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고. 결국 포기한 선유가 뒤로 물러났다. 용건은 그게 아니기도 했으니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잊겠다고 했지만 내내 머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약속을 어기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지지 않는다면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게 뭐가 됐든.

“됐고. 뭐 좀 알아봐라.”

“또 뭘요?”

“민시준.”

선유의 말에 준영이 순간적으로 음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지었다. 선유가 그걸 왜 조사하고 싶은지는 알지만 괜스레 한 번 놀려보고 싶어졌다.

“민시준은 왜요? 설마... 민시준이 형이랑 사귄다고 스캔들이라도 냈어요?”

놀리는 게 분명한 준영의 태도에 선유가 삐딱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헛소리 하고 있다.”

선유의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준영의 얼굴에 떠오른 뺀지름한 웃음기는 거둬지질 않았다.

“그럼 왜요?”

“마음에 걸려서...”

“소민씨가요?”

정곡을 찌르는 준영의 말에 선유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헛다리 짚지 마라. 난 괜히 찜찜한 사람이랑 엮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 뿐이야.”

“근데 제가 알아보려면 자리를 비워야 할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내일도 스케줄 있고 모레면 소민씨가 캐스팅한 그 드라마, 그거 촬영 들어가잖아요.”

“어차피 촬영 현장에만 있을 거니까. 나 촬영할 때 너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선유의 말에 준영이 왠지 신이 난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만약에 상황을 대비해서 제가 대타 한 명 구해놓고 갈게요. 어차피 내일부터 저 휴가라서 대타 구하려던 참이거든요.”

“왜 네가 휴가야?”

“저도 좀 쉬어야죠. 지난 번에 형님 스캔들 막을 때 저 휴가 주신다 그랬잖아요. 오늘 안에는 틀림없이 대타 구해 놓을 테니까 걱정마시고요.”

준영의 말에 선유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스케줄 끝났는데 퇴근할게요.”

“뭐? 벌써? 나 심심해.”

“뭐가 심심해요.”

“집에 아무도 없어.”

“형님 계시잖아요.”

“나 말고 아무도 없다고.”

“당연하죠. 그게 싫으시면 친구를 사귀시든가요.”

“라면 먹고 갈래?”

태연스레 묻는 선유의 말에 준영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형님. 앞으로 어디 가서 함부로 라면 먹고 가라는 말 하지 말아요.”

“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렇게 되묻는 선유의 모습에 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집, 사무실, 집, 샵, 집, 헬스장, 집, 스케줄만 왔다갔다하는 선유에게 라면 먹고 갈래는 생소한 정보이리라.

“형님. 그건 말이죠...”

준영이 단 둘이 있음에도 속닥거리며 귓가에 속삭인 말에 선유의 눈이 커졌다.

“아, 소름! 그럼 내가 방금.”

입을 다물었다 벌렸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선유가 이내 준영의 등을 밀며 쫓아냈다.

“알지? 그런 뜻 조금도 없는 거. 내가 미쳤냐? 나 여자 좋아해. 알지?”

“그럼요.”

그렇게 대답하며 준영이 낄낄거렸다.

“여자 엄청 좋아하시죠.”

놀리는 게 분명한 준영의 말에 선유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즉는드.”

“아 참, 내일 스케줄에 입을 옷은 드레스룸에 걸어놨어요.”

“왜? 내일 하나 같이 갈 거 아니야?”

스케줄에 입을 옷은 으레 코디가 챙겨줬는데 뜬금없는 준영의 말에 선유가 묻자 준영이 태연스레 말했다.

“하나씨도 휴가요.”

“야, 지금 장난해? 네들 쌍으로 지금 나 왕따 시키냐?”

“저희가 어떻게 그래요. 누구 덕에 먹고 사는데요.”

“놀리냐, 지금?”

틱틱거리는 선유의 말에 준영이 손을 쫙 펴 보였다.

“그럴 리가요. 이만 가겠습니다. 형님. 그럼!”

약이 오른 선유의 모습을 감상하며 상쾌하게 작별을 알린 준영이 유유히 선유의 집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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