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59화 (59/105)

59. 여자 이름... 안 부른다면서요

59.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낯익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 한선유였다. 그 목소리에 시준이 소민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여전히 팔목은 붙잡은 채였다. 겨우 고개를 든 소민의 눈에 선유의 뒤에선 준영과 서 있는 선유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까 하는 기대감이 한순간 눈에 어렸다. 하지만 무감하다 못해 서늘한 빛을 띠고 있는 것 같은 선유의 눈빛에 순식간에 기대감은 스러지고 스러진 기대감과 함께 소민은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시준의 인사에 살짝 고개를 끄덕한 선유의 시선이 소민과 시준을 훑고 지나갔다.

워낙에 변죽이 좋은 편인 시준이었지만 저 서늘한 눈빛은 그런 분위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물었는데.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아, 이 쪽은 채소민이라ㄱ”

“알아.”

“예?”

“안다고.”

“아... 맞다. 선배님 캐스팅했다고 했죠. 들었는데 잊었네요.”

대수롭지 않은 얘기여서 잊었다는 투에 뒤에 선 준영마저 눈살을 찌푸렸는데 선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히 한 가지만을 거푸 되물었다.

“세 번째로 묻는 것 같은데... 여기서 뭐하는 거지?”

“아! 저도 이 사람이랑 아는 사이거든요. 우연히 여기서 만나게 돼서 인사를 좀 하느라구요.”

시준의 말에 자신을 무시하는 듯 한 발언에도 움직이지 않던 선유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인사를 하는 사람의 분위기라고 보기엔 지금 소민의 상태는 꽤나 불안해 보였다. 그리고 묘하게 소민을 무시하는 시준의 말투도 짜증스러웠다.

“무슨 인사?”

잠시 구겨졌던 미간을 다시 말끔하게 편 선유가 물었다.

“아, 일전에 신세를 져서 감사인사를 하려구요.”

시준의 말에 준영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시준은 소민에게 감사인사를 하려고 했다지만 분위기로 봤을 때 소민은 인사를 나눈다기보다는 지금 이 자리를 불편해 하는 듯 보였다.

준영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보이는 소민을 돕고 싶었지만 선유가 소민을 도와 줄 지는 미지수였다. 선유가 계약을 한 이후 소민과 거리를 두려 애쓰고 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도와주지 않을 가능성도 꽤나 컸다.

더군다나 자기가 결심해놓고도 꽤나 쉽지 않은 일인지 최근 선유의 분위기는 서늘하다 못해 마치 영하 이십도의 냉동창고를 24시간 풀가동하는 느낌인지라 준영은 내내 조마조마한 중이었다.

시준의 말에 선유가 고개를 모로 틀었다. 감사인사를 받는 사람이 불편해 보이는 걸 넘어서 도망가고 싶어 보이는 상황을 그냥 넘어가야 하는 걸까. 아니 그걸 떠나서 채소민이 저렇게 있어도 멀리해야 하니까 무시해야 하는 걸까.

시준의 말에 시선을 돌리려던 선유의 눈에 소민이 들어왔다. 소민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다 못해 파르라니 얼어있는 듯 긴장한 피부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소민의 팔을 잡고 있는 시준의 손까지.

다시 고개를 바로 한 선유가 시준을 바라봤다.

“착각... 한 것 같은데?”

“예?”

시준의 말에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선유의 다음 말에 소민의 고개가 번쩍 올라갔다.

“........... 나 때문이거든.”

그렇게 말한 선유가 교묘하게 시준이 소민의 팔목을 잡고 있는 쪽으로 들어가 소민의 어깨를 감싸 품에 안으며 소민과 시준 사이에 벽처럼 서서는 말했다.

“이.분.이. 나를 이 드라마에 캐스팅한 캐스팅 디렉터시거든. 감사인사를 하려고 내가 약속을 좀 잡아달라고 했는데 오늘이면 말을 했어야지. 김준영.”

분명히 질책하는 톤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준영은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미소를 참으려 애쓰며 배우의 매니저다운 연기력을 뽐냈다.

“아! 죄송합니다. 형님. 소민씨께서 먼저 오실 줄은 몰라서...”

선유와 준영이 나누는 대화에도 소민은 그저 정신이 멍했다. 시준이 자신을 불러 달라 했을 것이란 것은 자명했다. 감독은 분명 조연 배우가 불렀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준영은 자신에게 연락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유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아마 곤란한 자신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꺼진 줄 알았던 기대감은 선유가 불어넣은 단 한톨의 입김에 그녀를 태울 듯이 커졌다.

“아니. 그럴 리가요.”

“뭐가?”

“선배님이 채소민씨를 불렀을 리가.”

“무슨 의미지? 그 말은 내가 감사인사도 모르는 안하무인이라는 의미로도 들리는데?”

입구에 선 준영은 실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감사인사를 모르는 건 맞으면서 무슨 시치미인지. 여하튼 소민을 돕는 선유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으니 자신도 한 배를 탄 입장이고 선유의 일에 굳이 어깃장을 놓을 이유가 없으니 준영은 잠자코 뒤에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선유가 남에게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라 흥미가 동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불러달라고 한 건 저였는데.”

“아까 우연히 만난 거라고 하지 않았나?”

“사실은 제가 감독님께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그래? 그러면 물어볼까?”

