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56화 (56/105)

56. 쇠뿔도 단김에 빼란다고

56.

요 며칠 준영은 백대표와 함께 선유의 컨셉을 앞으로 어떻게 전향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컨셉팀과 함께 회의를 한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 덕에 스케줄이 비게 되어 선유는 간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뭐야, 구두로 통보하겠다고 하더니 이제 계약서는 필요 없다 이거야? 이 여자 진짜 너무 하는구만?”

그렇게 중얼거린 선유가 미동조차 없는 핸드폰을 노려보다 이내 집어 들었다.

“천하의 한선유가 먼저 전화도 다 걸고. 죽을 때가 됐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이내 마음을 먹은 듯 입술을 꾹 다물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

“아침 일찍부터 연락드려서 놀라셨죠? 제운씨.”

“에이, 놀라긴요. 소민씨 전화면 언제든 환영이죠.”

제운의 소속사를 방문한 소민과 함께 회의실에서 제운이 면담 중이었다.

“근데... 제운씨 주연 맡으셔도 되는데 제가 조연으로 소개해드려서 어떡해요.”

“괜찮아요. 작품이 좋은 게 중요한 거지, 배역이 크고 작은 게 중요한가요? 첫 촬영도 저 너무 즐겁게 했어요. 소민씨가 가신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건...”

“이해해요. 그 날은 어쩔 수 없었잖아요. 아무튼 가끔 저희 소속사랑 제작사 사이에서 조율만 해주세요. 저도 소민씨가 권해주신 작품 말고 다른 스케줄이 겹칠 때가 있어서요.”

“그건 제가 최선을 다해서 해 드려야죠.”

“제가 소민씨가 캐스팅하러 오신다고 하면 무조건 OK하는데. 그거 아세요?”

“왜요?”

“소민씨가 저한테 나쁜 걸 권하는 일이 없다는 걸 아니까요.”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니에요?”

“너무 믿는 게 아니라 당연히 믿는 거예요. 연예인들 사이에 소민씨 소문, 모르세요?”

“제 소문이요? 무슨...?”

약간은 걱정이 되는 듯 되묻는 소민을 향해 제운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감독은 채종환 감독. 캐스팅디렉은 채소민. 백전백승이 확실하다. 이런?”

“아하하하하하! 제운씨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니에요?”

“저 진짜를 얘기하는 건데요?”

“과찬인데요?”

그렇게 제운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갈 즈음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소민의 핸드폰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소민이 발신인을 확인했고 제운도 소민의 핸드폰에 뜬 발신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민이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핸드폰을 엎어 진동이 더 이상 나지 않게 했다.

“왜 안 받아요?”

“지금 받기는 좀... 그래서요.”

“왜요? 편식쟁이가 누구길래요?”

“그... 한선유씨에요.”

“한...선유씨요?”

소민의 말에 제운이 그렇게 반문했다.

“아... 지난 번에 캐스팅하신다더니... 아직 안 됐어요?”

제운이 지난 번 선유와 함께 했던 촬영장에 소민이 찾아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소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하겠다고 구두로는 계약 비스므리하게 했어요.”

“그럼 잘 된 거 아니에요? 계약서 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계약서만 쓰면 되는 거죠...”

그렇게 말하는 소민이 말끝을 흐렸고, 그 얼굴에 설핏 서렸다 사라지는 감정을 제운이 놓치지 않았다. 서운해 하는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어렸다 사라졌다.

“그럼 더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화를 받아야 계약서를 쓸 일정을 잡죠. 나 때문에 신경쓰는 거면 그냥 받아도 돼요.”

“아니에요. 지금은 제운씨가 먼저예요.”

소민의 말에 제운이 활짝 웃어 보였다.

“제작사 쪽에서는...”

소민이 설명을 위해 재잘거릴 때마다 낭랑하게 퍼지는 음색과 오밀조밀 예쁘게도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며 제운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운과의 회의 중간에 잠깐 쉬자며 회의실을 나온 소민이 화장실로 나와 전화기를 확인했다. 아까 한 번 울린 후로 무음으로 설정해 놓은 전화기에는 더 이상의 부재 전화는 없었다.

“남자가 삼세번도 모르나.”

섭섭한 마음에 그렇게 투덜거릴 때였다.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그녀의 핸드폰에 전화 알림이 떴다.

“어, 한선유다.”

편식쟁이라는 네 글자가 떠 있는 전화기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바라보던 소민이 심호흡을 한 차례 한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늦잠은 잘 즐겼나?

듣기 좋은 선유의 목소리가 그렇게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늦잠이요?”

- 지금까지 잔 거 아니야?

“아닌데요?”

소민의 답변에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여보세요?”

혹시 끊긴 건가 싶어 그렇게 묻는 소민의 귓가에 선유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 그럼 내 전화를 일부러 무시했다는 건가?

