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둘이 뭐하는 거지, 여기서?
58.
“야. 너 요새 왜 그러냐?”
“뭐가?”
그렇게 묻는 소민을 민규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뭐라 그랬냐? 너 정말 어디 아파?”
“왜 그러는데?”
“내가 일일이 짚어줘?”
민규가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나 소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소민이 쥐고 있는 숟가락을 뺏은 민규가 숟가락을 뒤집었다.
“너 지금 밥을 밥 퍼먹는 데가 아니라 손잡이로 먹고 있거든? 숟가락을 잘못 놓은 내 잘못도 있지만 그것도 제대로 못 잡아서 그러고 있냐?”
“다른 생각하다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
“너 요새 계속 다른 생각 중이잖아. 뭔데? 뭔데 그렇게 정신이 나간 상태냐고.”
민규의 말에 소민이 민규를 한 번 쳐다보고는 국을 떠 입에 넣었다.
“아, 말을 해. 말을!!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멍 때리고 있다가 한숨을 쉬지를 않나. 폼 클렌저로 양치하고 치약으로 세수를 하질 않나. 네가 요새 이상한 게 한 두 개가 아닌데 왜 그러냐고. 설마...”
“설마 뭐.”
애써 태연하게 굴었지만 다음 이어지는 민규의 말에는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 문제냐?”
과연 이걸 남자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 대답 없는 소민의 태도에 오히려 민규는 확신한 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말했다.
“맞네. 맞아. 대체 누구냐? 천하의 채소민이 이렇게 동요하는 걸 보면 빠져도 꽤나 푹 빠진 건데.”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계약이 안 되냐? 왜? 한선유가 계약 안 하겠다 그래?”
“안 그랬어.”
민규의 물음에 소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뭔데?”
“한선유 계약은 끝났어. 이미 했다고. 그냥... 그냥... 그 계약 끝나고 다음 일이 없어서 그런 거야. 신경 꺼.”
다시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는 소민의 모습에 민규가 미심쩍은 눈빛을 보였지만 소민은 일부러 더 열심히 밥을 먹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잊어야 했다.
밥을 먹고 방에 들어와서 오랜만에 인터넷 연예뉴스를 봤다. 선유가 그 드라마를 하기로 확정했다는 소문이 파다해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마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왠지 보고 싶지 않았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네. 들어오자마자 딱 보이냐. 어떻게.”
간만에 들어간 연예란에는 선유가 출연을 확정 지은 드라마의 대본 리딩이 있다는 기사가 메인에 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저 일관계로 만난 사이였다. 당연히 계약이 끝나면 자연스레 멀어질 수 있는 관계였다. 그럼에도 그녀보다 더 냉정하게 자른 선유에게 섭섭했다. 아니...
“보고 싶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소민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막았다. 아무도 없는 방인데도 누가 들었을까 놀랐고,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에 놀랐다.
“아니야. 이건 내 머리가 한 소리가 아니야.”
통제를 벗어나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선유가 촬영을 하기로 한 드라마의 감독이었다.
“아, 네. 감독님.”
- 어. 소민씨. 고마워. 덕분에 우리 대본 리딩하거든. 기사도 떴는데.
“아... 네... 봤습니다. 고생하시네요.”
- 고생은 무슨. 아직 갈 길이 구만리인데.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한...선유씨 스케줄이나 일정은 소속사에서 맡기로 한 걸로 아는데요.”
- 어? 한선유씨 말고 여기 조연 맡은 배우랑 얘기하다 한배우 캐스팅을 소민씨가 했다고 하니까 자기도 소민씨 안다고 하더라구. 예전에 소민씨 덕 좀 봤다고 인사 좀 하고 싶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 선유가 자신을 찾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감독의 말에 한 순간에 훅 사그라졌다. 솟아오르는 실망감을 애써 숨기며 소민이 밝은 척 목소리를 냈다.
“에이... 뭘 그런 걸로 연락을 주고 그러세요.”
- 본인이 굳이 인사를 하고 싶대. 내가 우리 드라마 출연하는 배우를 기를 쓰고 뜯어 말려야 뭐해. 본인 마음이 그래야 편하다는데.
감독의 말에 소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며칠간 자신이 왜 이런 상태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지만 결론은 늘 같았다. 처음엔 분명 캐스팅디렉터로서 접근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인간 채소민이 자꾸만 나왔다.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했는데 그에게 자꾸 휩쓸렸다. 마치 허리케인 한복판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느낌이랄까.
“그럼... 따로 만나 뵐게요.”
