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다치지 않게
57.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오는 한 여자를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쳐다봤다.
“예약했는데요.”
“네. 성함이...”
“유세란씨요.”
“네. 이쪽입니다.”
앞서 안내하는 종업원을 뒤따라 사라지는 여자를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여자 퀸 아니야?”
“설마... 들리는 말로는 한선유랑 스캔들 일방적으로 낸 거라잖아. 그게 사실이면 저렇게 뻔뻔하게 얼굴 들고 나왔겠어?”
“그렇겠지? 그냥 비슷한 사람이겠지?”
귀에 들리는 소리를 모른 척 도도하게 고개를 들고 종업원을 따르는데 종업원이 한 방 앞에서 멈춰섰다.
“이 방입니다.”
고개를 까딱한 그녀가 문을 열자 방 안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아, 왔니?”
“안녕하세요.”
방에 들어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그녀에게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째서 저렇게 적의가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지간히도 적의로 찬 시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나가고 싶었지만 소속사 사장은 가서 잘 보여야 할 사람이라고 했다.
선유가 약속한 게 있다고 해도 그 동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퀸은 최선을 다해 그 시선을 참아 내고, 예의를 지키려 노력했다.
“앉아.”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자리에 앉는데 문이 열리며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먹자.”
편한 자리가 아닌지라 뜨는 둥 마는 둥 수저를 놀리는 데 날 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얼마 전에... 꽤나 크게 이슈를 터뜨렸더구나. 뭐가 부족해서 그랬니? 요새 너... 그래도 나름대로는 꽤 잘 나가던 참인 것 같던데...”
물음 같았지만 물음이 아니었다. 명백한 힐난이 섞인 발언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두 눈동자가 눈에 들어 왔다.
“그 일은 이미 끝났고, 오늘 이 자리와는 상관없습니다.”
그 말에 앞에 앉은 사람이 피식 웃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물 잔에 담겨 있던 물이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누가 그러디? 이 자리가 그 일과 상관이 없다고. 김대표가 그랬어? 저런... 너 안심시켜 내보내느라 그랬나 보구나.”
전혀 안타까움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태도에 퀸이 결국 모욕감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이...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요.”
“나? 글쎄...”
“왜 이러시는 건데요?”
그 물음에 비웃음을 날린 그 사람이 말했다.
“걔가 내 스폰서거든.”
“무슨 헛소리를... 한선유가 누굴 스폰 한다구요?”
“내가 걔 엄마라서 말이야.”
“무... 뭐라구요?”
“젊은 애가 가는 귀가 먹었니? 내가 걔 엄마라고. 친엄마.”
그 말에 퀸이 멍하니 자신의 앞에 여자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낸 그녀가 그 시선보다도 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봐도 훤하지. 나이는 먹어가고 어린애들은 치고 올라오고, 마땅한 은퇴 대책은 준비가 안 됐고. 그래서 붙잡아 보려고 한 게 선유겠지. 그런데... 급이 있지. 어디 네까짓 게... 네가 아무리 좀 떴다 해도 급이 다르잖아, 급이! 언감생심, 어딜 넘봐?”
그 말과 함께 퀸에게 다시금 액체가 날아들었다. 입가에 와 닿는 시큼한 맛과 머리에 남은 무언가에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 시원하게 드시라며 나왔던 미역냉채가 그녀의 몸에 닿아 그 시원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네가 한선유랑 스캔들 났던 애들하고 같은 급이면 내가 이러진 않아. 근데...”
그렇게 말하며 세란이 퀸을 아래 위로 훑어 내렸다.
“이름이 아깝지. 넌 퀸이 아니라 신데렐라를 꿈꾸는 꽃뱀인데 말이야.”
“꼬, 꽃뱀?”
“또 한 번 개수작 부리면... 네 그 잘난 인지도가 너한테 어떻게 비수처럼 날아드는지 보게 해줄테니 처신 잘하려무나. 지금도 네 팬들 중에 실망한 사람 많다던데. 남은 팬들이라도 끌고 가고 싶으면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한 그녀, 선유의 어머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와 전화기를 들었다.
“김대표? 저예요.”
- 아, 예.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얘기는 잘 끝나셨는지...
퀸의 소속사 대표인 김대표와의 통화였다. 저자세로 나오는 그 태도에 세란이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잘 끝내고 싶었는데. 애가 영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김대표가 마무리 좀 잘 해줘요.”
- 그럼... 소송건은...
“내가 선유한테 잘 얘기해 볼게요. 선유는 명예가 훼손됐다고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하겠다는데 어쩌겠어요. 같은 바닥에서 모르고 지내는 사이도 아니고. 돕고 살아야지. 그럼 마무리 좀 잘 해줘요.”
그렇게 말한 세란이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애시당초 선유가 생각한 적도 없는 소송이지만 김대표가 너무도 쉽게 넘어 와서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어쨌든 다행이야.”