“그건 아니에요.”

화들짝 부정하는 소민의 말에 선유가 물었다.

- 그럼 뭐 했는데?

“일 때문에 회의했어요.”

그렇게 답하던 소민이 묘한 이 대화에 중얼거렸다.

“꼭 남자친구처럼 그러네. 헷갈리게.”

- 뭐라고?

“아, 아니에요.”

스스로 뱉은 말에 귀까지 순식간에 열이 올라 발개졌다.

- 그래서 지금 어딘데?

“왜요? 어딘지 알면 뭐하게요?”

- 뭐하긴. 계약, 안할 건가?

“계약... 해야죠. 언제 할까요?”

- 쇠뿔도 단김에 빼란다고 오늘 하지.

“오늘......이요? 대표님 스케줄 되신대요?”

- 대표가 알아서 하래. 이미 허락한 거라고.

“그래도... 대표님 계신 자리에서...”

- 괜찮아. 계약하자고 빠순이 흉내내면서 따라 다니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아닌 척 하기는. 어디야? 내가 갈게.

“나 참... 누가 계약에 목을 맨 건지 모르겠네요. 알겠어요. 여기...”

소민이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자 곧 전화는 끊겼다. 끊긴 전화를 든 채로 소민이 멍하니 서 있었다. 하긴 이미 일식집에 선유와 같이 약속을 잡아줬다는 것 자체가 계약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니 상관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은 가라앉고 있었다.

해고 통보를 받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한 번도 직장에 다녀본 일은 없지만 왠지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선유가 여지껏 단 한 번도 캐스팅디렉터를 통해 일정을 조율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지금 기다리는 계약은 계약만료 내지는 해고 통보임이 뻔했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암묵적으로 예견 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쉽게 그가 계약을 하려고 하자 심장이 조여 왔다.

“나 왜 이래? 이제 계약 성사 되는 건데... 한선유한테 까였던 거 아니냐는 말 아니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되는 건데...”

세면대에 서 있던 소민이 세면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잔뜩 실망한 울기 직전 같은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뭐가 속상한 건데.”

거울 속 여자에게 묻는 듯 말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답은 하나라는 걸.

그녀가 알려준 위치로 차를 몰고 가면서 선유 역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대로 무언가 바뀐 듯 했다. 아쉬운 것도 그녀여야 하고, 매달려야 하는 것도 그녀여야 하는데 자신의 옆에 없는 그녀를 찾는 건 자신이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는 게 이런 거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차를 세우고는 자신의 눈앞에 들어온 건물을 바라봤다.

전화로 듣고 각오를 하긴 했지만 생각 그 이상으로 기분이 나빴다. C엔터테인먼트라고 쓰여진 간판을 보는 순간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으니 예상보다 더 큰 각오가 필요했다. 여긴 그가 싫어하는 온갖 연예인들이 모여 있는 집합체였다. 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세균이 득시글거리는 장소랄까.

C엔터테인먼트가 꽤 규모가 큰 회사인 까닭에 스캔들 난 여자 연예인 1,2,3이 여기 있었다. 거기에다 그에게 끈질긴 구애를 펼쳤던 모델 1,2와 그에게 친한 척하지만 사실은 적대감을 가진 게 뻔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라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대체 여긴 누굴 만나러 온 거야?”

들어가고 싶지 않던 그가 결국 마음을 다잡았다.

“들어가자, 들어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용기 내어 적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곳에 발을 딛기로 했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타이밍 좋게 내려오는 그녀가 시야에 들어왔고 그 뒤에서 문을 열어주며 그녀가 먼저 나가게 배려하는 김제운의 모습 역시 함께 들어왔다.

“뭐야, 또 김제운이었어?”

선유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운씨, 이제 들어가 보세요.”

“아니에요. 소민씨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이럴까봐 내려오시지 말라고 한 거였는데.”

“그럴 수 있나요. 기억해 달라는 말에 정말 잊지 않아주셨잖아요.”

“저야말로 박대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하죠.”

“저는 소민씨가 이 작품 보자마자 저 떠올리셨다는 말에 엄청 긴장했어요.”

“왜요?”

“나중에 제가 연기한 거 보고 소민씨가 실망하실까봐요.”

“에이~ 그럴 리가요. 제운씨 정도면 극 중에 선혁이 능가하고도 남을 만큼 멋있으신대요. 첫 촬영도 다 보진 못했지만 정말 짱이었어요.”

“하하하하하!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소민씨가 도와주세요.”

“넵! 걱정 마세요.”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눌 때였다.

‘빠앙!!!’

C엔터를 클락션 소리로 가득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울려대는 소리에 제운과 소민이 화들짝 놀라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삐딱한 시선을 한 선유가 차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고 치정극의 불륜을 목격하는 남주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BGM이 깔리는 것 같은 느낌은 아마 그녀의 착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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