자신만만한 선유의 목소리에 소민이 자신을 든든하게 바치고 선 그를 올려다봤다.

“여기 민시준씨 만나러 오신 겁니까?”

선유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한마디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그런 선유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래, 애시당초 감독과의 약속은 핑계였다. 그녀가 만나고 싶었던 건 선유였으니까 거짓말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민의 고개가 살며시 좌우로 흔들렸다. 느리지만 분명한 그 움직임에 선유가 소민을 더욱 품에 당겨 안아 시준의 시선에서 그녀를 완벽히 차단하고는 말했다.

“봤지? 아니라는군.”

오만하게 턱을 들어 올린 선유의 행동에 준영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치 자기가 유리한 상황이라고 뽐내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선유의 지금 저 태도는 제 사람을 지키려는 행동이기에 유치한데 마냥 유치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감독님이 약속을...”

“그래. 부탁은 부탁이지. 근데 그 약속 본인이 잡은 건가?”

선유의 찬 음색에 시준이 꼬리를 말았다.

“아, 아닙니다.”

“난, 내 측근이 직접 약속을 잡아줬는데. 누가 더 확실할까?”

“그건...”

말끝을 흐리는 시준에게서 선유가 미묘하게 거리를 벌렸다.

“그럼 올라가 봐.”

“선배님은...”

“말했을 텐데? 감사인사를 하려고 불렀다고. 알아서 감사인사하고 올라갈 테니까 올라가. 준영아, 감독님께 양해 전화 좀 드려.”

“예. 형님.”

시준은 아예 어길 수는 없는 선유의 말에 쭈삣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감사인사를 하겠다며 시간을 버는 선유의 말은 매니저인 준영에게 양해전화를 하라는 말로 쐐기가 박혔다.

준영의 대답에 선유가 소민의 어깨를 감싼 채로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자 준영이 감독에게 전화를 하며 느릿느릿 뒤따랐다.

“뭐 저딴 새ㄲ”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소리에 준영이 고개를 돌렸다. 준영의 눈에 시준이 그를 보며 웃는 표정을 지으려 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닌 척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 분명한 소리였다.

“들으라고 한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준영의 눈이 매섭게 시준을 바라보다 이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감독의 목소리에 스윽 돌아갔다.

“네. 감독님. n기획사입니다. 한선유씨 소속사요.”

*

“놔, 놔줘요.”

“본인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는 걸 모르나본데 가만히 있어. 부축해주고 있는 거니까.”

결국 그녀를 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로 선유는 그녀를 자신의 차로 이끌었다.

“왜 이리로 와요?”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데?”

“당연히 제 차로 갔어야죠.”

“당신 차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감사인사를 하려고 불렀다고 했는데 혹시라도 당신 차가 그냥 가는 걸 보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야?”

선유의 말에 소민이 순순히 그의 차에 올라탔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그...”

“저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동시에 입이 열렸다 이내 맞부딪힌 서로의 음성에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저기... 고마워요.”

소민이 먼저 그 침묵을 깼다.

“뭐가?”

“도와줘서요.”

“별로.”

선유의 말에 소민이 다시 입을 꼭 다물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잘 지냈나?”

이번엔 선유가 침묵을 깼다. 단 며칠사이일 뿐인데 선유는 어지간히도 화젯거리가 없었는지 그렇게 물었다.

“나름대로요.”

“그래? 지금 그 상황을 제외하곤 잘 지냈다는 말인가 보군.”

“네? 뭐...”

쉽사리 떠나갈 생각이 없는 어색한 침묵이 자꾸만 찾아왔다. 그와 있을 때면 수시로 티격태격했는데 이런 상황은 낯설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망설이던 소민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한없이 어색하게.

“잘... 지냈어요?”

“아니. 잘 지내지 못했어.”

선유의 답에 대뜸 걱정이 밀려왔다.

“왜요? 설마 또 무라도 봤어요? 아니면 어디 아팠어요?”

소민의 질문에 선유가 미간을 구겼다.

“내가 못 지내면 이유가 꼭 무이거나 아파야 해?”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한선유씨에 대해 아는 게 그거 뿐이잖아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선유가 싫었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말을 하던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은 다시 물었다.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럼 하더니 오늘은 왜 도와준 거예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뭐가요?”

“그래서 싫어?”

“시, 싫은 건 아닌데... 그런 모습 보인 게 맘 편하진 않네요.”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소민을 향해 선유가 툭 뱉었다.

“괜찮아.”

“네?”

“괜찮다고. 당신도 내 추한 몰골 봤잖아. 내 치명적인 약점도 알고. 나도 당신 과거의 아주 일부를 봤을 뿐이야. 잘 알지도 못하고 분위기만 보고 그런 거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마. 그것까지도 신경쓰인다고 하면 그것도 잊어줄

테니까.”

선유의 말이 머리에서 윙윙 울렸다.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헷갈렸다. 그가 잊어주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지.

“정...말이에요?”

“그래.”

어렵사리 물은 소민읠 질문에 되돌아온 답에 소민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소민을 한 번 바라본 선유는 그녀가 걱정을 한다고 생각한 건지 뒷 말을 덧붙인다.

“그쪽이, 아니 채소민이 싫다 그러는 걸 굳이 기억하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해.”

선유의 입에서 갑작스레 나온 자신의 이름에 소민이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여자 이름... 안 부른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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