- 뭐 하러 그래? 대본리딩 끝나면 간단하게 저녁도 먹고 할 건데. 같이 먹자고. 나도 소민씨한테 한 턱 내야 하는데 따로 시간 내긴 어려울 것 같아 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찾아 뵐게요.”
- 그래. 그래. 이따 오후 3시쯤 대본 리딩 할거야. 배우들 서로 인사 하고 그 다음에 리딩하고 회식할 거니까. 편한 시간에 와. 미리 와서 인사해도 좋고. 장소는 내가 조연출한테 문자하라고 할게.
감독과의 통화 후 얼마 안 있어 조연출이라는 사람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고, 문자에서 일러준 장소에 도착한 소민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비겁해, 채소민. 감독님 전화를 핑계 삼아서 여기 이러고 있고. 뭐 하는 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것 뿐인데도 심장은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꼭 소풍가기 하루 전처럼.
“채소민.”
심장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는 소민의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민이 돌아봤다.
“어? 한혜민?”
혜민이 소민과 함께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에 타면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아. 감독님이 부르셔서.”
“맞다. 네가 한선유 캐스팅했지?”
“그건 아닌데 다른 일 때문에. 너는?”
“나도 이 드라마 출연하기로 했거든.”
“그런 얘기 없었잖아.”
“며칠 전에 확정지었어. 나 나온다고 연예란에 한 동안 떠들썩 했는데. 본인이 캐스팅 안 했다고 기사도 안 본거야?”
“그... 그런 건 아닌데...”
“농담이야. 농담. 그리고 이 작품 하는 거 네 덕분이기도 해.”
“나?”
“사실 이 작품 한선유가 나온다고 하길래 출연하기로 결심한 거거든.”
“어?”
혹시나 혜민이 선유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소민의 어색한 물음에 혜민이 명랑하게 말했다.
“한선유가 나오면 망할 위험성이 적잖아. 워낙 네임밸류가 탁월해서.”
“아... 그렇지.”
두근거리던 심장이 금세 안정을 되찾는 걸 느끼며 소민이 자신의 모습에 실소를 지었다.
“아무튼 캐스팅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한 명만 빼고.”
“뭐, 어느 드라마나 장단이 있기도 하고 그런 거잖아. 왜? 아이돌이라도 나와?”
“아니.”
“그럼 왜?”
“음... 그 사람 알아?”
“누구?”
소민의 물음에 혜민이 조금 뜸을 들였다. 무슨 뜻인지 알아챈 소민이 자신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혜민이 입을 열었다.
“민시준. 연기는 그냥 그럭저럭하는데 소문이 영 꺼림칙하거든.”
대본 리딩을 해야 할 장소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땡하고 울리는 엘리베이터 음과 함께 들려오는 혜민의 말에 소민은 삽시간에 몸이 굳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몰랐어요? 시준씨가 당신이랑 왜 어울려줬는지?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주지도 않을 거면 놔주는 게 어때요?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줄 수 있거든요.’
삼년 전, 기억이 순간 생생하게 그녀를 옥죄어 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혜민이 창백하게 굳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는 소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래? 안 내려?”
“미안한데... 감독님께 다음에 다시 뵙겠다고 좀 전해주면 안 될까? 선약이 있었던 걸 내가 깜빡했어. 부탁할게. 고마워.”
혜민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은 1층 버튼을 누르고는 연거푸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다리에 힘이 풀렸 주르륵 무너져 앉았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잖아. 내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울지 마.”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소민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힘겹게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난 소민이 땀이 밴 손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연거푸 쓸어 올렸다. 그 때 다시금 1층에 도착했다는 엘리베이터 음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어? 채소민?”
천천히 고개를 든 소민의 눈에는 절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 서 있었다.
“오랜만. 아, 지금 내리는 거?”
친절한 듯 보이지만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시준이 엘리베이터에 있던 소민의 팔을 잡아 밖으로 끌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약속이 있어서...”
겨우 입술을 뗀 소민이 시준의 눈을 피하며 말하자 시준이 소민의 팔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소민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그 약속 나 때문인 것 같은데? 나 잊지 않았지?”
소민의 눈에 시준의 얼굴이 들어오자 소민이 겨우 턱을 잡고 있는 시준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이, 이거 놔요.”
“에이. 서운하네. 나는 보고 싶기도 하고 그랬는데.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싶어서 감독님한테 특별히 불러 달라 그랬는데...”
그 말에 머리가 진공상태라도 된 것처럼 멍해졌다.
“왜... 왜...”
작게 중얼거리는 소민의 말에 시준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왜일까? 머리 좋잖아.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파들파들 떨리는 소민을 보며 시준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을 때였다.
“둘이 뭐하는 거지,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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