선유가 낸 스캔들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여자 쪽만 정리하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세란이 식당을 한 번 더 돌아보고는 구두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식당에 혼자 남은 퀸은 모멸감에 부들부들 떨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
“아니 고작 여기 오자고 나를 차에 태운 거예요?”
기가 찬다는 듯한 소민의 말에 선유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래서 뭐?’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운과 제대로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그녀를 끌어 차에 태운 그가 자신을 데리고 온 곳은 C엔터테인먼트를 돌아 나와 300m쯤 떨어진 소공원의 주차장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소민이 이내 밖에서는 자신이 잘 안보이도록 의자에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여길 걸어 나오면 한선유씨 불편하긴 하겠네요. 안 그래도 C엔터테인 주변엔 팬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기는 했겠어요.”
“알아줘서 고맙군.”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뭐, 뭘 그렇게 봐요?”
“그냥. 입만 열면 계약하자고 하던 사람이 계약하자는 말을 안 하길래.”
“정말... 계약 하려구요?”
“왜? 하면 안 돼? 채소민씨가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지, 뭐.”
단호한 선유의 말에 소민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하하하! 잘 됐네요. 한선유씨 계약서만 넘기면 촬영은 아마 일사천리일테니까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소민의 말에도 선유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자꾸만 지난 번 그의 집으로 그녀의 기억을 몰고 가서 소민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계약 할까요? 계약서. 갖고 왔죠?”
그 말에 선유가 뒷좌석으로 팔을 뻗어 계약서를 그녀 앞으로 갖고 왔다.
“그 쪽도 제작사에 일임받고 온 거고, 나도 대표가 알아서 하라고 했고.”
“그러네요. 그럼 이제 계약만 남았네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계약하면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네?”
소민이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으려는 찰나였다. 선유의 핸드폰이 격한 진동음을 냈고, 핸드폰을 확인한 선유가 수신을 거부했지만 핸드폰은 이내 다시 진동했다.
“여보세요?”
상대방이 뭐라고 했는지 선유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리고 또 장시간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선유가 가만히 듣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 그리고 그건...”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지만 미안하게 됐어. 내가 하라고 시킨 건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고 또 찾아오면 나한테 전화해.”
그렇게 말한 선유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놓지 않은 그의 손에 힘줄이 솟아 있었다.
“괜찮아요?”
소민의 물음에도 한참을 선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말로는 표현하기조차 힘들 여러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있던 선유가 천천히 고개를 내리더니 다시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아까 그녀에게 한 질문은 새카맣게 잊은 것 같았다. 그렇게 계약서를 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도 허허로워서 소민은 덜컥 겁이 났다.
한참이나 말 없이 계약서를 보던 선유의 눈빛이 다시 그녀의 모습을 담았을 때는 아까와 같던 친밀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일말의 흔적도 없이. 그 모습으로 선유가 그녀에게 딱딱하게 물었다.
“하나 묻지.”
“뭐를...요?”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가운 어조에 소민이 어색하게 되물었다.
“내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 다시는 내 앞에 안 나타날 건가?”
마치 계약해 줄테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소리로 밖에는 들을 수 없는 선유의 말에 소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거야... 한선유씨가 결정하는 거죠.”
선유의 말에 심장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태이면서도 애써 평정을 가장한 소민이 그렇게 말하자 선유가 정면을 응시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을 정면을 보던 그가 시선을 계약서로 내렸다. 마지막장까지 꼼꼼하게 읽은 선유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지금... 계약하게요?”
소민은 자신의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선유가 계약서에 서명란에 펜을 가져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런 소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유는 순식간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는 아직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소민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제작사에 전해주세요.”
낮고 차갑게 공적인 목소리를 띤 그의 말에 소민이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해고통보 같다고 생각하려 한 건 거짓말이었다. 솔직히는 이별통보를 받는 것 같았다. 속상한데 속상하다 티를 낼 수도 없고 먼저 끝이라 말하고 싶지도,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그래서 그렇게 계약을 망설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먼저 선을 긋고 잘라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한 순간에. 서운함을 애써 감춘 소민이 애써 침착하게 그의 말에 대답했다.
“예. 말씀하세요. 한배우님.”
“소속사를 통해 일정을 조율해달라구요.”
예상했던 말이지만 막상 실제로 선유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아... 네.”
“그리고...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뭔가를 덧붙이려던 것 같던 선유가 이내 고생했다는 말을 하며 계약서를 넘겼다. 느릿하게 계약서를 받아든 소민이 목례를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소민이 내릴 때까지 핸드폰을 쳐다보던 선유가 자신의 차로, 그와 멀어져 가는 소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다치지 않게.”
마치 입안에 쓴 풀이라도 들은 것처럼 입맛이 썼다. 머리는 그렇게 되뇌고 있었지만 이제 소민을 지금처럼 볼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소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도 한참을 더 멈춰 있던 선유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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